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키스탄 여행기 1 (국경 04.7.30)

7월 30일(금)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 5시이다. 보통 국경을 넘으려면 최소 9시는 넘어야 하니 머하고 시간을 떼울지 막막했다.

 국경수비대 군인들은 교대로 총을 들고 근처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달러가 있다는것을 알고 위협을 했을 경우에는 대책이 없었으리라.

 군인들과 같이 아침을 해먹고 출국 스탬프를 받은 시각인 11시이다.

 출국 스탬프를 받을때에도 이곳이 외국인이 거의 지나가지 않아서 그런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제 국경수비대 군인들이 내 수첩을 쭉 훝어 봤다.

수첩에는 쿤드즈에서 톨러컨으로 가는 택시를 갈아 탈 때 한 사내가 적어준 메모가 있었는데 이 지역의 군벌 대장 이름이 적혀있다

 또한 카불에서 자원봉사단체 오피스를 찾을 때 그 집이 마침 이나라 외무장관의 옆집이어서 수첩에는 오피스를 찾기 쉽게 외무장관의 집주소가 적혀 있었다.

 빽아닌 빽들을 이용해서 출국 스탬프를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강 건너편의 타직 국경이다. 타지키스탄 국경은 러시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데 아프간에서 타직으로 건너갈려면 러시아 군인들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기다리는게 지루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곧 있으면 파미르가 아닌가!

 그런데 중국트럭들을 비롯해서 외국인이 지나갈 법도 한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11시~12시면 넘어갈 수 있다는 국경이 1시가 넘어도 지루한 기다림은 계속 되었다.

 친해진 국경수비대와 같이 점심을 먹고 계속 기다렸다. 어제밤 한국 노래 몇곡을 불러준 덕분에 3끼를 대접 받은 셈이다.

 오후 3시..

 드디어 국경이 열렸다. 강 건너편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자 아프간쪽에서 모터보트가 왕래하기 시작했고 조금 기다리다 보니 내 차례가 돌아왔다.

 출발하기 직전 검문원이 10달러를 달라고 한다. 보트 이용비인가? 파미르를 간다는 설레임에 10달러를 가볍게 주고 보트를 탔다.

 그런데 보트에서는 20달러를 달라는 것이다.. 이런.. 외국인이라고 뜯는 것은 어디서나 마찬가지구나.. 일부러 지갑에 적은 단위의 달라면 넣어두어서 돈이 없다며 버텨보기로 했다.

 강을 건너는 시간은 30초도 안되었다. 여기를 건너기 위해 그렇게 오래 기다렸으니..

 보트에서 내리자마자 컨데이너로 된 러시아 국경초소로 들어갔다.

 몸수색을 비롯해서 모든 짐을 까다롭게 검사 받고 국경 통과 등록을 하려는 순간..

 러시아 군인이 비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타직 비자가 잘 못 되었다.

 비자 내용에는 나의 여권번호를 적는 부분이 있는데 카불의 이 멍청한 타직 대사는 여권번호를 적은게 아니라 여권 페이지 번호를 적은 것이다.

 꼼짝 없이 국경에서 억류되었다.

 오후 4시가 되자 국경의 군인들은 철수하게 되고 나도 그들의 초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리저리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답답한것은 러시아 군인들도 마찬가지였으리..

 오죽하면 어디서 가져왔는지 러시아어로 된 영어사전을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려고 했을까..

 어쩔 수 없지.. 어제는 아프간 군인들과 지냈다면 오늘은 러시아 군인들과 지내는 경험을 얻어야겠다. 머 어쨌거나 파미르 하이웨이는 온게 아닌가..

 이리저리 연락을 하던 러시아 군인은 갑자기 내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통과는 된 모양이다.

 어디로 갈 건지 묻는 러시아 군인들에게 파미르 고원의 입구인 쿨러그로 간다고 걸려있는 지도를 통해 알려주었다.

 그런데 쿨러그로 가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길도 없고 가기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조건 타직의 수도인 두산베로 가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파미르 입구인 이곳까지 왔는데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되는 실랑이가 이어졌을때 아프간에서 알아온 이곳 타직 NGO의 전화번호를 적은 수첩이 생각이 났다. 타직에서 NGO분들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도움을 요청 할 수 밖에..

 내 입장을 잘 설명해서 어떻게든 파미르로 넘어가야 하지 않은가..

