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기 1 (여행은 나의 강의실.. 타슈쿠르간~카슈가르 04.8.11)

8월 11일(수)

 어제까지 타지키스탄에서 고생한 탓인지 깊게 잠이 들었었다.

 이곳 타슈쿠르간은 중국이기는 하지만 중국에서도 그야말로 극 서쪽에 있는 이국 도시이다.

 남들은 평생 한번 올까말까 한 이 도시를 난 2년 사이에 3번 방문한다.

 첫 번째는 2002년 여름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던 실크로드 여행 중 파키스탄 국경을 넘으려 이곳에 왔었다. 결과는 대실패.. 파키스탄이 무비자인줄 알았던 난 비자가 없어서 이곳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당시에는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티벳을 처음 접하게 되어 티벳에 푹 빠지게 되는 기이한 인연으로 다가왔다.

 두 번째는 2003년 여름.. 서부 티벳을 넘어 이곳 루트를 통해 파키스탄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보니까 매년 여름 이 도시를 오네..

 교통빈관에서 50달러를 환전하고 카슈가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많은 외국인이 있었지만 한국 사람은 한명도 없고 단체 관광객인 듯한 일본인들이 많이 탔다.

 일본인들은 버스가 설산 고봉들을 지나칠 때마다 ‘스고이(대단해)’라고 연신 감탄을 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이곳이 세 번째인 난 이제 경치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그저 카슈가르에 도착하기를 바랄뿐이다.

 내 주변에 온통 일본 아줌마 아저씨들이라서 그런지 더욱더 한국인이 그립다. 이럴 때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는 여행자가 있었으면..

 하이웨이의 분지 지역을 벗어나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아.. 재작년 저곳에 갑작스런 폭우가 일어나 죽을 뻔했었지..’ 갑작스런 폭우로 히치한 트럭 바로 앞뒤에서 산사태가 일어 났었다. 불과 몇 미터 차이였기 때문에 짓꿎은 운명이 날 맞이했다면 난 저 아래 절벽으로 추락을 했으리..

 한창 감상에 젖었을 때 한 일본인 아줌마가 나에게 일본어로 말은 건다. 내가 일본인인줄 알았나보다.

 ‘와따시와 깐국꾸 데스(전 한국인이에요)’ 웃으며 이야기를 하니 주변의 일본인들이 나한테 관심을 가진다.

 특히 일본인 아줌마들이 나한테 많은 것을 물어봤는데 역시 첫 마디가 욘사마(배용준)과 겨울쏘나타(겨울연가) 이야기이다. 그 외에도 한국의 유명 연예인 이야기와 한국 음식에 대해서 나한테 많이 물어보았다.

 확실히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관심은 2년 전과 비교하면 급상승 되었다.

 월드컵의 영향도 있겠지만 한류열풍의 영향이 더욱 큰 듯하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여행자가 일본인을 만나면 열등감을 느낀다고 했지만 지금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어 한다.

 특히 일본인들은 한국 음식에 열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일본인 아줌마가 펜과 수첩을 준비하면서 나한테 한국의 유명한 음식을 물어본다. 작년에 부산에 온 뒤로 한국음식에 반했다나...

 회덮밥, 전주비빔밥, 포천 이동갈비, 춘천닭갈비, 언양불고기, 강릉회냉면등 알고 있는 각 지역의 먹거리를 소개해줬다. 아줌마는 내가 발음 하는 대로 수첩에 열심히 적었다.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가던 버스가 평지인 사막지역에 다다랐다. 오후 4시쯤 되자 버스는 카슈가르 한 복판에 멈췄다.

 그런데 버스기사가 버스위에 올려놓은 내 짐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다. 바로 옆의 서양애도 버스위에 자전거와 짐을 나둬서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알아서 찾아가라는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버스천장으로 뛰어 들어서 내 짐과 자전거 여행자 짐을 내려줬다.(머 이런 짓 한두번 하는 것도 아니구..)

