아프가니스탄 여행기 1 (카불로의 여정 04.7.20)

7월 20일(화)

 오늘은 드디어 카불로 향한다.

 위험하고 정확한 정보가 없지만 항상 행운의 여신이 나와 함께 하리라 믿는다.

 아프간으로 가기 위해 라왈핀디 시장에서 산 전통옷을 입었다.

 이곳 현지 사람들이 '홈디파트먼트'라고 부르는 허가증을 얻기 위해 페샤워르 박물관 옆에 위치한 경찰서에 들어갔다.

 입구에서 건물로 들어서려고 하자 무장 경관들이 제지를 한다.

 9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는 것이다. 지금 시각은 8시..

 어제 현지인 말을 믿고 일찍 간게 잘못이다.

 시간이 남아 식사를 하려고 재용이와 함께 돌아다니다 마땅한 식당이 없어 그냥 경찰서 입구에 배낭을 놓고 무장 경관들이랑 놀다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건물 3층에 구석진 곳에 허가증을 발급해 주는 사무실이 있는데 인심좋은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안내해 줘서 쉽게 허가증을 얻을 수 있었다.

 영어가 유창한 할아버지에게 어제 우리에게 권총을 겨눈 파탄족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자기도 파탄족이라며 반가워 하신다.. 이런.. 쩝..

 허가증을 받고 나가려고 하자 할아버지는 택시는 구했냐고 물어본다.

 구하지는 못하고 여관에서 2000루피에 주선해 준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말도 안되는 가격이라며 800루피면 충분하다며 택시를 구해준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나를 가르키며.. 학생이니까 이렇게 해준다고 한다.

 이런.. 난! 학생이 아니래두! 이곳 사람들은 내가 대학생.. 심지어 10대로 보는 이도 있다.

 나이들어 보일려고 계속 콧수염을 기르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어째튼 9시 40분 정도가 되자 택시가 왔다.

 할아버지에게 감사의 표시로 우리나라 돈 1000원 짜리를 선물로 주니까 좋아하신다.

 건물에서 내려와서 대기중인 택시에 짐을 실었다.

 자.. 이제는 여태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한 후배 재용이와 헤어질 시간.. 우리는 손을 맞잡으며 한국에서 만날것을 기약했다.

 첫 해외 여행이면서 비교적 힘든 실크로드 여행을 멋지게 해내는 재용이가 대견스러웠다.

 이제는 새로운 출발~!!

 택시는 카불을 향해 출발했다.

 빠르게 다리던 택시는 기름을 넣지 위해 잠시 주유소에 멈췄는데 기름 가격을 유심히 계산해 보니 1리터당 6.5루피이다. 130원.. 우리나라의 10분의 1도 안되는 가격이다.

 허가증 복사를 하기 위해서 멈췄을때 택시운전사에게 주스를 사주니까 매우 좋아하며 이후 더욱 친절해 졌다.

 복사를 하고 30분정도 국경쪽으로 달리니 택시에 총을 든 무장 경찰이 탄다.

 이곳은 마약이 유통되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기때문에 법으로 외국인 여행자는 1명의 무장경찰이 따르게 되어있다.

 때문에 허가증도 필요했던 것이다.

 계속되는 파키스탄의 평지가 끝나가고 저 멀리 험준한 산맥들이 보인다.

 산맥을 향해 택시는 빠르게 달렸고 산들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긴장되었다.

 아.. 저기가 아프간으로 가는 길목이구나..

 페샤워르를 출발한지 2시간 40분만에 국경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달리 국경은 활발한 모습이다.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오가는 분위기이고 그리 삼엄하지도 않다.

 파키스탄 오피스에 들어가 스탬프를 찍고, 택시기사에게는 800루피, 무장경관에게는 팁으로 150루피를 주고 돌려보냈다.

 아프간 볼더쪽으로 슬슬 걸어갔다. 주변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국경 경비는 비교적 허술해서 스탬프를 받지 않고 그냥 지나가도 모를 정도이다.

 카불로 가는 택시를 흥정하니 10달러에서 더 내려가지 않는다. 할 수 없지..

 택시는 사람이 다 채워질때까지 1시간 30분을 더 기다리고 출발했다.

 처음에는 길이 잘 닦여 있어서 빠르게 달렸다.

 이제부터는 아프간이다.. 얼마전에도 중국인 11명이 습격을 받아 사망했고 끊임없이 외국인에 대한 테러가 일어나는 곳이다.

 간혹가다 국경에서 카불로 가는 길에 스나이퍼가 잠복해 있다가 저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긴장했다.

 길 주변은 그야말로 사막지대이다.

 따가운 햇빛에 가끔 보이는 황토색 흙집들.. 그나마 카불 강변에는 푸른색 식물들이 눈에 띈다.

 건조하고 워낙 더워서 택시 기사는 자주 정차를 해 물과 음료수를 사 먹는다.

 계속되는 오르막길, 평지길을 반복하다 보니 저 멀리 도시가 보였다.

 지금 아프간에서는 탈레반 활동이 왕성한 곳이 3군데 있는데 북쪽은 쿤두즈, 남쪽의 칸다하르, 그리고 바로 이곳 잘랄라바드이다.

이 도시에서 배고픈 김에 식사를 했지만 혹시나 있을 돌발사태에 대비해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길에 나오니 몇몇애들이 동냥을 한다. 국경에서 부터 동냥을 하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

 파키스탄과 비교해서 더욱 빈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재 전세계의 아편 생산의 70%를 아프간에서 생산하는데 그 중심지가 바로 잘랄라바드이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전체 분위기가 험악하다.

 긴장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불볕 더위와 건조함이 날 괴롭히기는 하지만 역설적일지는 몰라도 이곳 사막 경치는 정말 아름답다.

 잘랄라바드 이후 비포장 도로는 계속 되고 절벽위에 걸쳐진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원래 이곳 구간은 러시아가 아스팔트를 깔았지만 오랜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가끔 파괴된 탱크가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후 7시.. 국경에서 출발한지 6시간이 지났고 어둠이 조금씩 깔리고 있었다.

 카불 시내는 어두워지면 그야말로 위험해진다. 오랜 전쟁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 되었기에 밤은 위험하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식작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택시가 빨리 가길 바랄 수 밖에..

 7시 30분 심한 모래바람이 한창인 가운데 조금씩 집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저 멀리 카불이 보였다.

 아.. 드디어 도착했구나.

 택시가 내려준 지점에서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요금을 지불하고 시내로 들어오기 위한 택시를 잡았다. 60af(1400원)

 파키스탄에 비해 비싸다.

 시내에서 park호텔을 찾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피곤해서 아무 호텔이나 들어 갈려고 했는데 하루 자는데 무려 60달러.. 이런 말도 안되는 가격이다. 다른 호텔도 비슷해서 가장 싸봤자 30달러 밑으로 안간다.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비싼걸까?

 혹시나 해서 게스트 하우스에 가니 더욱 가관이다. 100달러.. 80달러..

 park호텔은 아무리 찾아도 없구.. 오기가 생겨 싼호텔을 찾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밤 11시면 정전이 되는데..

 할수없이 공동화장실에 샤워시설도 없는 후진 호텔을 말도안되는 가격 20달러에 방을 잡았다.

 마음이 아프지만 2시간 반동안의 방황을 끝냈다는 안도감도 조금 있었다.

 카불 숙박비가 이렇게 비싼것은 현지 NGO들이 무분별하게 돈을 써서 올려 놓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장을 푼 후 10분정도 있으니 카불시내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이곳은 11시가 넘으면 암흑의 세계로 변한다.

 그나마 전에 호텔방 잡기은게 다행이네..

 아픈 상처를 지닌 위험한 나라 아프간에서의 첫날은 고된 하루가 된채 저물었다.

페샤워르에서 재용이랑 헤어지는 순간..

아프간으로 가는길.. 저 멀리 산악지역이 보인다.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에서 파키스탄쪽 볼더 많은 차와 사람이 왕래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을 넘어 중립지역에서 바라본 아프간볼더.. 저 멀리 아프간 국기가 보이다.

전쟁후 아프간에 필요한 원조물자를 실은 트럭들이 많이 달린다.

주변지역은 그야말로 민둥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척박하지만 명랑한 아프간인들..

 볼더에서 날씨가 너무 더워 계속해서 음료수를 사먹었다. 아직까지는 파키스탄 루피가 통용된다.

 가옥은 유리창은 전무하고 정말 열악하다.

부서진 집과 저 멀리 보이는 민둥산

 허드렛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소년

  UN산하 기관 WFP에서 구호물자가 들어가고 있다.

  카불로 향하는 도로.. 처음에는 평지라 쌩쌩 달렸다.

주변에는 온통 사막.. 정말 이런곳에서 사람이 산다는게 신기하기만 했다.

  끝없는 사막.. 날씨도 정말 더웠다.

도로는 거의 보수가 되지 않아서 아스팔트 곳곳이 균열 되어 있다.

  간간히 보이는 주유소.. 모든 물가가 파키스탄보다 비싸다.

  저 멀리 보이는 잘랄라바드시.. 마약의 도시이기도 하다.

잘랄라바드 시내.. 외국인인 내가 이곳 사람에게는 낯설기만 할 것이다.

휴게소.. 더위탓인지 음료수를 파는 가게들이 많다.

아프간 젓줄인 카불강.. 아프간에서 유일하게 수량이 풍부한곳이기도 하다.

  끝없는 사막.. 이런 척박한 땅을 위해 23년간이나 전쟁을 벌였다.

카불강에서..^^ 점점 얼굴이 삭아간다.

 택시에 같이 탄 멤버들과 함께.. 영어가 유창한 대학생이 1명 있어서 편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카불강 유역은 물이 풍부해서 기초적인 농사가 가능하다.

여행의 즐거움.. 사가지고 갔던 참외비슷한 과일을 나눠 먹었다.

현지주민들.. 아직 카메라 앞에서는 어색하다.

오아시스.. 닭과 칠면조가 평화롭게 앉아 있다.

  산위에서 바라본 카불강유역.. 강주변 이외에는 식물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카불강의 호수.. 카불에서 쓰는 전기는 모두 이곳 호수의 수력발전소(댐)에서 생산한다고 한다.

 카불로 향하는 길을 가다가 발견한 아프간의 상징.. 지난 23년간의 전쟁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부서진 탱크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여행기 2 (카불의 이모저모 04.7.21)

7월 21일(수)

 아침 6시에 일어나니 이미 카불시내는 차들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전쟁의 상처가 있기는 해도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7시쯤 호텔 밖으나 나갔는데 어제와 달리 청바지 차림으로 나갔다. 안전이고 머고 이제는 배찌리라~

 카불은 많은 사람들과 차로 북적였지만 활기차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주변 산부터 거의 모든 집들이 흙색이라서 마치 흑백 티비에 내가 출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로만 듣던 아프가니스탄의 중심부에 있는게 사뭇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제 그렇게 애타게 찾던 파크호텔은 내가 있던 호텔에 나가자마자 찾을 수 있었다.