 NGO 분에게 전화를 하니 반갑게 전화를 받으신다. 그 분을 통해서 러시아 군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내가 넘어온 곳이 파미르 입구가 아니라 두산베 남쪽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퍼밋이 없으면 파미르까지 넘어 가기는 불가능해진것이다.

 퍼밋을 받으려면 2주가 걸리는데 내 비자 기간이 2주이니 사실상 이번 여행에서 파미르는 못가게 된 셈이다.

 사실상 이번 여행에서 파미르는 완전히 물건너가게 된 셈이다.

 아프간인들이 단체로 나에게 거짓말을 했나? 국경을 건너서 이곳 러시아 초소에 끌려올때까지만 해도 파미르를 왔다는 그 사실 하나로도 힘이 났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상실감과 허탈감에 젖어야만 했다.

 파미르 입구 도시 이름은 Khorog이고 지금 내가 넘어온 국경쪽에는 도시 이름이 Kulyab이다.

 발음이 비슷한 두 도시 이름 때문에 난 잘 못 알게 된 지명을 파미르 입구라고 철썩 같이 믿었고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서도 낙관적인 생각으로 덮어두었던 것이다.

 사실 페이자바드를 거치지 않고 국경에 외국인이 없다시피 했을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하는건데..

 한 가지라도 위안점이 있다면 오이토늄에서 국경을 넘은 사람은 거의 내가 처음이라는것 정도..

 허탈하고 또 허탈했다..

 전화를 받으신 NGO관계자분은 두산베로 오면 찾아오라고 고맙게 말씀 하신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러시아 군인들과 같이 식사를 했다. 러시아군인 나름대로는 잘 차려준 것 같지만.. 입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군인 초소에는 몇몇 타직 여인들이 와서 일을 하는데 아프간과 달리 차도르도 안 쓰고 남자들과의 대화도 자유롭게 한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이다.

 하지만.. 난 아무런 신기함을 느낄 수도 없었다. 심리적인 타격을 심하게 받아서 그런지 여행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 했다.

 원래는 초소에서 자려고 했지만 러시아 군인 스스로도 꺼림직 했던지 쿨럽(Kulyab)으로 향하는 유조차를 히치를 해주었다.

 명랑한 타직인들의 성품 답게 호기심을 갖고 대해준다.

 ‘이들에게도 얼마나 뜯겨야 하나..’ 나에게 잘 해주기는 하지만 어제부터 계속 돈을 뜯을려는 사람들만 있어 믿음은 덜 했다.

 유조차는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듯 했다. 중간 중간에 밭에 멈춰 가족들에게 줄 과일들을 밭에서 직접 사기도 했다.

 아프간보다는 몸은 힘들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상심이 컸다. 파미르에 대한 기대와 확신이 일순간에 무너진 탓이리라.

 ‘이제는 이 트럭 운전사들에게 달렸군..’ 그로기 상태인 나에게 이들마저 안좋은 기억들을 안겨준다면 더 이상 여행이 힘들어질것 같았다.

 트럭은 중간 중간에 경찰에 의서 멈췄는데 외국인임을 확인한 경찰이 계속 나에게 돈을 요구한다.

 난 돈이 없다고 한사코 버텼다. ‘니들에게 줄 돈은 한푼도 없단 말야~’

 이야기만 들었었지만 이곳 경찰은 썩을 대로 썩어서 지나가는 차를 멈추게 한뒤 트집을 잡아 돈을 뜯어내기 일 수라고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인 내가 조금 편하자고 뇌물을 건네기는 정말 싫었다.

 배째라는 시늉을 하면서 트럭 운전사 애들에게 내 가방을 꺼내라고 말했다. 그리고 경찰에게 여기서 잘 거라는 시늉을 하니 경찰들은 여권을 돌려주며 순순히 보내준다.

 그렇게 두 번 뇌물을 주지 않고 통과하니 운전사들도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나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대단하다는 표시를 했다.

 오늘 쌓인 스트레스를 풀듯이 돈을 뜯으려는 경찰에게는 단호하게 대처 했다.