 자전거 여행자가 매우 고마워한다. 이렇게 여행중에도 선행을 베풀 수 있다니.. 흐뭇했다.

 그걸 인연으로 해서 저녁때 술한잔 하기로 했는데 오늘 묵었던 치니와커호텔이 비싸다고 해서 먼저 떠났다. 짧지만 재미있는 인연이었다.

 버스에서 내린곳에서 치니와커 호텔로 향했다. 카슈가르는 여전히 활기에 넘쳤다. 한국에서는 멀고 먼 서역 이국의 도시.. 남들은 한번 오기도 힘든 이곳도 벌써 3번째이다.

 치니와커 호텔에서 도미토리를 잡았다. 낯익은 별관으로 가서 내게 주어진 도미토리에 갔다.

 방 앞에 서는 순간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219호..

 작년에 서부 티벳을 겨우 빠져나와 새벽에 이곳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던 바로 그 방이다. 또한 서부 티벳을 같이 여행했던 아름다운 일본 여인 유카와의 추억이 묻어난 그 방이다.  

 ‘유카는 어떻게 지낼까?’ 올 4월에 한국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아쉽게도 연락이 끊어졌다. 여행자들끼리는 다시 만나기 힘들지만 열악한 서부 티벳에서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열었던 유카이기에 더욱더 생각이 났다.

 그 당시 유카는 라싸로 들어오는 길에 낯선 중국인 청년으로부터 아픈 추억을 경험했기에 상처가 컸다. 난 한국 남자의 명예를 걸고 그런 유카의 상처를 보둠어 주고 싶었다. 왜 그런게 있지 않은가? 힘들어 하는 여인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그런 남자의 마음을..

 우리 둘 사이에는 국경의 벽은 이미 무너졌었다. 나 역시 설사병에 걸리고 워낙 열악한 여행지라 많이 아팠지만 유카가 있기에 즐거웠던 추억이 더 많은 여행이 되었다.

 거의 1년만에 다시 이곳으로 오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유카에게 순수한 사랑을 했던거였나? 유카 역시 나에게 그런 마음을 느꼈겠지? 속을 드러내지 않은 일본인이면서도 모든것을 나한테 이야기 했으니..

 카스시내를 둘러볼 겸 호텔 밖으로 나오고 있는데 바로 맞은편에서 한 노인이 나를 유심히 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차림새와 얼굴이 한국인 같은데..

 ‘혹시 한국인 인가요?’

 그 노인은 반갑게 먼저 묻는다. 그분은 나이는 50이고 중국에 유학중인 권선생님이다. 중국을 주로 자전거로 여행을 하셨고 지금도 북경에서 출발한지 3개월이 되어서 카슈가르에 막 도착하셨다. 그 머나먼 길 또한 사막을 자전거로 건너다니.. 아프간 타지키스탄을 건너와서 우쭐 했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세상에 대단한 여행자들이 많구나..’

 그 분과 같이 저녁을 먹고 술한잔 하기로 했다.

 오후 8시.. 북경보다 시차가 2시간이 느려서 그런지 아직도 한 낮이었다. 바자르로 가서 저녁식사는 생략하고 곧바로 케밥(양꼬치)에 맥주를 걸쳤다.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역시 여행자라 통했다. 모든 이야기가 잘 통하다고나 할까.. 특히 우리나라의 위상과 발전에 대해서는 견해가 완전히 일치했다. 사실 국내에 있으면 우리 경제와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보지만 나와서 보면 좋은점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중국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50살이면 다들 도전을 하기에는 힘든 나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마음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도전하고 젊은이들보다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도 좋은 공부를 하게 되는군...  

 밤늦게까지 그렇게 술을 마셨다.

 권선생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자전거 여행은 해가 뜬 다음에 출발하면 더위 때문에 안 된다며 새벽 5시에 예청을 향해 출발하신다고 한다.