 어제 어두울때 이곳에 와서 간판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공사중이라 어짜피 이용할 수 없었다.

 오늘 숙소는 어디서 잡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때 불현듯 이슬라마바드 서울식당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병희 소장님이 생각났다.

  PCO라고 적힌 간판이 있는 가게는 돈을 주면 전화를 할 수 있는 장소인데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전화를 하니 이병희 소장님이 전화를 받으신다.

 육로로 카불로 왔다고 하니까 놀라워하시고 또한 반가워하시며 12시쯤에 카불탄툰(대학)에서 만나서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하신다.

 전화를 끊기전 타지키스탄 대사관 위치를 물어보았다.

 다시 호텔로 들어가 짐을 꾸리고 체크 아웃을 했다. 말도 안되는 20달러짜리 호텔.. 다시는 보기 싫었다.

 택시를 타고 이소장님이 알려준 '와지아크라바르칸'이라는 거리로 갔다.

 택시를 타면서 거리를 살펴볼 수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됬다고 보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차들이 있고, 특히 UN 마크가 찍힌 차량들이 저마다의 임무수행을 위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외국공관과 상류층이 사는 듯한 집에는 3미터정도 되는 높은 담장에 여지없이 무장 경관들이 있으며 검문 또한 철저했다.  자살폭탄 테러가 빈번해서 그런듯 하다.

 타지키스탄 대사관은 와지아크라바르칸 거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파키스탄 은행의 옆문물에 있는데 국기가 없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찾을 수 있다.

 타직영사가 영어가 서툴러서 의사소통 하는데 힘들기는 했지만 비자는 그 자리에서 발급받을 수 있었다. 단.. 비자피가 무려 100달러나 했다.

 이소장님과의 약속시간이 2시간 정도 남아서 카불탄툰까지 슬슬 걸어갔다.

 거리의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카불탄툰쪽으로 가는데 도중에 과잉친절한 경찰을 만나서 택시를 함께 타고 카불탄툰(대학)까지 왔다.

 이 경찰은 나보고 친구라면서 대학안까지 따라온다. 귀찮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친절할려고 하는거니까 꾹 참았다.

 이곳이 앞으로 아프간을 이끌 수재들이 있는곳이구나.. 카불대학에 들어서면서 가진 첫 느낌이다.

 카불대학내는 바깥과는 달리 자유로운편이다. 여자들은 차도르를 쓰지 않고 맨 얼굴로 다니며 캠퍼스 잔디밭에 자유롭게 앉아 책도 보며 사색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카불대학 여대생들을 보니 아프간 여자들은 정말 이쁘다는 것을 느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피부도 고왔다.

 이곳 전통이라는 친구는 왜 저런 이쁜 얼굴들을 가리고 다니라고 강요하는지..

 자유로운 캠퍼스에 나도 편승하고 싶었지만 문제는 내 옆에 20살짜리 경찰이 따라다니고 있다는것..

바쁜데 괜찮냐고 물어보니 지금 근무중이라 괜찮다고 한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가라고 할 수도 없구,.

 학내에 외국인이 들어온게 신기한지 몇몇 대학생이 영어로 말을 걸면서 대학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면 옆의 경찰친구는 위험하다고 말린다..

 잔디밭에 잠시 앉아 있을때 이 친구가 계속 나의 돈을 보자는 것이다.

 그에게 쉽게 가지고 있는 달러를 보여줄 수 없기에 신용카드를 보여주면서 이걸로 돈을 뽑는다고 했다.(사실 이곳에서 신용카드를 쓰는 방법은 모름)

 이소장님가의 약속시간이 다된 11시 50분이 되자 경찰과 헤어질때가 되었다.

 헤어질때 경찰은 나에게 자신이 점심을 먹어야 하니 100Af를 달라고 한다.

 참.. 기가 막혀서..

 '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좋아한다. 네가 진정한 나의 친구라면 돈을 요구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며 휙 뒤돌아섰다.

 카불대학 정문에 조금 기다리니 이소장님이 차를 끌고 날 데리려 오셨다. 며칠전 파키스탄에서도 봤지만 아프간에서 보는 한국인이라 더욱 반가웠다.

 사무실에는 또 한분의 한국인이 계셨는데 미모의 여인인 송간사님이다.

 오랜 전쟁과 혼란을 겪은 아프가니스탄은 전적으로 선진국의 지원과 각국의 NGO들의 구호 활동에 의존하고 있다.

 내가 방문한 NGO 단체를 아프간안에서도 소외된 지역에 학교를 세우고 다리와 수로를 만들어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현지인 스텝도 만날 수 있었는데 훗날 이 나라에서 이 단체를 이끌게될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어가 유창하고 자부심이 넘쳐 보였다.

 모처럼만에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현지 NGO들에게 이곳 사정을 물어볼 수 있었다. 아프간에 대해 국내에서 할 수 없는 소중한 공부시간이 되었다.

 원래 이곳 NGO 단체들은 여행자들을 꺼리는 편이다. 초창기에는 반갑게 여행자들을 재워주고 식사도 제공해 주었지만 생각 없는 여행자들이 이상한 소문을 내고 더 많은 여행자들이 NGO 사무실로 오는 바람에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나 역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식사를 마치고 보니 1시반이 되었다.

 이소장님은 나에게 3시까지 시내구경을 하고 오라고 하신다.

 1시간 반동안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이곳 사람들의 삶을 옅보았다. 여중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책가방을 메고 하교하는 일은 탈레반 정권이었던 3년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시장통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건축 현장..

 마치 예전에 화보에서 본 한국전쟁 직후의 우리네 삶을 보는듯 했다.

 3시쯤 NGO 사무실로 돌아왔다. 드라이브를 나가기전 내 배낭도 차에 같이 실을려고 하니까 이소장님은 29일 새로운 자원봉사자가 오기까지 방이 비어 있으니까 여기서 자도 괜찮다고 하신다. 내심 오늘 숙박으로 고민하던 나에게 정말 고마운 말씀이다.

 이소장님과 미모의 여인 송간사님 그리고 나.. 이렇게 3명은 함께 카불시내를 드라이브 했다.

 여자인 송간사님은 외출을 할려면 옷을 슬람 전통복장으로 갈아입어야만 다. 여자가 소매나 다리가 보이는것은 이곳 사람들이 용납을 못하기 때문이다.

 카불은 8시반에 업무가 시작되어 오후 4시면 일과가 끝난다고 한다.

 러쉬아워 시간이라 그런지 카불시내는 차들로 완전히 막혔다.

 1년전 아프간 경제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서 UN주도하에 일제 중고차들을 이곳에 헐값에 풀어놓다시피 했다고 한다.

 차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에 따른 교통 시스템과 도로가 따라주지 않으니 카불의 교통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거기다 이곳 사람들은 운전 에티켓이 거의 없어서 도로는 더욱 혼잡했다.

 카불 도로를 헤치며 처음 간곳은 카불 외곽의 달라이만 궁전이다.

 궁전을 포함해서 주변의 대부분의 건물이 심한 포격을 맞은듯 무너지거나 앙상한 몰골로 남아 있었다.

 카불시내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전쟁전에는 세상부러울게 없는 멋진 궁전이었을거라 생각하니, 카불에서도 전쟁의 상흔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나타내는 건물이라 생각이 든다.

 다시 시내로 돌아오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집들과 건물은 복구 공사중인 일부건물을 제외하고 거의 파괴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무너질듯한 건물에도 사람들은 거적대기를 문을 삼은채 살고 있다고 한다.

 다음 행선지는 Nadir shah의 묘지로서 지금 시대 국왕의 아버지묘라고 한다.

 전쟁의 영향으로 황폐화 되었지만 카불 시민들도 종종 찾는 카불에서 얼마되지 않은 명소중에 하나이다.

 모래바람이 심하게 불기는 했지만 묘지가 있는 언덕에서 바라보는 카불은 정말로 아름답다.

 언덕에서 내려오니 검문하는 경찰이 담배갓을 달라고 했지만 이소장님이 잘 타일렀다.

 다음 행선지는 샤레나우 지역에 있는 고성이다.

 이성은 제국주의 시절 영국군이 침입했을때 최후까지 저항했던 거점성이다.

 카불 시내에서는 잘보이지만 차량진입이 까다로와 성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성안에는 부서진 곡사포를 비롯해서 많은 포탄피들이 이리저리 널려있다.

 성위에서 바라본 카불은 아까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곳 샤레나우 지역은 상류층이 많이 사는데 그들이 꾸며놓은 정원때문에 초록빛깔이 많이 눈에 띄였다.

 사진도 찍고 성관람을 끝내고 나올때 역시 이곳에서도 돈을 요구한다.

 약 3시간동안 카불명소와 시내를 드라이브 하면서 이곳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소장님이 자세한 부연 설명을 해주셔서 좋은 공부가 되었다.

 사무실겸 집으로 돌아온 우리 3명은 한국 라면인 해물탕면 2개에 각종 재료를 넣고 밥과 반찬을 곁들여 저녁식사를 했다.

 이곳에서 한국라면은 그야말로 최고 귀한 음식이다. 심지어 다른 교민집을 방문할때도 선물로 라면 한봉지가 최고의 선물이 될 정도로 귀한 음식이다.

 저녁을 먹고 제목이 '오사마'인 영화를 함께 봤다.

 오사마는 2004년 아카데미상 외국어 부문을 수상한 작품으로 탈레반 시절 유린된 여성의 인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저 시절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아프간 역사에 있어서 그나마 좋았던 시절은 70년대초까지 소련의 영향력에 있었던 시절이다.

 그때의 스커트 입은 아프간 여성과 반바지 차림으로 농사를 하는 여성의 사진을 보면서 지금과는 전혀 매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다 볼때쯤 되니 나를 빼고 다 잠이 들었다.

 멀리 타국에서 활동하시느라 피곤하실 것이다.

 내일은 카불을 떠나 탈레반 정권시절 파괴된 대불로 유명한 바미안으로 떠난다.

Park 호텔에서 바라본 카불시내 전경.. 황량하기는 하지만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차들과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

  또 다른 방향.. 시내전체가 무슨 흑백영화처럼 색깔이 없다.

 거리의 노인.. 오랜 전쟁탓인지 거리에는 불우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와지아크라바르칸.. 나무가 많다는 것은 부유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타지키스탄 대사관 경비원과 함께.. 모든 경비원이 총을 가지고 있다.

  UN기관.. 거의 모든 외국공관은 높은 담장에 삼엄하기 그지 없는 경계를 한다.