 몸수색을 당할때는 기분 나쁠때는 있지만 내가 너무도 당당하게 나와 당황한 경찰 3명이 갑작스레 이구동성으로 환영한다는 몸짓을 했을 때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밤 11시가 되자 콜럽으로 도착했다. 여기서 두샨베까지는 5시간정도 걸린다고 한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트럭운전사는 자신의 집으로 날 데리고 가더니 가족들을 소개해주며 식사를 대접해 준다.

 돈을 요구하기는 커녕 아무런 대가 없이 친근하게 대해주는 운전기사가 정말 고맙다. 이 세상에는 마음 착한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 덕분에 조금은 힘이 났다.

 앞으로 여행일정이 어떻게 될지 막막했다. 일단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산베에는 가야 하고..

 거기서 파미르 가는 길은 막혀 있으니 키르키즈를 육로나 비행기로 가던지..

 아님 그냥 우루무치로 비행기를 타고 날라갈까? 계속 고민이 되었다.

 식사를 하고 운전사 부인이 마련해준 편안한 잠자리에서 홀로 잠이 들며 스스로에게 딱 한마디를 했다.

 ‘오늘은 완전히 실패야.. 그것도 완벽히..’

 아프간 국경에서 친구가된 아프간 병사와 함께.. 식사를 모두 얻어 먹었다.

  아프간 국경초소.. 허름하기 짝이 없다.

  아프간~타직국경을 향하는 바지선.. 이날은 국경을 넘는 이들이 거의 없어 운행하지 않았다.

바로앞에 타직 국경이 보이는데..1

  나를 재워준 타직 트럭 운전사..

트럭운전사 부인들.. 이곳도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다.

 

 타지키스탄 여행기 2 (두산베 04.7.31~8.5)

7월 31일(토)

 어제까지 상실감이 크기는 했지만 다행히 히치를 했던 운전사 집에서 편하게 자다 보니 많이 나아졌다. 아침 햇살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아프간에 있을 때 느꼈던 긴장감이 사라진 상쾌한 아침이다.

 운전사집에는 부인이 2명 있고 아이들이 5명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인들은 손님인 나에게 웃으면서 대해주며 아침을 대접해 주었고 어제 벗어놓은 양말까지 빨래해 주었다. (정말.. 감동..)

 아침을 먹고 운전사는 다시 트럭에 타라고 한다.

 트럭을 타고 쿨럽 시내를 보니 아프간과는 다른 세상이다. 얼굴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여인들.. 나무가 많은 거리.. 쾌적한 시내 환경.. 강하나 사이에 두고 아프간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자유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운전사가 데려다 준 곳은 두산베로 가는 택시가 모여 있는 터미널이다. 운전사는 이곳에서 택시 가격 흥정까지 해주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날 손님으로 대해준 친구..

 심리적으로 힘든 상태에 있을 때 다시 한번 힘을 내게 해준 고마운 친구이다.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고 서로 아쉬워하며 헤어졌다.

 쿨럽에서 두산베까지 버스는 없고 합승택시가 있다. 5시간정도 걸리고 요금은 1인당 15소모니이다. 1달러가 3모니이니까 5달러인 셈이다.

 나를 포함해서 6명이 합승택시에 탔다. 자리가 넉넉해서 두산베까지 아름다운 초원과 시골 풍경들을 감상하면서 쾌적하게 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경찰이다.

 두산베의 교포분들에게 이곳 경찰에 대해 물어보니.. 거의 조폭 수준과 다름 없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돈을 뜯고 마피아와도 연결이 되어 돈을 받고 범죄를 눈 감아 준다.

 택시가 두산베를 향하는 동안 수 많은 검문이 있었다. 검문에 걸리면 택시운전사는 한숨을 푹 쉬며 체념한 듯 주머니에서 푼돈을 챙기고 차문을 연다.

 타지키스탄은 수력 발전으로 생상 된 전기를 인근 나라에 수출할 정도로 물이 풍부한 나라이다. 때문에 두산베로 오는 동안 많은 강과 호수를 볼 수 있었다.

 어제 전화를 한 NGO 오피스에 도착하니 1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혹시 업무중인데 방해가 되는게 아닐까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NGO분들은 들어오라며 반갑게 맞아주신다.

 NGO 자원봉사자인 홍간사님과 축구선교를 하시는 최목사님.. 멀리 타국땅에서 이웃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이다.

 그분들에게 타지키스탄에 대해 많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또 내가 국경을 넘어왔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나보다 2살 많은 홍간사님과 함께 시내로 나갔다.