 술 취한 상태에서 나 같으면 하루 쉴 텐데.. 역시 노익장은 존경스럽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만큼은 지루한 여행이 될 줄 알았는데 역시 많은 공부를 하게 된다. 여행을 하면서 하루도 쓸데없이 소비되는 날이 없는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여행지는 강의실이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선생님이다.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바로 나의 인생 공부이다.

 이래서 여행은 하면 할수록 더 빠져드는가 보다. 왜냐하면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기에..

  카라코람 하이웨이에서 본 설산..

  아름다운 모래산

  험하디 험한 카라코람 하이웨이.. 이길도 3번째이다.

  평지에 이르자 위구르 마을이 나온다.

 

중국 여행기 2 (새로운 이들과의 만남.. 카슈가르 04.8.13)

 8월 12일(목)

 그동안 아프간 타지키스탄을 넘으면서 피곤이 쌓여 있었기에 오늘은 하루 쉬기로 했다. 사실 그 핑계보다는 카스가 3번째이기에 따로 볼 것도 없었다.

 일어나서 혹시나 싶어서 권선생님 방에 갔다. 역시나.. 이미 출발하고 안 계셨다. 지금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막을 자전거로 달리고 계시겠지..

 어제 권선생님과 술을 마시고 나서 도미토리에 들어오니 미국인 친구가 하나 있었다. 이름이 닉이고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탐크루즈 스타일의 잘 생긴 친구이다.

 닉은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 전공도 그쪽으로 정했고 중국에 유학을 한 경험도 있는 열혈 청년이다.

 난 중국을 여행하면 서양여행자들에게 먼저 말을 안 거는 편이다. 서양여행자들이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중국인들이 접근해서 말을 걸었겠고 자칫하면 동양인이 말 거는 것 자체를 귀찮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더 나아가면 말을 걸면 건성으로 듣거나 거만하게 대답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별로 말을 안 건다.

 닉은 친절하게 처음 나에게 말을 거는 순간 마음에 들었다. 태도가 겸손했고 무엇보다 나를 배려해서 쉬운 영어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닉에게 아프간, 타지키스탄을 거쳐서 이곳에 왔다고 하니까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닉이 많이 궁굼해 하기에 그동안의 무용담을 풀어 놓았다.

 닉에게 우루무치로 가는 기차표를 쉽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카슈가르에 관한 것을 알려주었다.

 그동안 밀린 여행기를 정리하기 위해 그동안 카슈가르에 오면 이용했던 왕빠(피시방)에 갔다.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그런지 문을 열지 않는 것이다. 많은 왕빠가 문을 닫았고 열린곳도 외국인이라고 안 받거나 비싼 카드를 사라고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작년에 손쉽게 인터넷을 하던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갔다. 오늘 저녁때 닉에게 들은 소식에 의하면 얼마전에 이곳 신장지역(중국의 서역지역)에서 위구르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대규모 소요를 일으켰다고 한다. 때문에 중국 정부는 이곳의 인터넷을 규제하는 강제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소수민족의 독립에 매우 민감한 중국 정부로서는 당연한 일이리.. 이곳 신장지역은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정작 혜택을 누려야 할 위구르인들 보다는 상해의 투자가들이 그 이익을 다 가져가는 형편이다. 이곳도 언젠가는 독립을 해야 하는데..

 피시방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카슈가르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곳에 유일한 패스트푸드점인 ‘BEST FOOD'라는 곳에서 오랜만에 햄버거를 먹고 백화점에 가서 먹거리를 사왔다. 아쉽게도 신라면은 볼 수 없었다.

 카슈가르는 작년보다 더 커진 것 같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며 활기에 넘친다. 무엇보다도 이곳저곳에 핸드폰 매장이 있고 행인들의 손마다 핸드폰이 쥐어져 있다. 단연 이곳에서도 가장 비싸고 인기 있는 핸드폰은 삼성 핸드폰이다.

 치니와커 호텔에서 시내 중심으로 가다보면 ‘중국공상은행’이 있다. 그 은행 옆에 여행사가 있는데 거기서 기차표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침대표는 완전히 매진되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좌석표를 샀다.