중국대사관 옆에 한 건물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이 기관에서 직원을 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아프간의 실업난을 알 수 있는 장면

시내중심가.. 우리나라처럼 달동네가 형성되어 있다.

거리의 잡상인.. 많은 구호물품 때문인지 거리에는 물자가 넘쳐나온다.

 UN지원하에 싼 가격에 일본 중고차들이 아프간으로 들어왔다. 도로가 자동차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항상 교통 체증이 일어난다.

번잡한 카불시내.. 2002년 150만이던 인구는 300만으로 불어났다.

카불탄툰(카불대학)... 여학생들이 자유롭게 교정을 걸어다닌다.

  잔디밭 이곳저곳에서 대학생들이 토론을 하고 독서를 한다. 여느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프간에서 가장 자유로운 카불대학에서 나도 한컷^^

 카불대학까지 따라온 20살 경찰.. 결국에는 나에게 돈을 뜯으려다 실패했다.

카불대학 건물.. 새로지은 듯 건물은 비교적 깨끗하다.

 카불대학 정문앞의 담배파는 노인.. 세월의 고난이 얼굴에서 보인다.

  시내 곳곳에는 군사기지가 산재하고 있다.

 수많은 노점상들.. 아프간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카불로 향하고 있지만 생산활동이 전무한 이곳에서 일자리를 찾기란 쉽지가 않다.

카불시내 놀이터.. 어디서나 아이들 노는건 똑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달라이만 궁전 주변.. 전쟁전까지만 해도 아프간에서 가장 발달된 지역이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했던 달라이만 궁전.. 전쟁의 상처로 앙상한 몰골만 남아있다.

 카불시내 산동네.. 불결한 환경 때문에 유난히 피부병이 많다. 정면에 보이는 수로는 한국 NGO단체에서 얼마전 만들어줬다.

이곳 건물은 거의 모두 흙색이다.

재건 활동이 한참인 와중에도 이렇게 방치된 건물이 많다.

파괴된 건물속에서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건물이 언제 무너질지 몰라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KOICA(한국 정부 기관)에서 만들어준 건물.. KOICA는 주로 정보통신분야에서 아프간에 지원을 해주고 있다.

Nadir shah의 묘지.. 파괴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많은 아프간인들이 찾아오는 명소이다.

샤레나우고성에서 바라본 부유층 지역.. 나무가 많이 눈에 띈다.

고성을 지키는 아프간인들.. 이들도 나중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포탄피.. 포탄피는 아프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사진찍는걸 유난히 좋아하는 아프간인들..

  고성의 정상부근.. 이곳에는 동굴이 있는데 알수 없는 미로라고 한다. 한번 들어갔다가 실종된 이들이 많다.

고성에서 카불시내를 배경으로.. 내가 이땅에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추억이 될 것이다.

  오후4시가 지나자 온시내가 먼지에 뒤덮혔다. 매일 일어나는 현상으로 많은 외국인 NGO 들이 폐병에 걸리는 원인이기고 하다.

 아프간에서 먹은 라면..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정도의 희귀성과 맛을 지니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여행기 3 (바미안 04.7.22~23)

7월 22일(목)

 새벽 4시반에 알람시계 소리에 맞춰서 일어났다.

 지난밤 12시에 잠이 들어서 그런지 무척 피곤했다.

 아프간에서 장거리 버스는 날이 밝아지는 시각에 출발한다.

 새벽 4시반이면 날이 밝아지니까 5~6시에 출발하는 셈이다.

 이곳 NGO 오피스는 무장경관을 두지 않은 대신 2교대로 집을 봐주는 아저씨를 둔다.

 예비역 대령인 아저씨는 친절하게 택시를 잡아주고 싼가격에 흥정까지 해주셨다.

 깊게 패인 아저씨의 주름을 보니 세월의 험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저씨와 피곤한 몸으로 배웅을 나온 이소장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이소장님은 바미안에 갔다온 후에 다시 오피스로 오라고 하신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택시가 도착한 곳은 바미안으로 출발하는 봉고들이 있는 길가이고 사람이 거의 다 찬 듯한 봉고를 골라 300af(7500원)에 바미안으로 출발했다.

 전형적인 산악 사막지대가 쭉 이어졌고 포장도로는 이내 비포장으로 변했다.

 어제 잠을 많이 못자서 그런지 이내 스르르 눈이 감겼다.

 출발한지 3시간 뒤인 오전 9시 한 마을에 아침식사를 위해 1시간 정도 정차했다.

 모두가 식사를 하러 저마다 식당으로 들어갈때 난 식사를 못하고 음료수만 사먹었다.

 어제 카불시내에서 사먹은 아이스크림이 잘못되서 그런지 속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대신 마을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부서진 탱크와 곡사포들을 보았다.

 외딴 시골인 이곳에도 전쟁의 상흔은 남아있었다.

 봉고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고..

 카불에서 바미안으로 가는 길은 7시간이 걸리는데 넓게 보면 큰 고개 하나를 넘는 과정이고 길은 계곡을 따라서 이어져 있다.

 주변산들은 모두 사막이지만 물이 흐르는 계곡 만큼은 다르다.

 푸른 식물들이 빽빽히 차 있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산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가 한줄로 길게 늘어져 있는 모양새이다.

 바미안 근처에 이르러서는 빙하지형을 볼 수 있었는데 그러한 지형이 고스란히 남을 수 있는 것은 이곳이 고지대이고 오래전부터 사막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빙하기가 1만년전쯤에 끝났으니 이곳은 최소한 1만년전부터 사막이었다는 추론을 해 보았다.

 바미안까지 오면서 새로산 MP3 플레이어로 쭉 음악을 들었는데 같이 탄 아프간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 본다.

 옆자리에 앉은 할아버지 귀에 이어폰을 꽃아 주었는데 평소에 듣던 음악과 다른 음악이라 영 익숙치 않은 표정이다.(하긴.. 매일 탬버린 박자의 음악만 듣다 머라이어캐리를 들으니 그럴수 밖에..)

 오후 2시가 조금 넘어서 바미안에 도착했다.

 명성과는 달리 바미안은 조그마한 마을 규모이다. 저 멀리 파괴된 대불이 있었던 자리가 보인다.

 바미안이 카불보다는 높은 지대이긴 하지만 오후 2시의 바미안은 따가운 햇볕에 건조하고 무척 더웠다.

 수집한 정보를 따라 마을 어귀에 있는 마르코폴로 호텔에 갔다.

 영어가 약간되는 친절한 주인 아저씨와 흙집이라 낮에도 시원한 방.. 무엇보다도 카불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세.. 100af(2달러).. 정말 마음에 들었다.

 2층에는 서양애들 3명이 있었는데 이 호텔에 지내는게 아니라 잠시 들렀다 가는 듯 했다.

 1층에서 여장을 풀고 잠시 누워 있을때 아까 본 서양 여자애가 자신들과 같이 택시를 타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파괴된 대불을 보러가자고 한다.

 난 동의 했고 30분 뒤에 만나기로 했다.

 잠시뒤에 한국인 남여 여행자 한쌍이 찾아왔다.

 아프간에서 가장 유명한 호수인 반디아미르 호수를 갔다온 길이라고 한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양애들과의 약속 시간이 다 되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30분이 넘게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서양 애들도 약속을 어길때가 있구나..

 다시 호텔로 들어와서 편하게 누웠다. 이렇게 더운날 시원한 흙집에 말년 병장 처럼 누워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것이 무엇이 있으리..

 오후 6시반이 되었을때 파괴된 대불을 보러 호텔을 나섰다.

 마을에서 얼마 안 떨어진 대불터는 낮에 가면 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100af~500af를 받는다고 한다.

 파괴된 대불에도 입장료를 받다니..

 내 사전에는 절대 용납이 안 된다.

해질때 쯤 되니까 돈 징수하는 군인도 없을테고 시내에서 시골마을 풍경들을 감상하며 유적지로 향했다.

 지뢰가 많기로 소문난 아프간이라 황무지는 되도록 피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탈레반 정권은 이곳의 대불들을 파괴했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53m 파파대불과 38m인 마마대불이 있다.

 두 대불을 중심으로 주변 절벽에는 수많은 불상과 유적들이 있었지만 모두 파괴되었다.

 비교적 가까운 마마대불에 가봤다.

 파괴된 석상의 잔해가 고스란히 있었고 영어로 된 팻말이 있었다.

 내용은 조만간 일본 정부에서 지원을 해서 대불을 복구한다는 내용이다.

 마마대불에서 조금 떨어진 파파대불을 보고나자 날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호텔에 돌아와 식사를 할려고 했지만 아침부터 시작된 배탈이 더 심해져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근처 가게에서 과일을 사서 간단하게나마 요기를 했다.

 바미안의 밤은 서늘하다 못해 약깐 쌀쌀하기까지 하다.

 잘 시간이 거의 다 되서 싱가폴인 NGO가 왔는데 여기에서 기거를 하며 일을 한지 2주가 다 되간다고 한다.

 영어는 물론 파키스탄~아프간 국경에서 일한적이 있어 우루두어, 아프간어도 유창하다. 정말 대단한 사나이다.

 모처럼만에 서늘함의 쾌감을 느끼며 잠 들었다.

7월 23일(금)

어제보다 배가 더욱 아팠다. 설사도 자주하고 몸도 무기력 해졌다.

 때문에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푹 쉬기로 했다.

 원래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반디아미르 호수로 가려고 했지만 1500af가 넘는 렌트비용 때문에 혼자가기에는 무리이다.

 오늘 하루 이곳에서 기다리면서 멤버를 모을 수 있으면 내일 함께 가기로 하고 그럴 수 없으면 호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마을 규모에 맞지 않게 이곳은 UN차량들이 많이 다니고 상점에는 물건들이 풍부했다.

 특히 평소에 좋아하는 프링글린스 과자가 있어 우유와 함께 아침삼아 사먹었다.

 호텔 방안에서 론니 플래닛 중앙아시아편과 좋은 생각 7월호를 읽었으며 시간을 지냈고 때때로 밀린 여행기를 정리 했다.

 그렇게 시간 죽이기 작전을 열심히 수행하던 오후 2시..

 갑자기 서양 여자 한명이 여관 주인과 또 한명의 현지인을 데리고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여행자인가?..

 그녀는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LA타임즈 기자이고, 이곳을 취재하며 여행자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한다.

 하긴.. 이곳에 많은 NGO외국인이 있기는 하지만 여행자들은 다 떠나고 거의 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난 영어를 잘 못해도 괜찮냐고 물어보니 상관 없다고 한다.

 참.. 여행을 하다보니 외국 유명 신문하고도 인터뷰도 다 해보네..

 기자는 수첩을 꺼낸후 나의 신상을 차근차근 물어보았다.