 아프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전통 옷을 입고 다니는데 얼굴을 가리거나 남자들을 피하지는 않았다.

 타지키스탄은 회교 국가이긴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보장이 된다. 오히려 이곳 정부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정권의 위협으로 보기 때문에 경계를 한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소수민족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던 러시아는 14개 나라를 독립시킨다.

 아무런 정치적 준비가 되지 않은 채 갑작스레 독립한 나라들은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되고 내전이 일어나거나 이웃 나라와의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타지키스탄은 현 정권과 이슬람 근본주의와의 내전이 일어났다.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전쟁은 6년이나 지속 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고 무엇보다 국가 구성원간에 지워지지 않을 불신감이 생겼다.

 현재 타지키스탄 사회가 안정되기는 했지만 지금 대통령이 임기를 2번 연임했고 종신 체제를 준비하는 듯 하다.

 마치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내전이 일어나고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향해 계속해서 연임하던 시절과 흡사하다.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으며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얼마나 많은 민중을 희생시키는지는 우리가 직접 겪어서 알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홍간사님과 식사를 하며 타지키스탄에 사회 상황에 대해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사회 어디서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정부의 정책도 답답하리만치 보수적이고 딱딱하다.

 홍간사님과 인터넷을 하고 타직에서 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 댁으로 갔다. 선교사님은 현재 한국으로 출장을 가셨고 사모님이 계셨다. 처음 들렸던 NGO 사무실에서 전화를 드렸더니, 여행자를 돕는것을 좋아한다고 하시면서 꼭 한번 집으로 들르라고 해서 들렀다.

 선교사님댁에 마침 1년에 한번 있는 교민 어린이 캠프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타지키스탄의 한국 가정은 20가정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모두들 가족처럼 지내는데 이렇게 성경 학교를 열어 아이들이 한국문화를 알 수 있게 하고 어른들 또한 아이들을 위한 캠프를 함께 준비함으로서 우의를 돈독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홍간사님이 어머님들에게 나의 소개를 해주시면서 내가 초등교사라고 밝히니까 어머님들이 무척 반가워 하신다. 마침 다음 순서인 레크레이션을 진행할 차례였는데 진행해줄 사회자가 없어 애를 태우고 계셨다고 한다.

 즉석에서 레크레이션을 하기로 결정했다. 레크레이션은 학교에 있을 때 몇 번 해봐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부모님을 따라 먼 이국땅까지 온 아이들.. 고국이 그립기도 하겠지만 타직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고 특히 한국의 나쁜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때묻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과 어울리며 레크레이션을 한 후 저녁을 먹었다. 저녁 메뉴는 불고기..(아~ 감격) 마침 일을 마친 몇몇 선교사분들이 오셔서 타직에 대해 많이 물어 볼 수 있었다.

 특히 파미르 퍼밋에 대해 여쭈어봤는데 한 젊은 선교사님이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다.

 저녁때 캠프파이어까지 마치자 9시가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모처럼만에 타국땅에서 나의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고 아이들 역시 남자 선생님이 오셔서 무척 좋아하는 표정이다.

 아이들과 어머님들은 이 집에서 자고 난 아이들을 캠프에 보내 집에 홀로 남게 된 최목사님댁에서 하루를 지내기로 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은 내가 국경을 넘는 과정을 들으시면 모두들 놀라워 하신다. 아프간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그렇고 홀로 여기까지 배낭여행을 왔다는 사실에도 놀라워 하신다.

 교민분들은 타지키스탄에 NGO나 단기 선교팀은 자주 와도 배낭여행을 오는 한국인 여행자는 처음 본다고 하신다.

 타지키스탄은 비자 받는것 부터가 무척이나 까다롭다. 초청장을 받는데만 2~3주가 걸리고 비자를 받는데도 1주 이상이 걸린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는 대사관이 없고 주변의 중앙아시아 국가 역시 비자 받기도 힘들고, 또 나온다고 해도 비자 기간이 짧기 때문에 타직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있다면 서양 몇몇 여행자들이 파미르 하이웨이를 목적으로 온 경우는 있다고 한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타직 여행이 이렇게 힘겹게 될 줄이야..

 이왕 이렇게 들어온 김에 파미르 여행을 했으면..