 오는 길에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려고 VCD를 샀다. 제목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오랜만에 한국 영화를 보려고 하는 나의 기대는 VCD를 켜는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이 영화는 중국과 한국에 동시 개봉을 했기에 중국어 더빙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머라고 알아들어야지 영화를 보던지 하지.. VCD를 영화를 틀어준 식당에 그냥 던져주고 왔다.

 호텔에 돌아오니 도미토리에 일본인 여자가 한명 더 들어와 있었다. 혼자 여행을 하는듯한 그녀는 나에게 피씨방이 어디 있는지 물어본다. 이상하게 이번 여행에서는 나에게 피씨방을 물어보는 여행자들이 많다.

 룸메가 된 닉은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본다. 여행과 한국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했다. 이렇게 몇 시간 동안 영어회화를 공짜로 공부하다니..

 닉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영어로 대화를 하는 배려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몇시간 동안을 대화를 해도 크게 힘들거나 그러지 않았다.

 나 역시 미국인인 닉에게 민감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여행하면서 만난 미국인들은 현재의 미국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많다. 때문에 정치적인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밤이 되자 나에게 피씨방을 물어보았던 일본인 여자가 들어왔다. 난 가끔 일본인들을 좋아한다. 왜냐?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다. 여행 책자가 잘 발달되어 있는 일본에서는 특별히 외국인과 대화를 하지 않아도 가이드북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여인이 나의 직업을 묻기에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녀는 놀라면서 자신도 초등교사라고 했다.

 와.. 이렇게 같은 직업의 여행자를 만나게 되다니.. 그녀는 방학을 이용해서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그녀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초등학교를 비교해 볼 수 있었다.

 교실 환경은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인터넷을 이용한 수업이 미흡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초등교육에서 자랑스러운점 중에 하나는 산간/섬 할것 없이 모든 학교에 인터넷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수업이 인터넷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일본도 그러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흡한것 같다. 역시 대한민국은 인터넷 강국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비슷하다. 기회가 있으면 일본의 초등학교를 방문해보고 싶다.. 다음에 일본을 방문하면 무대포로 초등학교에 찾아가봐야지^^

 

  새롭게 단장한 카슈가르 중심의 모스크.. 작년에는 공사를 하느라 바닥을 드러냈었다.

 

중국 여행기 3 (반가운 선교팀들.. 카슈가르~우루무치 기차 04.8.13)

8월 13일(금)

 얼마 안되는 휴식을 끝내고 우루무치로 출발하는 날이다. 마침 룸메인 닉도 나와 같은 기차를 타게 되었다.

 닉은 나와 함께 아침을 먹고 여행준비를 한 후 기차시간이 다 되어서 카슈가르 기차역으로 갔다. 이 쾌활한 미국인은 함께 다니면서 계속 나와 이야기를 하려고 했고 이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있으면 일일이 통역을 해주었다. 처음 닉을 만났을 때는 내가 통역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완전히 반대가 되다니..

 카슈가르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기차는 하루에 2편이 있으며 시간은 딱 하루정도 걸린다. 2년 전 처음 우루무치발 카슈가르행 열차를 탔을 때는 타클라마칸 사막에 이런 철도를 내었다는 것 그 자체가 정말 대단해 보였지만 기차가 통과한 이후로 더욱 많은 한족들이 유입이 되고 반면 위구르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일제시대 때 일제가 철도를 놓았던 이유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중국은 현재 꺼얼무에서 라싸가지 철도를 놓고 있다. 중국 정부는 티벳인을 위한 철도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하고 있지만 그 말은 일제가 경부선을 놓으면서 우리에게 선전했던 말과 일치하는 것을 티벳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기차역에 가니 20명 정도의 여행자들이 모여 있었다. 한눈에 보기엔 한국인들 같은데..