 이름과 사는곳을 알려주고 현재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아프간 여행을 하는 목적과 사람들에 대해서 물었다.

 아프간을 여행하는 목적은 지금의 아프간 사회를 통해서 한국전쟁 직후의 우리사회 모습을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고 처음에는 아프간 사람들이 거칠다는 선입견을 가졌지만 알고보면 친근하고 친절하다고 말했다.

 바미안 대불 복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탈레반이 대불을 파괴한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 또한 하나의 역사이고 복원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아프간인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외국에 도움을 요청해야지 지금처럼 이방인이 나서서 복원하는것은 어딘가 잘못된 느낌이다.

 처음에 유네스코는 복원에 반대했지만 유네스코에 많은 지분을 가진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복원을 결정했다.

 발빠른 일본 정부는 바미안에 관광 사무소까지 설치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포즈를 취한 사진을 찍고 10분간의 인터뷰를 마쳤다.

 '내가 지금 멀 한건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기자가 가고 30분쯤 뒤에 있다가 이 호텔 직원인듯한 사나이가 알수 없는 자기네 말로 계속 머라고 한다.

 대충 보니까 사진 찍어 달라는 것이다.

 솔직히 아침부터 나한테 계속 사진 찍어 달라고 해서 짜증이 났다.

 디카로 한장 찍어줘도 계속 머라 그런다.

 멀 원하는 거지?

 그는 갑자기 자기 셔츠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누군가 찍어준듯한 폴라로이드사진(즉석사진)을 꺼낸다.

 '나보구 어쩌라고..? 바라는것도 많아요.'

 그냥 무시를 하니 조금 있다 물러난다.

 해가질때쯤 바미안 마을을 둘러 보았다.

 오늘 아무런 여행자도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내일 반디아미르로 가는것은 물건너 간 것 같다.

 마을 중심부를 지나갈 무렵 개울 건너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뛰어가서 축구에 끼워달라고 했다.

 빨간 유니폼팀과 안 유니폼팀으로 나누어져 있고 심판까지 있는 제법 모양새를 갖추었다.

 난 안 유니폼팀에 낑겼다.

 한국에서 한 축구 한다는 자부심을 가는 나이기에 공을 잡자마자 전력질주를 했다.

 그런데.. 가슴이 찟어질 정도로 답답하다.. 맞다.. 여긴 고산지대지.. 그 이후 헥헥 거리면서 플레이를 했다.

 이슬람 복장을 하고 축구를 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의 축구열정은 대단했고 실력 또한 만만찮았다.

 특히 등이 휜 곱추 사나이가 열심히 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여긴 열악해서 한국과 달리 흙바닥에서 축구를 한다고 했다.

 나야 머.. 여행전 선생님들과 축구를 하다가 맨땅에 무릎을 심하게 까져서 2주동안 병원에 다녔는데 멀..

 축구 시합이 끝나니 서로들 나와 악수를 하려고 하고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할려고 한다.

 고맙기는 하지만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정중히 거절했다.

 바미안은 하지라 종족이 살고 있다.

 징기스칸의 군대가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또 다른 정복지를 향해 떠날때 1000명의 몽고인을 남겨두었다.

 그 후손들이 하지랑 종족이다. 하지라라는 말은 '1000' 이라는 뜻이다.

 몽고종족이기에 우리와도 같은 뿌리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프간에서 세번째로 숫자가 많은 종족인 하지라는 특유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가장 잘 사는 종족이 되었다.

 호텔에 돌아오자 싱가폴 친구가 퇴근해 있었다.

 우린 같이 2층으로 올라가 차도 마시며 모여 있는 사람들과 같이 비디오를 봤다.

 파키스탄 영화였는데 너무나 유치하다. 우리나라의 70년대 스타일의 남자가 주인공인데.. 격투신도 어찌나 유치하던지..

 마침 파키스탄에서 구입한 '반지의 제왕 3'가 있어 틀어주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일면서 영화에 집중한다.

 내일 다시 카불로 돌아간다. 반디아미르 호수를 못가 아쉽지만 그보다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잠 들었다.

바미안으로 출발하는 승합차들이 모인곳. 오전 6시면 떠난다.

버스정류장 주변의 아프간인들.. 아프간 사람들은 사진찍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바미안으로 가는 중간지점.. 이곳에서 밥을 먹었다. 바로 앞에 버려진 곡사포가 보인다.

차들이 많이 지나다녀서 그런지 비교적 번화했다.

  바미안으로 가는길은 비교적 개울이 많아 식물들이 많이 자란다.

  어디가나 파괴되고 버려진 집들이 있다.

하지라족 여자애.. 카불과는 달리 하지라족은 비교적 개방적인 분위기다.

비옥한 논.. 물이 있는곳이면 주변에는 논이 있다.

하지라족 아이들.. 어디서나 그렇듯 아이들은 발랄하다.

  같이 버스를 타고온 아이.. 똘똘하게 생겼다.

  아프간의 거의 전 국토가 산악지역이다.

바미안시.. 외부 구호기관이 많이 들어와 있다.

우리나라의 면단위도 안되는 작은 규모이지만 상거래가 활발하다.

저녁 무렵의 주변 모습..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바미안석불.. 파파대불이 있었던 곳.. 지금은 파괴되고 없다.

마마대불이 있었던 곳.. 주변의 모든 석굴은 파괴되었다.

  대불쪽에서 바라본 바미안시

탈레반시절 파괴된 대불 주변 석굴들

파괴된 대불.. 일본정부 주도로 복구를 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바미안 풍경.. 마치 한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 하다.

  가축의 똥을 보관하는 모습.. 가축의 똥은 불을 지피는데 사용한다.

짐을 끌고가는 당나귀.. 언제나 느끼지만 당나귀는 정말 불쌍하게 생겼다.

바미안의 꼬마아이.. 정말 귀엽다

  당나귀를 타고 소를 끌고가는 청년.. 정겹다

 나한테 계속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마르코폴로 호텔 직원.. 덕분에 이렇게 내 홈페이지에 사진이 올라오는 영광을 누렸다.

다재다능한 싱가폴 청년..

 

 아프가니스탄 여행기 4 (많은 생각을 하게 한 하루 04.7.24)

7월 24일(토)

 짐을 챙기고 새벽 5시에 마르코폴로 호텔을 나섰다.

 서늘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5시반 카불을 향해 출발했다.

 뒷편 좌석에는 미국인 여인이 이슬람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무척 더운 모양이다.

 그 미국인 바로 옆에 앉은 아프간 여인은 통풍이 되지 않은 나일론 차도르로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는데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곳 아프간에서의 여성의 존재란 과연 무엇일까?

 아프간 전쟁의 역사는 여성을 억압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1970년대 초반까지 비교적 여성의 지위는 자유로왔다.

 스커드를 입고 다니고 카불 시내 버스 운전자의 90%가 였었을 정도로 역할이 많았다.

 하지만 전쟁은 극단의 사상을 요구하게 되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렇듯 분란이 생기면 이성적이고 포용적인 입장보다는 극단적이고 강경한 쪽이 힘을 얻기 마련이다.

 이곳 아프간은 전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더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를 요구하게 되고.. 그 결정체가 바로 탈레반이고 이슬람 근본 주의에 따라 여성을 억압했다.

 여성에게는 맨살 하나도 보이지 않은 옷을 입도록 강요하고 절대 바깥일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외출 또한 남편하고 동행 했을때에만 할 수 있으며 절대 외간 남자하고 대화 할 수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많은 과부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재혼도 할 수 없었다. 사실상 살지 말라는 말과 같다.

 탈레반 정권 초창기에 여성들이 데모를 했지만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칼을 들고 다닌 군인들은 여성의 손목이 보이면 손목을 잘랐고 마녀 재판 형식으로 사람들을 모아서 이슬람 율법을 어긴 여성들을 생매장 하거나 군중의 돌에 맞에 죽게 하는 형벌을 가했다.

 하루는 지금의 카불 공설 운동장에 여성들을 집단 총살하는 모습을 마치 스포츠 중계 하듯이 TV로 생중계 한 적이 있는데 이 모든 여성들의 죄는 일을 했거나 남편 없이 외출을 했다거나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등의 우리 사회에서는 죄조차도 될 수 없는 죄목이었다.

 이러한 탈레반 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는 파키스탄 이다.

 아프간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지금 탈레반은 파키스탄에 피신해 있으며 여전히 파키스탄은 탈레반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탈레반 축출 이후 UN과 미국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아프간 재건 사업에 가장 이득을 보는것도 아프간에 물자 수송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파키스탄 이다.

 때문에 파키스탄은 유사이래 가장 왕성한 호황기를 현재 맞이 하고 있다.

 탈레반의 영향 때문인지 탈레반이 축출된 지금도 아프간 여성들은 얼굴까지 가리는 나일론 차도르를 쓰고 있고, 아직 거리에서 일하는 여성을 여행하면서 본적이 없다.

 나와 같은 차를 탄 아프간 여성은 카불에 도착할때까지 7시간 동안 한번도 차도르를 벗지 않았다.

 차에는 아프간을 여행중인 키르키즈스탄 대학생이 있었는데 그에게서 타지키스탄으로 가는 길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오후 2시쯤 카불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간 곳은 타직 비자를 받았던 와지아크라바르칸 거리에 있는 아리아나 항공사 사무실이다.

 이곳에서 헤랏까지 가는 비행기표를 2500Af(약 55달러)에 구할 수 있었다.

 전에 카불에서 머물렀던 NGO 오피스에 전화를 거니 송간사님께서 반갑게 받으신다.

 전화를 건 가게에서 전화비를 물어보니 100Af를 달라고 한다. 머야.. 2분 밖에 안했는데..

 일단 70Af를 주고 그 가게에 있는 과일주스를 시켰다.

 외국인인 내가 앉아있자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주인이 가게 비디오에 상영되고 잇는 '소림축구'를 가르키며 한국에도 무술이 있냐고 물어본다.

 한국의 태권도, 중국은 쿵푸, 일본은 가라데가 있다고 말하고 조금씩 시범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아프간에는 머가 있냐고 물어보니..

 주인은 좀 말설이다.. 총이 있다고 대답한다.. 하긴.. 정답이긴 정답이다.

 이렇게 좀 놀다가 나가니 나에게 추가 돈을 받지 않는다.

 오피스에 가니 송간사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작년 여행때 이슬라마바드 서울식당에서 만났던 NGO 직원을 만나볼 수 있을까 해서 작년에 받았던 명함을 송간사님에게 보여주니 깜짝 놀라시면서 마침 오늘 오후 4시에 만나러 가기로 했다고 하신다.

 볼일 보러 가셨던 이 소장님도 오시고..