 오랜만에 최목사님 댁에서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먼 이국땅이지만 이렇게 한국인들과 함께 있으니 마음은 편하다. 또한 여행을 하면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곳 두산베에 오기를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제 여행기 마지막 부분에 머라 그랬더라?^^

 

8월 1일(일)

 아침에 일어나니 최목사님이 아침을 챙겨 주셨다.

 아침은 라면 스프국에 김치정도.. 한국에서 이 글을 읽으면 우습게 보이겠지만 이곳에서 한국 라면을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감이다.

 어제 캠프가 열리는 선교사님댁으로 갔다. 어제 이벤트들을 통해서 아이들과 친해진 나는 어머님들의 부탁으로 오전에는 민속 놀이마당을 진행했다.

 타국에 살지만 우리 놀이의 재미를 아이들에게 알려주자는 취지였는데 내가 어렸을 때 했던 사방놀이, 땅따먹기, 공기놀이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한다.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어제에 이어 또 한번 레크레이션을 진행했다. 2시간 반 동안 이지만 어머님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게임을 하다보니 아이들이 너무나 승부욕이 강했다. 조금이라도 지면 우는 아이들이 있고.. 게임의 차원을 넘어서 감정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도 있다.

 이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같은반 타직, 러시아 애들에게 놀림을 받고 따돌림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때문에 무엇이든지 이겨야 한다는 심리가 이곳 아이들에게는 심어져 있다.

 교민분들을 통해 들은 타직의 상황은 그야말로 암울하다. 아프간과 같이 종족과 지역간의 갈등이 무척 심한 편이고, 공무원은 뇌물을 챙기기에 바쁘다.

 교사들의 경우에도 한달 월급이 50달러도 안되므로 방과 후에는 택시운전이나 노점상등 다른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교사들이 많다.

 타직애서 자원이 될 만한 듯한 수자원, 수력, 관광, 천연가스등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관광과 같은 경우는 아름다운 파미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에게는 거의 막다시피 했다.

 독재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곳 타직은 성장의 기쁨보다는 무사안일, 나만 잘살면 된다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 거의 모든 독재국가에서 나타나는 폐해를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른 독재에 비해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그건 지도자가 개인의 부를 축척하기 위한 독재가 아니라 나라를 발전하는데 독재의 힘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처음 대학에 들어와서 현실 정치에 눈을 떴을때는 독재란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들이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정치적 의식이나 시대 상황이 독재가 들어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어떠한 선택이 우리에게 더 좋았을까.. 라는 생각은 역사의 가정이 없다 해도 한번쯤 생각해 볼만 하다.

 4.19 이후에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면 혼란기를 맞이했기는 해도 통일을 좀 더 앞당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근데 과연 그 시대에 민주정부가 가능했을까?

 북한이라는 특수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나라를 미국이나 서방은 성숙되지 않은 민주 체제 보다는 독재가 출현하더라도 철저한 반공 국가를 지향하는 정부를 원했을 것이다.

 음.. 생각이 이상하게 빗나갔다.

 정리해보면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어지러울 때 민중은 한 영웅이 나타나서 그러한 고민들을 다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

 그러한 민중의 고민을 해결해줄 한 영웅이 나타나게 되고 민중은 열광을 하며 영웅에게 모든 권력을 쥐어주게 된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영웅은 이미 잡은 권력과 언론을 이용해 그러한 모양새를 만든다.

 그러한 선택은 도박이기는 하지만 사회를 아주 발전시킬 수도.. 사회를 정체시키고 도탄에 빠트릴수도 있다. 문제는 전자가 후자보다 적다는 것이다.

 전자인 경우는 2차대전 후 프랑스의 영웅 드골, 싱가폴의 경쟁력을 세계 톱 순위로 끌어 올린 고촉통 총리, 투르크를 멸망을 막고 터키로 재탄생시킨 케말 파샤,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동시에 이룬 호치민..

 우리나라는 이승만, 박정희, 신군부.. 과연 독재라는 도박에 성공한것일까? 실패한것일까? 아님 답보 상태일까? 이 모든건 50년 정도 후의 역사학자들이 판단해 줄 것이다.

 오후 4시가 되어서 모든 프로그램이 끝났다. 아이들도 부모님들도 얼떨결에 행사진행을 하게된 나도 피곤했지만 모두에게 웃음 꽃이 떠나지 않은 보람찬 시간이었다.