 역시 말을 걸어보니 한국 단기선교팀이다. 단기선교는 짧은 시간에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팀이다.

 그토록 찾았던 한국사람을 드디어 만나게 되다니... 오랜만에 한국어를 쓰게 되서 정말 좋았다. 그 팀들에게 닉을 소개해주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닉에게 말을 건다.

 아무래도 팀으로 다니다보니까 외국인들과 이야기 할 기회가 없었겠지..

 한 팀만 있을 줄 알았는데 같은 기차칸에 선교팀 2팀이 타고 있었다. 방학 시즌이다 보니 각 교회에서 많은 선교팀을 보내나보다.

 오랜만에 김치와 라면도 얻어먹고 여행 무용담을 풀어놓았다. 그들은 믿기지 않은 듯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원래 내가 좀 수다스러운 면도 있음^^)

 그렇지만 나의 인기보다도 미국인인 닉에게 더 관심이 많다.

 수줍은 듯한 미소로 망설이다 어렵사리 영어로 닉에게 물어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닉이 곧 잘 대답해 주면 용기를 얻은 듯 닉에게 떨어지지 않고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여학생을 흐뭇한 미소로 보았다.

 '저 학생도 큰 경험을 했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기분이겠지?'

 처음으로 외국인과 대화를 한다는 짜릿함.. 이제는 난 느끼기 힘든 기분이겠지.

 그런데 한쪽에서 기타 소리가 울리며 찬송가가 울려퍼진다. 선교팀 모두가 반주에 맞춰서 찬송가를 부른다.

 척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닿지 않은 사막의 땅.. 이곳에서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찬송가.. 주변의 위구르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눈을 껌벅거리며 쳐다보기만 하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어서 바치는 찬송가..

 그렇지만 그 기차간에서 깜짝 놀라는 유일한 사람이 있으니.. 그건 바로 나다..

 낭만적일 수도 있지만 아주 위험한 행동이다. 만약에 이곳에 우리말을 알아듣는 공안이 있었다면 모두들 경찰서에 끌려가고 강제 추방을 당할 위험을 그들은 당당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외교적 마찰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꼬투리 삼아 어렵사리 이곳에 기반을 닦은 선교사님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질 것이다.

 중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외국인이 선교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금지를 하고 있다. 중국은 엄연한 공산 국가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선교사들이 중국의 민초들과 함께 하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고 있다.

 더구나 카슈가르에서 확인했듯이 지금 시기는 위구르 민족의 독립 요구에 중국정부가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시기가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지만..

 '저들은 불쌍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교를 해야만 해.'라는 동정심을 갖고 하는 선교는 오만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우리가 물질적으로 풍요하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타지키스탄에 있을 때 선교사님들의 생활을 옆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타직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호흡하면서 자연스럽게 선교사님들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봉사로서 그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이슬람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가족을 비롯한 이슬람 사회를 떠나라는 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짜피 떠날 사람인 우리야 가면 되지만 남겨진 그들에게 무책임한 말은 안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단기선교팀이 왔다가 헤랏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곳의 외국인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교문제라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썼다. 더 이상의 나의 생각을 적지 않도록 하겠다.

 생각만 많은 여행자인 난 이런 걱정을 하며 기차안에서 하루를 마감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우리말로 노래를 들으니 편안하기는 했다.

 진정한 친구가 된 잘생긴 닉(오른쪽), 처음 만날때부터 호형호제하게 된 준(오른쪽)

  기차안에서 위구르인들과 카드를 하고 있다.(이들에게 원카드 게임을 보급했음 ^^)

 

중국 여행기 4 (강행군.. 우루무치~난주~서안~정주 04.8.14~16)

8월 14일(토)

 침대표를 구하지 못해 좌석에 탄 채 밤을 지새웠는데 억지로 잠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장기간 여행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괴로움의 연속이지만 시간이 지나 가다보면 어느새 멍해지기 마련이다.

 오후가 되자 기차는 우루무치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경황이 없는 와중에 닉이랑 헤어졌다. '어? 어디로 간거지?'