 4시반쯤 우리 셋이 간 곳은 한국 불교 단체에서 이곳 구호활동을 위해 활동하는 NGO단체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으며 자원 봉사자는 받지 않고 직원형태로 일들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아주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바로 만배이다.

 만약 만배(만번 절을 하는것)을 나보고 하라고 한다면 절대 못할거 같다.

 그만큼 단단히 각오하는 이들만 오는 단체인듯 하다.

 이 단체에 마침 여행중인 남녀 한쌍이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바로 바미안에서 봤던 이들이다.. 여기서 또 만나게 되다니.

 나도 함께 일을 도와주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저녁은 이곳 단체 오피스에서 먹었는데 바로 한국식 카레이다.

 2그릇을 뚝딱 헤치웠다.

 NGO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는것을 옆에서 들었다. 공동체에 관한 것인데 타지에서 몇몇 안되는 사람이 생활을 해야하는 만큼 개인의 자유 보다는 공동의 생활이 더 중요시 됨을 느꼈다.

 이야기를 하고 있을때쯤 이곳 교민들이 교신을 하는 무전기에 전체 공지가 왔다.

 이곳 카불에서도 프로축구 리그가 있는데 한국의 한 선교사님이 꼴찌팀의 코치가 되어서 조련을 시킨팀이 1등팀을 8:0 으로 이기는등 돌풍의 팀으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 팀을 응원하러 오라는 메시지이다.

 저녁 9시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나와 이소장님 송간사님은 원래 오피스로 돌아왔다.

 내일은 헤랏으로 떠난다.

 이소장님도 아쉬우셨는데 오늘은 자신의 방에서 자자고 한다.

 우리둘은 새벽 1시가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소장님은 고국의 소식을 묻고, 난 아프간의 현지 사정에 대해 물었다.

 그러다 언제 잠든지 모른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한국의 두 사나이의 목소리는 서서히 잠과 함께 나즈막해지며.. 아무도 모르게 끊겼다.

바미안에서 카불로 넘어오는길.. 험준한 산맥을 몇 개 넘어야 한다.

  길목마다 집이 있기는 하지만 파괴된 집들이 많다.

  마일드88.. 자세히 보니 한국산 담배이다.

카불 공항.. 공항이라고 하기엔 허술하지만 그래도 아프간의 대문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 여행기 5 (헤랏 04.7.25~26)

7월 25일(일)

 헤랏으로 가는 비행기가 9시에 출발하기 때문에 6시 20분에 일어나서 짐을 챙겼다.

 20분뒤에 작별 인사를 하려고 이소장님을 깨웠다. 피곤하신것 같이 깨우기 미안했지만 자기전에 꼭 깨우라는 당부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항까지 가는 택시를 잡고 짐을 실었다.

 이제 이병희 소장님하고 헤어질 시간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또하나의 소중한 사람을 알게 되었고 이제 헤어져야 한다.

 이소장님은 나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안겨주셨고 아프간에 대해 많은 사실들을 알려 주셨다.

 다음에 만날것을 기약하며 공항에 도착하니 어제 불교 NGO에서 재회를 했던 한국인 여자 여행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있는 남자애는 파키스탄으로 떠나고 이 여자분은 헤랏에 나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될 이 여행자의 이름은 안보라이고 01학번이다. 학교를 휴학하고 7개월째 여행을 하는 철의 여인이다.

 비행기에 타기직전 대합실에서 한국인 가족을 만났다.

 대사관에 근무하시다가 지금 두바이로 휴양을 가는 길이라고 하신다.

 최근 헤랏에서 과잉선교 활동을 하다 추방된 한국인 여성이 있으니 무슨일 있으면 대사관으로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주신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오전 9시 헤랏으로 향하는 보잉 727기가 이륙했다.

 보잉 727.. 지금은 단종되고 생산이 중지된 30년도 넘는 비행기이다.

 이륙하면서 카불시내가 장난감처럼 작아지는 장관을 연출 했지만 낡은 비행기답게 이리저리 흔들리고...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구름한점 없는 날씨 때문에 아프간 지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황량한 사막 지형에 물이 흐르는 듯한 계곡에는 실처럼 초록색이 쭉 이어졌다.

 헤랏에 가까워지고 주변은 산악에서 평지로 변했다.

 카불에서 출발한지 1시간 정도 지나 헤랏 공항에 착륙했다. 비행시간 내내 비행기가 안전하도록 빌었었다.

 공항 편의 시설은 아예 없고, 짐도 30분 정도 지나서야 용달차에 싣고 온다.

 아프간의 어디서나 그렇듯 습도 0%의 무더위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헤랏까지는 택시를 타고 가야 했는데 200Af을 부른다. 훽하고 뒤돌아서 조금 걸어가니 이내 100Af로 깍인다.

 헤랏은 카불과 달리 주변에 산이 없고 더 잘 정돈된 느낌이다.

 무엇보다 차량 숫자가 카불보나는 현저히 적다.

 배낭 여행자에게 가장 유명한 JAAM호텔로 갔다. 택시기사도 잘 알고 있어서 쉽게 찾았다.

 호텔은 건물 4층에 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영어가 유창한 편이다. 2베드 1룸에 하루 200Af(4달러상당)이다.

 우리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낯선 남녀가 한방을 쓰는게 이상한 모양새이지만 밤낮으로 문을 계속 열어두고 생활하므로 이상하게 볼것도 없다.

 헤랏에서 가장 먼저 할일은 그동안 밀린 여행기를 정리하는 것이다.

 미리 그려온 지도를 보며 인터넷 까페를 찾았는데 속도도 빠른편이고 윈도우 XP라 쉽게 한글을 쓸 수 있다.

 가격은 시간당 60Af(1.3$)로 그나마 저렴한 편이다.

 여행기를 정리하고 그 동안 궁굼했던 한국 소식을 본 후 호텔로 다시 돌아 왔다.

 잠시 쉬고 있는 사이 한 서양애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는 자신은 프랑스인이라 말하며 인터넷 까페를 물어본다.

 우리는 이곳 지도를 보여주면서 위치를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호텔에서 쉬다가 선선해진 저녁 무렵 다시 인터넷 까페로 갔다.

 프랑스 친구는 여전히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

 오후 8시쯤 늦은 시간인거 같아서 호텔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이야기를 하며 호텔로 돌아가는데 그는 황급히 인터넷 카페로 뛰어간다. 카메라를 잊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맘 착한 주인이 카메라를 서랍에 보관하고 있어서 찾을 수 있었다. 

 배고픈 우린 샌드위치 가게에 갔다.

 이곳 샌드위치는 25Af로써 청결하진 않지만 맛은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하나만 먹어도 배부른데 프랑스인은 2개를 연거푸 먹는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다.

 호텔로 돌아오니 동행자인 보라는 혼자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우리방에 들어온 프랑스 여행자는 누가 들을까봐 문을 조용히 닫더니 자신은 원래 이스라엘인이라고 조용히 말한다.

 그 프랑스.. 아니 이스라엘 여행자는 이슬람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국적을 속이고 다닌다고 한다.

 그는 1년반째 여행을 하며 타직 파미르 하이웨이에서 아프간으로 왔다고 한다.

 어? 바로 내가 갈길이잖아..

 그런데 파미르 하이웨이를 여행하려면 허가증이 있어야 통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 비자만 있으면 당연히 통과할 수 있을줄 알았는데..

 이스라엘 여행자 이름은 샤기이다. 샤기는 루트와 허가증에 관련된 유용한 정보를 나에게 주었다.

 그동안 영어가 되는 여행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 마치 그동안 참았던 이야기보를 터트리듯 밤늦도록 우리방에서 이것저것 말한다.

 오랫만에 밤늦도록 영어 공부를 했다.

7월 26일(월)

 헤랏도 카불처럼 건조하고 덥기는 하지만 사방이 트여 있어 바람이 많이 분다.

 바람 역시 열풍이기는 하지만 안부는것보다 낫다.

 건조지역의 좋은점이 있다면 어제 빨래가 오늘 아침이면 바싹 마를정도..

 보라와 함께 어제 샤기와 갔이 간 샌드위치 가게에서 아침을 떼웠다.

 오늘의 미션은 헤랏 시내를 관광하고 마자리샤리프로 가는 비행기편을 알아보는 것이다.

 샌드위치가게에서 비교적 가까운 올드캐슬로 갔다.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려고 하니까 군인들이 안에 로켓포가 있다고 못 들어간다고 한다.

 발길을 돌려 다음으로 간곳은 이곳 헤랏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인 '5개의탑' 이다.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도중에 많은 현지인들과 인사를 했는데.. 헤랏은 외국인이 거의 없고 내 차림새(청바지)가 여기에서는 워낙 눈에 띄는 차림이라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특히 어느 카센터 주인이 우리보고 차한잔 하라며 끌고가다시피 해서 차를 대접 받았는데 갈때가 되어 일어나니까 주변의 모두가 일어나 나와 악수를 한다.

 내가 무슨 유명 인사가 된 기분이다.

 5개의 탑은 명성과 다르게 총탄자국이 많고 겉칠이 많이 벗겨졌다.

 헤랏도 관광인프라만 잘 갖추면 좋은 관광지가 될텐데..

 사진 몇장찍고 다시 시내로 향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는데.. 'HELLO.. How are you..'가 이들이 하는 영어의 전부이다.

 마치 온 시내 사람들을 모아놓고 영어 강의를 했는데 'How are you'까지만 배운듯한 느낌이다.

 친근한 이곳 사람들에게 단 한가지.. 아니 모든 아프간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다면 모두 나를 처음 보면 Japen? 이라고 묻던가 아니라고 하면 China?라고 묻는다.

 우리도 어서 국력을 더 키워 첫빵에 Korea?가 나오게 해야 할텐데..

 건조 기후인 관계로 계속 콜라만 사먹었다.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특징은 펩시가 코카를 압도적으로 앞선다.

 여기서는 펩시달라고 하면 콜라를 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콜라보다 길거리에서 파는 레몬에이드(2~3Af)가 콜라(15Af)보다 훨씬 더 저렴하고 맞있다.

 청결상태는 확실하진 않지만 이곳 사람들이 많이 먹는걸 보니 머.. 죽지는 않겠지..

 길가에 사진을 찍는 사진사가 있어 우리도 찍어 보았다.

 사진기라고 불릴 수 없는 큰 상자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으면 사진사가 잠시 상자의 뚜껑을 연 후 성급히 닫고 사진을 현상하는 작업을 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고 특이하던지 정말 재미있다.

 저걸로 정말 사진이 만들어 질까? 의심이 들지만 정말 사진이 된다.

 마치 30년 전에 찍은 듯한 흑백사진이다.

 원본 사진을 거리를 맞춰 가까이 대치 시킨 후 또다시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그러면 여분의 사진이 완성된다.