 기쁜 소식은 어제 파미르 비자를 알아봐주시겠다는 젊은 선교사님이 3일만에 발급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하신다.

 70달러로 비싸기는 하지만 파미르를 간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한다.

 그 선교사님과 같이 한 아파트에 찾아갔다. 아파트 겸 여행사였는데 비싸기는 해도 70달러에 파미르비자를 25달러에 거주등록을 맡겼다.

 거주등록은 일명 오비르라고 불리며 러시아권의 대부분 국가에서 여행자는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오비르는 외무성 기관에 주소를 적고 등록을 하는데 현지 교민이나 여행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캠프가 열렸던 선교사님 댁에서 다른 한국인 여행자와 함께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사모님은 선교사님이 한국으로 가시게 되어 집안에 남자가 없어 무척이나 걱정 하셨는데 한국 젊은이 2명이 같이 지내니까 무척 든든해 하신다.

 어떤 여행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타직에서의 삼일째 밤이 지나고 있었다.

 8월 2일(월)

 파미르로 출발하는 금요일까지 이곳 선교사님 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집에는 사모님과 9살인 은진, 6살인 은영, 4살인 은지와 나 그리고 다른 한국인 여행자 1명이 있다.

 낯선 여행자인 나를 사모님은 너무나도 따뜻하게 맞아 주신다. 꼬박꼬박 밥을 챙겨 주셔서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더 잘 먹는다. 아이들도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 가정은 내년에 한국에 1년 정도 살게 되는데 은진이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게 설레이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모양이다. 나에게 한국 초등 학교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점심을 먹고 시내에 있는 인터넷 까페에 갔다.

 파키스탄과 아프간에 깔리다시피 했던 일본 차들은 이곳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20년 정도 된 러시아 차량과 간혹가다 보이는 한국차량이 보인다.

 이곳 경제 사정과는 맞지 않게 간간히 벤츠와 같은 비싼차들이 보이는데 아프간과 마찬가지로 이곳 마피아가 마약을 유통시켜서 받는 대금을 돈으로 받는게 아니라 비싼차로 받는다. 때문에 여기는 유난히 고급승용차들이 많다.

 건물 역시 러시아식 건물이다. 새로 지은 건물은 거의 없는듯하고 공사가 진행되다 돈이 없어 몇 십년째 방치된 건물들이 많다.

 교민들의 아파트에도 방문을 했지만 역시 몇 십년된 아파트에서 살고 계신다. 이곳 물이 정수되지 않고 또한 수도관도 노후되서 두산베의 모든 수돗물은 흙물이다.

 아프간과 파키스탄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벼룩이 많다. 나 역시 벼룩에 많이 물렸는데 모기가 문 것보다 많이 가렵다. 그러나 빈대에 물리면 그야말로 피가 나올때까지 간질러도 간지러운데.. 아직 빈대에는 안 물려 봤다.

 이곳 교민들에게 듣는 소식과 메일을 보면 현재 아프간 상황이 최악에 이르는 것 같다. 정부차원에서 아프간을 원조하는 KOICA(한국 국제 협력단) 사업장에 로켓포가 떨어졌고 얼마전 우즈벡 미국 대사관에 테러가 일어났다고 한다. 대통령 선거 때문에 아프간은 온통 혼란에 휘말리고 있다.

 교민분들은 그러한 소식들을 접하면서 내가 용케도 아프간에서 무사히 건너왔다고 놀라워 하실 정도이다.

 카불에서 내가 있었던 단체를 비롯해 한국의 모든 NGO 단체는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나 스스로는 인식을 못 했지만 나 또한 아슬아슬하게 타직으로 넘어온 셈이다.

 인터넷에 여행기를 올리고 밀린 메일들을 썼다. 이곳 피시방은 1시간에 4소모니(1600원)이다.

 선교사님 댁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편하게 지냈다. 집에 있을때는 한국에 있다는 착각이 들다 집밖을 나서면 타직에 왔다는 실감이 날 정도로 편했다.

 8월 3일(화)

 선교사님 댁에서 편안한 생활이 계속 되었다. 사모님께서 너무 잘해주셔서 죄송할 정도이다.