 역에서 찾아보아도 닉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여행지에서의 만남은 당연한거라 하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였는데... 언젠간 인연이 닿으면 또 보겠지

 아쉬움을 달래며 우루무치역을 나오니 뜻밖의 손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학교 후배 재용이였다. 이번에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만났다. 며칠 같이 여행을 다니다가 페샤워르에서 난 아프가니스탄으로 재용이는 산악 도시인 치트랄로 서로의 길을 따라 헤어졌었다.

 참.. 무슨 여행이 롤플레잉 게임인가? 동료와 헤어지니 새로운 동료와 만나네.

 재용이는 2달 전 터키 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실크로드를 건넜다. 이란-파키스탄을 거쳤고 카라코람하이웨를 넘어 나보다 10일 앞서 중국으로 왔다.

 카슈가르∼우루무치∼돈황에 있다가 돈황에서 한국인 여행자들을 만나서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다시 우루무치로 향했고 거기서 마침 내가 우루무치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마중 나온 것이다.
반가움에 서로 부둥켜안고 그 동안의 밀린 이야기를 했다. 나하고 재용이로서는 강행군이지만 곧바로 난주로 가기로 했다.

 기차표를 끊었는데 침대표가 없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이번에도 잉쭈어(좌석)를 탈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이번 여행에는 침대표 구하기가 부쩍 힘들어졌다.

 기차시간까지 4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서 신라면을 사기 위해 우루무치 시내를 돌아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백화점을 돌아다녀도 신라면을 구할 수 없었다. 대신 규모가 커진 우루무치를 볼 수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이런 대도시가 생길 수 있다니.. 현재 중국 정부는 서부 대 개발을 시행하고 있고 막대한 자본이 이곳 신장지역으로 몰려들고 있다. 신장의 성도인 우루무치가 커지는건 당연지사..

 우루무치에 한족 자본이 몰리는건 반대로 위구르인의 문화의 터전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 이미 우루무치는 한족 도시가 되었고 갈곳 없는 위구르문화는 그나마 개발이 덜 된 신장남로에서 찾을 수 있다.

 우루무치에서 기차가 출발했다. 잉쭈어(좌석) 여행을 지친 나와 재용이는 기차 안에서라도 침대표를 사려고 했으나 남은 표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휴.. 이럴 때가 없었는데.. 할 수 없이 잉쭈어로 여행을 했다.

 어제 2시쯤 기차를 타서 딱 4시간만 쉬고 또 기차여행시작을 시작했다. 오늘밤은 재용이와 이야기를 하며 딱딱한 의자에 몸을 의지한채 잠이 들었다.

8월 15일(일)

 오늘은 광복절이다. 최근 나의 3년 동안의 광복절을 살펴보면.. 2002년 광복절에는 동티벳에서 헤메고 있었고, 작년 광복절에는 일본여인과 서부티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올해는 재용이와 실크로드에 있네..

 하지만 타국에서의 광복절은 더욱더 가슴에 와 닿는 법.. 우리나라가 자주적으로 독립하고 이렇게 내가 여행을 할 수 있게끔 성장해준 조국에 대해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광복절을 맞이했다.

 기쁜 마음이기는 한데.. 지금의 나의 현실은 너무 괴롭다. 계속되는 기차여행 그것도 잉쭈어 여행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기 때문이다.

 한가지 기차여행의 낙이 있다면 바로 기차가 정차할 때이다. 정차를 하면 플래폼에서 기다렸던 상인들이 와서 먹을 것을 파는데 그것을 군것질하는 재미도 솔솔하기 때문이다.

 특히 각 지역마다 다른 맥주를 마실 때는 더 그랬다. 중국 기차역 사이의 거리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매우 길다. 때문에 역마다 파는 맥주의 상표가 다 다르다. 역에 정차 할 때마다 그 지역의 맥주를 마시고 또 다른 역의 맥주 맛을 기대하며 간다.