 보라와 내가 너무 재미있어 하니까 주변에 사람이 모여든다. 우리가 즐거워 하는게 더 구경거리인가 보다.

 원래는 40Af를 줘야 하는데 인심 좋은 사진사 아저쓰는 우리에게 선물로 그냥 사진을 주셨다.

 누군가가 인사동이나 명동에 적당한 가격으로 이 사진을 찍으면 분명히 히트할 것이다.

 다음에는 시내 중앙 모스크로 갔다. 모스크는 인상과는 달리 한적한 시민공원과 같아서 모스크 안에서 자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모스크 바깥 타일을 만드는 방으로 갔는데 타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모스크 관람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많은 이들과 악수를 했다.

 호텔에 돌아오니 11시정도 되었는데 이미 온 도시가 찜통이 되어 있다.

 이곳은 낮이 되면 도시 기능이 거의 정지하다시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낮잠을 자며 활동도 크게 줄어든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시간대에 따라 시장 전체가 이동한다.

오전 햇빛을 피해 그늘에서 장사를 하면 오후가 되면 그늘의 방향이 반대가 되어 길을 건너서 장사를 한다.

 더위와 햇빛이 이곳 생활리듬을 조절하고 있는 셈이다.

 호텔에서 잠시 쉬고 있으니 서양 중년 아저씨가 우리방으로 왔다.

 프랑스인이라고 소개하면서 어제의 샤기와 마찬가지로 인터넷방이 어디냐고 물어본다.

 이 사람도 이스라엘인은 아니겠지?

 인터넷방 위치를 알 후 성급히 나간다.

 잠호텔에서는 여행자가 오면 가장 먼저 우리방으로 오네..

 하긴 지금 헤랏을 여행하는 여행자는 거의 없는 상태에 한국인이 둘이나 있으니...^^

 좀 있으니 샤기가 우리방으로 온다.

 보라랑 샤기랑 이야기하게 놔두고 밀린 여행기를 쓰러 인터넷 카페로 갔다.

 사실 여행하면서 여행기를 길게 쓰는것도 일이지만 현지에서 타이핑하고 활동하는 카페에 올리는것도 큰 일이다.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기는 하지만 많은이에게 생생한 여행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3시간뒤 다시 호텔로 돌아가니까 샤기는 아직도 보라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이 말이 많다더니.. 머 여행하면서 많이 외로웠나 보다.

 샤기는 중국인을 싫어하다 못해 저주하는 수준이다. 3개월 정도 중국 여행을 하면서 온갖 바가지, 외국인이라고 모여서 킥킥 웃는것, 각종 위생의식불여.. 내가 봐도 중국이 고쳐야 할 문제점이긴 하다.

 말이 많긴 하지만 타직 정보에 관해서는 나에게 귀중한 정보를 많이 주었다.

 저녁 8시쯤 나, 보라, 샤기, 프랑스인 우리넷은 근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외국인 4명이나 있으니 식당에 있는 사람들 모두 우릴 주목한다.

 샤기와 프랑스인은 물고기가 물 만난듯 서로 이야기를 한다.

 샤기는 어제부터 내가 말렸지만 육로로 바이안이나 칸다하르로 갈려고 한다.

 프랑스 여행자가 더 구체적인 최근 사고 사례를 알려줘도 샤기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갈려고 한다.

 칸다하르야 탈레반의 발상지이자 본부를 뒤서 말할것도 없고 헤랏에서 바미안 가는 길은 최근 탈레반의 한 무리가 북상했다고 한다.

 1시간 반 가까이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했다.

 내일 새벽에 보라는 이란으로 샤기는 바미안 육로 여행을 한다.

 아쉽지만 각자 여행의 길이 있기에...

헤랏.. 음료수를 파는 청년.. 외국인인 내가 신기하게 보이나 보다.

헤랏은 카불보다는 비교적 정라가 잘 되어 있다.

노점상 할아버지..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면서 소일거리를 하신다.

  호텔정면에서 바라본 집.. 옥상은 언덕으로 되어 있고.. 도대체 어떻게 된 구조인지 모르겠다.

헤랏의 거리.. 카불보다는 차량이 적은 편이다.

헤랏고성.. 아직도 많은 무기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카불고성 입구에서.. 이제 총든 사람이 전혀 무섭지 않은 레벨까지 올라갔다.

모스크주변의 바자르.. 어디나 그렇듯 사람들이 북적인다.

저 멀리 5개의 탑이 보인다.

5개의 탑.. 멀리서 바라본 웅장함과 달리 칠이 벗겨지고 총탄자국이 흩어져 있다.

아프간에 얼마 없는 문화재일텐데도거의 방치되어 있다.

자동차점 주인아저씨와 함께.. 티를 많이 얻어마셨다.

외국인인 내가 신기한지 모두들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자동차수리공들.. 열심히 일한다.

요술상자와 같은 사진.. 신기하기만 하다.

사진 촬영을 하는 모습.. 이제 상자의 뚜껑만 열면 된다.

사진을 현상하는 모습

시내 중앙에 위치한 모스크.. 아름다운 블루모스크이다.

  모스크 내부의 타일을 만드는 공장.. 외국인이 많아지면 이곳은 출입금지가 되겠지.

공장의 모습.. 인부들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타일을 만든다.

모스크 전경.. 이슬람 지역답게 모스크를 가장 깨끗이 여긴다.

차도르를 쓴 여인.. 덥지 않을까?

헤랏시내 곳곳의 레몬에이드.. 싼 값에 맛있게 마셨다.

옷가게에 모인 아프간 여인들.. 외간남자 앞에서는 얼굴을 보이지 못하지만 그래도 옷가게에는 여자들이 많다.

철저하게 얼굴을 가린 차도르..

가끔 이렇게 군기빠진 할머니도 있다.(상상도 할 수 없는 더운 날씨였다.)

  인심좋은 할아버지.. 아프간의 희망을 말하듯 밝은 미소를 지은다.

아프간 소녀.. 이곳 아이들은 이목구비가 또렷해서 정말 이쁜 얼굴이다. 성인 여인의 모습은 볼 수가 없음

 이스라엘의 모험가 샤기와 나.. 국적은 다르지만 두 모험가는 첫눈에 서로가 통함을 알아챘다.

보라와 나.. 철의 한국 여인이다.(내 콧수염도 좀 자랐네 ㅎㅎ)

 

 아프가니스탄 여행기 6 (또 다시 새로운 도전 04.7.27)

7월 27일(화)

 밤새 갈증이 나서 제대로 잠을 못 잤다. 물을 마시고 싶어도 구할데가 없었으니..

 아침 7시에 일어나자 보라는 이미 떠났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느낄사이도 없이 일어나자마자 호텔 카운터에서 물을 샀다.

 한숨에 1.5리터의 반병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을 마시자마자 온몸에 땀이 샘 솟는게 느껴졌다.

 수분이 보충되니까 몸이 열을 식히려 땀이 배출되는구나..

 우리몸의 신비중에 하나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오전 9시 내일 마자리샤리프로 가는 비행기표를 살려고 하니 오후 2시에 다시 오라고 한다.

 인터넷 카페에 가니까 현재 타직에 머물고 있는 황태성 간사님께 메일이 왔다.

 황간사님은 카불에 있을때 신세를 진 NGO 단체에 1년간 자원 봉사를하다 활동을 마감하고 타직 방면으로 여행을 가셨다.

 내가 하루 늦게 카불에 도착해서 만나지 못했지만 황간사님도 파미르 하이웨이 여행이 목적이기에 메일을 계속 주고 받고 있다.

 타직 수도 두샨베에 머물고 있는 황간사님의 메일은 절망적이다.

 타직에서 파미르하이웨이를 가려면 퍼밋을 발급 받아야 하는데 기간이 2주가 걸린다고 하며 황간사님은 키르키즈로 갔다가 다시 타직 파미르 하이웨이를 간다고 한다.

 나도 포기해야 하나..

 어떻게 루트를 잡아야 하나.. 어제 샤기를 통해서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퍼밋 문제가 이렇게 어려운줄 몰랐다.

 오후 2시가 넘어 다시 아리아나 비행사로 갔다.

 거기서 한시간반을 기다려 내일 마자리샤리프로 가는 비행기표를 1600Af(36달러)에 구했다.

 세시반에 곧바로 간 곳은 인터넷 카페이다. 아시안컵 예선전 한국:쿠웨이트전을 보기 위해서 이다.

 피파 규정 때문에 인터넷으로 경기를 생중계하지 못하므로 문자 중계를 봐야 했지만 순간순간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다음 문자중계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한 나의 마음을 선수들이 알아주었는지 한국이 기분좋게 4:0으로 이겼다.

 피시방에서 나와서 한번도 가지 않았던 길로 잠호텔로 갔다.

 여자옷 시장과 귀금속점들이 쭉 늘어져 있었는데, 얼굴까지 가린 차도르를 쓴 수 많은 여인들이 저마다 귀금속과 옷들을 고르고 있었다.

 외출할 때 입거나 끼지도 못하면서 치장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오직 남편에게 잘보이기 위해서이다.

 아내를 4명까지 둘 수 있는게 이슬람법이라서 부유한 남자는 첩을 들이는데, 우리나라 사극에 보면 궁녀들이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장면을 많이 봤을 것이다.

 이곳 여성의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자 삶의 목표가 남편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아프간에서는 귀금속이 많이 팔린다고 한다.

 호텔에 돌아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파미르..

 처음 여행을 시작할때는 아프간 여행이 목적이었지 파미르라는 자체를 생각한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계속 파미르 하이웨이가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려면 어려울수록 더 도전하고 싶어지는 것 같다.

 일단 타직 수도 두산베로 가서.. 무얼 해야 하지..?

 비행기를 타고 파미르 입구인 콜러그로 가야 하나? 아님 키르키즈로 가야하나..

 ...

 ...

 !!

 타지키스탄 지도를 보며 갑작스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맞아.. 샤기는 콜러그에서 아프간으로 들어왔다고 했지!!'

 여태까지 타직으로 나가는 길이 쿤드즈 북쪽에서만 가능하다는 선입견을 나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샤기가 넘은 길을 그대로 넘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좋아.. 찬수 답게 여행 여행을 하자.. 가능 할지 않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부딧쳐 보는거다.'

 새로운 도전이 나에게 오는것을 느껴졌다. 힘든 여행일수록 더욱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파미르 하이웨이가 시작되는 콜러그로 가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오지인 바닥샨으로 가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지명과 루트를 영어가 되는 호텔주인에게 물어 보았다.

 아프간인들도 잘 모르는 지역이 바닥샨이다..

 할 수 없지.. 직접 부딧쳐 보는 수 밖에..

 3일동안 아프간의 문화와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었던 헤랏.

 아프간에서 가장 발전하고는 있지만 무겁고 암울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 카불.. 그에 비해서 헤랏은 발랄하고 생기있고 무엇보다 아프간 사람의 활달함을 보여준 도시였다.

 귀금속 가게의 금세공품들.. 아프간 여성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고성근처의 시장.. 헤랏은 물자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아프가니스탄 여행기 7 (마자리샤리프, 타직가는길 04.7.28~29)

7월 28일(수)

 오전 7시에 호텔을 나 섰다. 마자리샤리프로 향하는 비행기가 9시에 있다고 하지만 여기는 아프간.. 별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친절한 잠호텔 주인과 종업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모두들 떠나고 혼자남게 된 프랑스 아저씨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아쉬워하면서 나에게 한국에서 어떤 직업을 가졌냐고 물어 보길래 초등학교 교사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초등교사라는데 흥미를 느끼는것 같다. 여태까지 대학생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의 이름은 장으로 프랑스에서 환경관련 사회운동가이며 1달간의 휴가를 받고 아프간을 여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 들를일이 있으면 꼭 연락을 한다고 하며 다음에 만나자고 한다.

 헤랏공항까지 택시로 100Af를 주고 갔다.

 헤랏공항은 이게 공항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시설이 허술하다. 짐도 입구에서 떨어진 허름한 건물에 맡겨야 하고, 보안 시설 역시 허술하다시피 하다.

 헤랏에서 마자리샤리프로 가는 비행기는 먼저 카불에서 헤랏으로 오는 비행기가 다시 마자리샤리프로 가는 것인데.. 역시나..

 출발 시각인 9시가 되도록 비행기는 보이지 않는다.

 'Are you korean?' 공항 의자에 앉아 있을때 동양 사람인듯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니.. 그는 한국인은 아니고 일본인이다.

 이름은 마기이고 일본의 월간지의 기자라고 한다. 이란에서 폐르시아어 공부를 하다가 아프간 시골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한다.

 영어는 잘 못하는 대신 이곳 사람들과 대화가 될 정도로 폐르시아어는 능통하다.

 그를 통해서 마자리샤리프로 가는 다른 아프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타지키 쿨러그로 가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대략적인 루트를 알 수 있었고 구체적인 교통편까지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의 여행 일정을 짜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샤기도 그렇고 마기도 또한 적재적소에서 나의 여행에 등장을 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무슨 롤플레잉 게임인가? 보이지 않는 손이 적제적소에 인물들을 배치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 이다.

 카불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결국 12시에 도착해서 12시반에 출발했다.

 일부러 비행기 창가자리에 앉아서 아프간 지형을 살펴보았다.

 역시 끝없는 사막산이다. 푸름이랑은 거리가 먼 나라.. 그래서 일까? 사람은 녹색을 봐야 마음이 평화로와진다는데.. 그런면에서 아프간이 가야할 길은 멀기만 한거 같다.

 비행기는 50분 정도 날더니 북중부의 중심지 마자리샤리프에 도착했다.

 비행기에 내리자마자 더운 공기가 나의 뺨을 강타했다..

 '덥다.. 너무 덥다..' 마치 사우나에 들오온 듯한 기분이다.

 바람이 불면 시원해야 하는데 열풍이 분다.

 마자리샤리프는 가장 더울때는 50도가 넘게 올라간다. 아프간에서도 가장 더운 곳이고 실제로 탈레반 시절 반군들을 컨테이너 안에 가두워 놓고 더워죽였다고 한다.

 처음 그말을 들었을때는 믿지 않았지만 직접 마자리샤리프로 오니 믿을 수 있게 되었다.

 함께하게된 마기와 난 모스크가 있는 시내 중앙 공원 동쪽에 있는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하루에 1인당 100Af로 저렴한 편이지만 시설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샤워는 전혀 할 수 없으며 화장실도 하나밖에 없어서 불편하다. 더군다나 방은 통풍이 안되서 냄새도 나고 무엇보다 더웠다.

 여장을 풀고 가장먼저 한 일은 환타 1.5리터를 사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마기는 당연하다는듯이 손을 싯더니 현지인처럼 맨손으로 밥을 먹는다.

 밥을 먹고 우린 각자의 일정을 위해 잠시 헤어졌다.

 마기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러 가고 난 헤초스님이 인도에서 돌아올때 3개월 정도 쉬었다는 벌크로 갔다.

 마자리샤리프에서 가장 잘되는 장사는 당연 물과 얼음 장사일 것이다.

 끝없어 늘어서 있는 음료수, 아이스크림 노점들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은 작은 아이스박스에 물과 얼음을 담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팔고 있다.

 이 도시는 지금은 정부가 되었지만 탈레반 시절 북쪽의 10%를 차지했던 북부반군이 활동하던 도시답게 북부반군의 지도자 였던 알 샤 마수드 장군의 대형초상화가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혼란기에 있는 모든 나라가 그렇듯 한 인물에 대한 우상화 작업은 국민 정신까지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좋은 수단이 되기 마련이다. 마수드 장군은 911테러가 일어나기 며칠전에 기자로 가장한 암살범에게 암살을 당했는데 타직민족에게는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지금 아프간 정권을 타직민족이 잡았으니 북부반군을 이끌었던 마수드 장군을 신격화 시키는것은 당연한 작업이다.(생긴것도 좀 잘 생겼다)

 바자르에서 환전을 하고 벌크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을 찾아갔는데 중앙공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벌크라는 단어를 현지어로 적고 간 덕분에 물어물어 갈 수 있었다.

 합승봉고에 15Af를 내고 45분쯤 가니까 벌크가 나왔다.

 벌크의 옛이름은 토하리스탄이다.

 둥근 원형태의 공원인 벌크는 볼거리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옛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이자 혜초스님이 머물다 간 곳이라서 감회가 새롭게 다가왔다.

 헤랏의 잠호텔 게스트북에서 누군가가 적은 혜초스님의 시이다. 정말로 가슴에 와 닿아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혜초스님의 시

1.혜초 스님이 발크에 계씩때 서번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 그를 위해 지은 시

 그대는 서번의 길이 멀다고 한탄하나
 나는 동쪽으로 가는 길이 먼 것을 슬퍼하노라
 길은 거칠고 산마루에는 눈도 많이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떼도 많구나
 새도 날아오르다 깎아지른 산에 놀라고
 사람은 좁은다리 지나가기 어렵구나
 한 평생 살아가며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오늘 따라 천줄기나 뿌리는 구나.

 2.겨울날 벌크에 계실때 눈을 만나 그 감회를 읊은 시

 차가운 눈더미는 얼음과 합쳐 얻었고
 찬 바람은 땅이 갈라지도록 매섭구나
 큰 바다는 얼어붙어 평평한 재단이 되고
 강물이 낭떠러지를 자꾸만 깎아 먹네
 용문에는 폭포까지 얼어붙어 끊기고
 정구에는 얼음이 뱀처럼 서렸구나
 불은 가지고 땅끝에 올라 노래하니
 파미르 고원은 어찌 넘을 것인가?

 -혜초 스님 왕오천축국전 '토하리스쿠'편 중에서

 다시 마자리샤리프로 와서 호텔에 들어오니 열쇠를 가진 마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마기를 기다리며 카운터 앞에서 잠시 여행기를 정리하고 있을때 주인은 흥미롭다는듯 날 보더니 검정 찰흙 같은 물질을 손으로 잘게 분해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짦은 영어로 헤쉬쉬라고 자랑을 한다. 마약을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유통되고 소비되는곳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사람들과 인터뷰를 나간 마기가 돌아오지 않자 잠시 외출을 했다.

 마자리샤리프 시내 주변을 돌아다니다보니 인터넷 카페가 보였다. 1시간당 100Af(2500원)으로 비싸기는 하지만 메일을 기다리고 있을 황간사님과 여러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밤 9시쯤에 호텔로 돌아왔다. 역시 마자리샤리프는 그 명성에 걸맞게 밤에도 더운건 마찬가지였다.

 아프간에서는 여관 개념이 따로 여관방을 대여하는것이 아니라 식당을 겸업하고 있어서 식사를 한 사람들이 식탁을 치우고 거기서 잠을 자는 문화이다.

 마기와 난 방을 따로 잡기는 했지만 너무 더워서 잘 엄두가 안 났다. 마기에게 조금 시원한 식당에서 자자고 하니까 마기는 그냥 방에서 잔다고 한다.

 방에다 짐을 둔채 그나마 안 더운 식당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잤다.

 

7월 29일(목)

 아침에 깨어보니 마기가 바로 내 옆에서 자고 있었다. ‘짜식.. 더위를 못참아 결국 여기까지 온 모양이군’

 잠에 취해있는 마기를 깨워서 작별 인사를 하고 쿤드즈로 향하는 버스들이 있는 정류장으로 갔다.

 아침 6시 이미 정류장에는 많은 차들이 저마다의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자리샤리프에서 쿤드즈로 가는 봉고를 200Af(5000원)에 탈 수 있었다.

 봉고 앞좌석이긴 하지만 앞좌석의 조그마한 중간 좌석이라 자리가 좀 불편했다.

 그렇지만 목적지를 향해서라면 차를 타면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버티는 수 밖에 없다.

 마자리샤프에서 직선으로 향하던 차는 산악지역으로 들어간다. 20년전 소련이 만들어 놓은 길들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차는 속력을 낼 수 있다.

 오전 10시쯤 차는 한 식당앞에 섰다.

 차 주인듯한 할아버지가 외국인인 내가 신기했는지 계속 챙겨줄려고 하신다. 덕분에 비싼 케밥을 공짜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마자리샤리프와 달리 쿤드즈로 가면 갈수록 더위의 기세가 조금씩 가라앉고 녹색이 많아지며 논과 밭들도 많아진다. 고지대이다가 물이 풍부해서 그런듯 하다.

 아프간에서는 처음으로 시원하게 깔려있는 아스팔트를 달리며 초원지대를 내 달렸다. 벌써부터 파미르를 달리고 있는 느낌이다.

 12시가 조금 넘자 쿤드즈에 도착 했다.

 될 수 있으면 쿤드즈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 최근 일어난 외국인 살해 사건 리스트에서 가장 많은 이름을 올린 지역이 바로 쿤드즈이기 때문이다.

 아프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3군데가 있는데 파키스탄에서 카불로 들어올때 들린 잘랄라바드는 마약의 산지/유통지라서 위험하고 칸다하르야 탈레반의 발상지이자 기지라서 위험하다.

 쿤드즈는 좀 다른형태인데.. 탈레반에 반대하는 북부동맹의 일원이었다가 정권을 잡고 논공행상을 받지 못한 부족들이 탈레반에 붙어 저항을 하며 외국인을 대상으로 테러를 자행한다고 한다..