 오늘은 하루종일 기차에서 지냈다. 글로는 이렇게 짧게 쓰지만 사실 무지 괴롭다는 것은 직접 타보기 전에는 실감하기 괴로울 것이다.

 8월 16일(월)

 지루하게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우리 앞자리에 앉은 한족들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그들이 우리를 보며 이야기하는 꼴을 봐서는 한국 욕을 하는게 분명했다. 우리를 원숭이 보듯이 말하며 가끔 비웃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의 비장의 무기.. 노트북을 배낭에서 꺼내 영화를 보는 척 하면서 과시를 했다. 효과는 만점.. 우리를 향해 욕을 하던 청년들은 슬그머니 다른 자리로 옮겼다. 아마 가난한 여행자로 우리를 비웃었나보다. 만약 노트북이 안 통하면 1000달러가 넘는 돈을 일부러 꺼내서 세려고 했다.(사실 이런 짓은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필수 금기사항이다.)

 기차는 새벽 3시가 되어서 난주에 도착했다. 이로서 난주도 3번째로 방문하는군..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가장 먼저 할 일은 숙소를 잡는 것.. 작년까지 20위엔으로 저렴 했던 호텔을 가니 방이 다 나가고 150위안하는 방이 제일 싸다고 하며 자려면 자고 갈테면 가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이런 건방진 태도는 용납을 못하지.. 다른 호텔을 알아봤지만 다 비싼방 밖에 없었다.

 휴.. 어떻하지? 원래 계획은 난주에서 휴식을 취하며 여행일정을 짜는 것이다. 2가지 여행계획을 세웠었는데 첫째는 난주에서 성도로 가서 쿤밍으로 향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난주에서 시안으로 향한 후 청도나 북경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을 못 구하니..

 다시 난주역으로 갔다. 거기서 제일 먼저 도착하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매표소에 가니 성도행은 아침 8시이구 시안행은 9시가 처음이다.

 어떻게 된 거지? 꼼짝없이 역에서 잠을 자야 하나? 알고 보니 이곳 매표소에서는 난주에서 출발하는 표만 팔고 있었던 것이다.

 개찰구에 가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우린 친절한 역무원의 도움을 받아 시안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기차를 타자마자 우린 침대표를 구하려고 했으나 역시 구할 수 없었다. 아.. 괴롭다.. 또 잉쭈어라니.. 더구나 시설이 우리나라에서는 없어진 비둘기호와 비슷한 쾌객열차이다.

 '형.. 여기 한국 책이 있는데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재용이가 선반 위에 올려진 '세계를 간다 중국편'을 발견했다.

 '이런 열차에도 한국인이 있는 거야? 와.. 정말 반갑겠다.'

 주변에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웠지만 다들 한국인은 아니라고 한다.

 '어디로 간 거지?'

 화장실 쪽에서 누군가 한명이 이쪽으로 걸어온다. 순간 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여행동호회에서 만나서 호형호제하게된 한유유형이기 때문이다.

 '말도안되...'

 나와 유유형은 서로의 눈을 의심했다. 유유형은 내가 터키쯤에 있을 줄 알았고 나 역시 유유형이 중국에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출국하기 직전에 유유형한테 전화를 했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말도 안 되!!!

 18억 인구를 가진 중국땅에서 새벽 4시에 그것도 같은 열차.. 또한 15량이 넘는 기차간 중에 한곳에서 우연히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서로 중국에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러한 생각을 하니 정말 식은땀이 흘렀다. 유유형 역시 사람은 사기 치고 다니면 안 된다며 놀라워했다.

 유유형은 설사병이 심하게 걸려서 몸 상태가 많이 악화되고 돈도 얼마 안 남은 상태에서 우리를 만나서 정말 반갑다고 한다. 마치 하늘에서 천사를 만난 것 같다고 한다.

 계속 좌석에서 자니 몸이 너무 괴로웠다. 난 기차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무대포로 잤다. 중국 애들도 하기 힘든 고난이도의 얼굴 철판깔기..^^ 덕분에 조금 편했다.