 추악한 권력욕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프간 사람들이 가르쳐준 정보에 의하면 타지키스탄 쿨러그로 가려면 쿤드즈와 페이자드 중간지점에 있는 톨러컨으로 가야한다고 한다.

 쿤드즈에 내려서 톨러컨으로 가려고 하니.. 머 아는 정보가 있어야지..

 운 좋게도 쿤드즈로 오는 봉고에는 오늘 톨러컨으로 가는 아프간인이 타고 있었다.

 그는 식사를 하고 가자며 식당으로 날 데려간다.

 식당의 위생상태가 거의 최악이라 난 점심을 먹지 않고 동행인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당에 키가 훤칠하고 농구를 하면 정말 괜찮을 듯한 체형인 청년이 있었다. 먼가 운동을 하면 좋을텐데 아무 할 일도 없이 식당 소일이나 해주며 지내는 듯 했다.

 ‘저렇게 청년들이 자신의 재능을 키우지 못하는구나..’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는 것도 사회적인 발전과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동행인과 1인당 150Af(3800원)에 합승택시를 잡고 톨러컨으로 향했다. 합승택시가 출발하기 직전 한 아프간 아저씨가 타직 쿨러그로 간다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수첩 1페이지에 걸쳐 장문의 글을 써준다. 아프간 문자로 글을 써서 내가 길을 올바르게 찾을 수 있게 도와준거 같다.

 드넓은 평원과 거기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태 아프간을 여행하면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전쟁의 상처를 거의 입지 않은 평화로운 풍경이다.

 1시간 40분을 달려 톨러컨에 도착했다.

 이곳에 내리니 도저히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희망이 있다면 쿤드즈에서 출발하기 직전 한 아저씨가 적어준 메모뿐..

 택시기사에게 메모를 보여주니 봉고차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신다. 정류장의 봉고는 국경의 마을까지 간다고 한다.

 정말 여행에 있어서 행운의 여신이 나를 반기나 보다.

 이렇게 파미르로 직접 향하는데 많은 사람들을 적제적소에 만나서 이렇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쿨러그로 가는 루트를 알려준 이스라엘 여행자 샤기.. 아무런 정보가 없을때 이곳말을 할줄 아는 일본인 저널리스트 마기를 만나 현지인에게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고 쿤드즈에서 톨러컨으로 가는 길이 막막할 때 동행하게된 동행인.. 그리고 출발하기 직전 내 메모지에 메모를 해준 아저씨..

 어쩜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지.. 무슨 정해진 롤플레잉 게임에 내가 던져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국경마을까지 가는 봉고버스는 1인당 150Af이다. 마자리샤리프에서 쿤드즈로 오는 봉고에서처럼 난 앞좌석 중간에 앉게 되었다.

 허리가 아프긴 했지만 그러한 고통은 3일 걸릴 줄 알았던 아프간~타직 국경을 하루만에 왔다는 기쁨으로 승화되었다.

 봉고는 비포장이고 농사를 짓는 마을과 밭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사막지역이다. 파미르 고원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인가?

 파미르 하이웨이의 사진도 본적이 없지만 점점 흥분이 되고 있었다. 단지 바로 옆자리의 청년이 알 수 없는 말로 나에게 깝죽거리는것만 빼면 기분 좋은 여행이다.

 봉고가 가끔 마을에 정차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외국인을 본적이 없나보다. 내가 모습을 보이면 주변이 어수선해진다.

 티비에서만 보던 한국인이 직접 나타나니까 다들 신기하게 쳐다보고 어린 아이들중에서는 무서워서 피하는 애들도 있었다.

 ‘이상하다.. 외국인들이 지나갔을텐데..’

 봉고는 5시간정도 달려 국경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하루자고 내일 국경을 넘어야 하나?

 옆에 앉았던 청년이 국경인 오이토늄까지 택시를 타고 가라고 보챈다. 아까 봉고에서 계속 깝죽거리기는 했지만 한번 믿어보기로 하고 청년이 잡아준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는 1000Af를 부르는 것이다.

 얼마나 멀기에 이렇게 높게 부르지? 택시를 잡아준 청년은 이 차 이외에는 국경까지 가는 차가 없다고 한다.

 일단 450Af(10달러)까지 깍고 국경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택시는 단 20분을 달리더니 국경에 도착하는것 아닌가.. 순간 바가지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에서 국경수비대와 이야기하는 청년에게 항의 했지만 소용없는일.. 그는 자기는 마을로 돌아간다며 택시기사에게 돈을 지불하라는 것이다.

 완전히 속았네.. 청년의 면상을 갈겨주고 싶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총을 들고 있어서 그 기분을 자제해야 했다.

 내가 너무 파미르에 간다는 기분에 들떠 있어 방심했던 것이다. 좀 더 알아보고 택시를 탔어야 했는데..

 할 수 없이 450Af를 택시기사에게 줬다. 분명히 그 청년도 돈을 받았으리라..

 강을 사이에 두고 타직과 마주한 오이토늄은 국경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허름한 집몇채와 선착장이 전부이다.

 여기서는 집 자체가 없으므로 국경수비대의 초소에서 자야했다. 그 중에 한명이 나에게 달러를 요구했다. 100Af를 쥐어주니 달러로 달라고 한다.

 머? 100달러? 풋.. 이 친구들 세상물정 모르는 친구들이구나..

 조금전까지만 해도 지갑에는 580Af가 있었지만 아까 450Af을 거의 강탈 당해서 130Af 밖에 없었다.

 몸속의 주머니에 많은 달러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걸 보여줄 정도로 정신이 없는건 아니다.

 난 지갑을 보여주며 돈이 130Af밖에 없고 타직가서 신용카드로 돈을 찾을 거라고 하니까 이 친구들이 순진하게 믿는다.

 짐을 풀고 나니 코피가 났다. 생각보다 코피가 멎질 않아서 한참을 하늘을 보며 서 있어야 했다. 아무래도 어제, 오늘의 강행군으로 몸이 많이 피곤했나 보다.

 돈을 요구한 군인을 포함해서 이곳 수비대들은 정말 호기심을 갖고 나를 대하며 친절한 편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가스등으로 밤을 지내는 이곳은 정말 평화롭다.

 강과 선착장 그리고 타직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위에 국경 초소가 있다. 군인들은 이곳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 주변 경치가 운치가 있고 아름답다.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주변에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고.. 배고플때쯤 되자 같이 저녁을 먹자고 군인들이 부른다.

 고물 라디오에서 흐르는 아프간 노래를 듣던 그들에게 나의 애창곡인 ‘마법의 성’을 불러주었다. 그들은 박수를 치며 계속 해보라고 한다. 내가 노래를 마치면 난 한사람씩 지명하며 노래를 해보라고 하고..

 다시 한국 노래를 정성껏 불러주고 심지어 춤까지 추었다. 식사를 하며 그들과 함께 있다 보니 언어는 전혀 통하지는 않지만 우린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이곳 밤은 강바람이 많이 불어 시원한 편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가끔 지직거리지만 은은하게 흘러오는 라디오 소리.. 아프간에서의 마지막 밤은 아프간인들과 함께한 낭만적인 밤이었다.(비록 모기가 많았지만..)

 내일은 마르코폴로와 혜초스님의 발자취가 담긴 파미르 고원이다.

헤랏공항.. 공항이라고 할 수 없을정도로 허술하다.

헤랏공항의 주변시설은 대합실이 전부..

보잉 727.. 이번에도 공포에 떨며 가야 했다.

 마자리샤리프시내.. 덥기로 유명한 아프간에서도 가장 더운 도시이다.

마자리샤리프 시내중심의 모스크 여기서도 모스크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처이다.

무너진 벌크성.. 남아있는 유적은 거의 없다.

벌크공원안.. 1290년대 징기스칸이 오기전까지 실크로드 무역으로 번창했던 곳이다.

벌크성안에 있는 모스크.. 이곳 역시 외형은 파손되었다.

모스크안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어린이들

벌크주변.. 그늘이 진 큰 나무 밑으로 사람들이 왕래한다.

벌크~마자리샤리프도로..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가끔 차 트렁크에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걸 목격한다.

파괴된 탱크들..

이곳은 탱크의 묘지인가? 많은 탱크와 장갑차들이 파괴되어 있다.

마자리샤리프거리.. 너무나 더워서 걸어다니는 행인도 보기 힘들다.

중앙모스크.. 저녁이 되면 많은 사람이 산책하러 나온다.

일본인 저널리스트 마기.. 페르시아어가 능통하고 아프간에서 만난 유일한 일본인이다.

 마자리샤리프 터미널.. 아침 일찍 쿤드즈로 떠나는 차들이 있다.

같은차에 타게된 할아버지와 함께

쿤드즈로 향하는 길.. 역시 끝없는 사막길이다.

도중 휴게소.. 음료수를 팔고 있었다.

쿤드즈로 향하는 길.. 전쟁의 상흔을 덜 입어서 그런지 길이 비교적 포장이 잘 되 있었다.

길 주변의 삭막한 산들.. 아프간 전 국토가 황량한 사막이다.

  이곳 도로는 구소련 지역과 아프간을 잇는 젖줄이다.

차주인 할아버지와 함께.. 외국인인 내가 호감이 갔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 줬다.

 나무가 하나도 없는 산.. 이러한 아프간에도 2500만의 인구가 산다.

가끔 마주치는 오아시스.. 풍성한 과일들이 있다.

 쿤드즈.. 최근 외국인 피살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나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키 큰 아프간 청년.. 영어가 유창해서 오랜만에 대화를 했다.

쿤드즈에서 톨러컨로 가는길.. 차들이 거의 없다. 그만큼 왕래가 없는 지역이다.

  당나귀들.. 하얀 당나귀가 인상적이다.

시원스럽게 나오는 맑은물.. 이 지역은 비교적 물이 풍부한 편이다.

마자리샤리프,쿤드즈,톨러컨을 같이 여행한 아저씨

톨러컨에서 오이토늄으로 가는길.. 갈수록 초록빛이 많아진다.

사막지역이 초원지역으로 변했다. 드문드문보이는 검은 점은 방목된 야크떼다.

국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 아프간에서도 전쟁의 상흔이 없는 지역중에 하나

외 딴 마을의 중심부.. 아프간 국기가 꽃혀있다.

나와 영어교과서를 보는 아저씨.. 이곳에서도 영어를 배우는걸 알 수 있다.

언덕에서 바라본 국경.. 건너편은 타지키스탄이다.

국경수비대와 함께.. 이들은 동양인은 처음 보는 눈치이다.

 식사를 함께 했다. 근무중 아이들 데려온 아저씨가 인상적이다.

아침의 국경모습 드디어 떠난다~

국경수비대와.. 처음으로 AK총을 만저봤다.

강건너 타직국경을 배경으로.. 파미르를 넘는 다는 자신감으로 가득찬 얼굴(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