 기차는 오전 9시가 되어 시안에 도착했다. 이곳에 와서야 왜 현재 침대표를 구하지 못한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중국은 입시철로 전국의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대학에 원서를 접수하고 있다고 한다. 시안역에 내렸을 때 시안의 모든 대학이 나와 홍보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재용이는 카슈가르에서부터 한번도 침대차를 타보지 못했다고 한다. 진기록 아닌 진기록이다.

 재용이는 시안이 처음이라 병마용을 보러 가고 나와 유유형은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실컷 먹었다.

 오후 2시에 다시 기차를 타고 정주(정저우)로 향했다. 아.. 기차여행.. 너무 지겹다..

 5시간 정도 지나 정저우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행에 지친 우리 일행은 북경으로 향하기로 했고 잉쭈어 보다는 약간 편한 버스를 타기로 했다.

 맥도널드에서 식사를 하고 정주 시내를 둘러본 후 밤 9시 북경행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좌석은 잉쭈어 보다 조금 푹신할 뿐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특히 버스 모니터에는 알 수 없는 중국 코메디가 상영되었는데 볼륨 소리가 커서 그런지 더욱 괴로웠다.

 도대체 며칠째 강행군을 하는지..

 괴로운 잉쭈어 여행의 궁극의 필살기.. 배째고 의자밑에서 자기~

 재용이와 나는 기차가 정차할 때 마다

 

여행의 마무리(04.8.17~24)

 강행군 끝에 북경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며칠간의 휴식을 취한다. 아테네 올림픽을 시청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슬슬 귀국을 준비하던 그 시기에 갑자기 날아온 긴급 메일..

 내가 양양으로 발령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내가 진짜 선생님이 되는구나..

  발령장을 받기 위해 급히 귀국을 해야 했고 이왕이면 한번도 안 가본 승덕과 진황도를 통해 인천으로 귀국을 결심했다.

 승덕은 청나라 황제들이 휴식을 취했던 장소로 생각보다 많은 볼거리가 있다. 인플라만 잘 갖취진다면 좋은 관광지가 될 것이다.

  진황도는 예전에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으로 왔던 곳이라고 한다.

  만리장성의 시작인 산해관을 비롯해서 천하제일돈을 돌아보았다. 이로써 난 만리장성의 끝과 끝을 다 돌아본 셈이다.

 이번 여행은 그 어느때보다 흥미진진했고 많은 추억과 경험을 얻었다. 비록 학생때처럼  장기간 여행을 하지는 못하지만 방학때 마다 틈틈이 여행을 할 것이다.

  이럼 모든 나의 추억들은 이제 아이들에게 가져가야겠다.

 북경의 한 식당에서 먹은 꼬치.. 매콤하고 정말 맛있었다.

  승덕의 황제가 휴식했던 정원.. 이 이후에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더 찍지를 못했다.

진황도 남문.. 성문은 무너진 상태이다.

진황도 내부.. 한때는 늘 긴장이 흐르던 곳이겠지?

  만리장성 제 1돈.. 실크로드의 자위관에도 똑같은 이름의 종루가 있다.

 성벽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 넝쿨이 성벽을 둘러 쌓고 있다.

  청나라 시대때 사용한 총통..

  취사장 모습.. 밥솥이 정말 크다.

  옛 군인들 막사.. 나름대로 좋은 시설이었다.

  공성무기.. 10미터는 넘어 보였다.

  미로처럼 얽힌 성벽.. 왜 만들었을까? 관광용도인가?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 마네킹으로 실감나게 만들었다.

  산해관에서 바라본 바다의 모습.. 성벽과 선박이 묘한 시대적 대조를 이룬다.

  만리장성의 첫째 관문인 산해관은 이미 관광지화 되있다.

  저 멀리 해상 사원이 보인다.

  이곳이야 말로 진정한 만리장성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