 오후 4시 최목사님이 차를 끌고 집으로 오셨다. 오늘 최목사님이 이끄는 축구단의 연습에 함께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타직에서의 축구단은 열악한 형편이다. 1부리그가 있고 2부리그가 있는데 협회나 심판들의 부패가 이곳 축구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최목사님이 이끄는 팀은 고등학생과 몇몇 대학생으로 된 2부리그 팀이다. 열정을 가지고 지도하기는 하시지만 아무래도 열악하기 그지 없다.

 이곳에서는 가전제품의 대명사인 LG와 삼성과 같은 한국 대기업이 유니폼과 축구화, 공정도는 지원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장비가 열악하긴 하지만 선수들의 열정은 대단하다. 최목사님을 잘 따르며 지시사항을 잘 이행한다.

 축구 선교라고 해서 꼭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은 아니고(축구단에는 열렬한 이슬람 신자도 있음) 현지인들과 친숙해지면서 선진 문화를 전수해주는데 주력한다고 한다.

 축구선수들과 같이 뛰었는데 너무 덥고 등산화를 신어서 그런지 몸이 더디다.. 나도 한 축구 하는데.. 쩝.. 계속 공을 놓치지 미안할 정도 이다.

 축구가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에구.. 여행기에도 아예 집으로 표기하네..)

 저녁때는 집에서 바로 옆집의 목사님댁으로 가서 거기에 머물고 있는 NGO분들을 만났다. 여자분 3명과 홍간사님이었는데 같이 김밥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타국땅에서의 젊은 이들의 만남이라 더욱 반가웠다.(사실은 이쁜 여자분이 있어서^^)

 8월 4일(수)

 오전에 은진이 은영이 은지와 함께 두산베 박물관에 갔다. 박물관 입장료는 1달러 이고, 전시품들은 20~30년전 소련시절 만들어 놓은 것 그대로 이다. 관람을 위한 목적이 주가 되지만 오랜만에 사모님을 쉬시라고 애들을 다 데리고 나왔다.

 자연 생태와 대략의 유물들을 볼 수 있었지만 기대하던 실크로드 시절의 유물들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아쉬웠다.

 두산베의 거리는 활기가 있다. 타직에서 와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여자들이 정말 이쁘다는 것이다. 이목구비가 정말 또렷하고 얼굴이 작아서 한국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이다.

 때문에 두산베에 온 이후 길거리를 걸으면 이쁜 여자가 있나 둘러보면서 걷는다.(장가갈 때 다 됬나? 아무래도 아프간의 영향이 큰듯..)

 오후에는 NGO 사무실과 다른 선교사님댁으로 갔는데 수박 냉채를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이곳 분들이 한국에서 손님이 오실 때 가장 기대하는게 바로 드라마/영화 VCD이다. 여기 계신 교민들이 서로 돌려보면서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곤 했는데 웬만한 최신 한국영화는 다 보신 듯 하다.

 선교사님 댁에서 나와서 시장으로 갔다. 저녁 메뉴는 닭도리탕인데 사모님은 건장한 남자가 이렇게 있을 때 무거운 물건들을 사야 한다며 좋아하신다. 시장의 풍경은 여느 곳과 다르지 않다.

 흥정을 하는 사람들.. 서로 손님을 끌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인들.. 호기심을 가지고 물건을 이리저리 만져보는 아낙내들.. 장소만 다르지 시장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닭도리탕을 먹고 파미르비자를 받으러 갔다.

 밤 9시에 여행사 아파트에 도착해서 기다리다. 10시반에 비자를 받았다.

 좀 미심쩍긴 하지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 비자와 허가증을 비교해서 자세히 보니 이미 내 비자에도 파미르 지역이 표기되어 있었다!! 맙소사..

 더군다나 허가증을 본 사모님은 거주 등록이 안 되었다고 한다. 분명히 거주등록을 하라고 25달러를 줬는데..

 심란한 마음이다. 어쩐지 계속 좋은 일만 있더라.. 돈도 돈이지만 나를 속인 그 여행사에 대해 도저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사모님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실거 같았다. 찾아와준 손님이 이렇게 나쁜일을 겪으니..

 휴.. 일단 돈을 다 잊고..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휴..그래도..)

 
8월 5일(목)

 이곳 선교회에서 일하면서 비자문제를 도와주는 타직 청년이 있었는데 내 허가증과 거류증  문제로 집에 왔다. 이름은 시누이다.

 비자와 허가증에 전문가인 시누는 나의 비자를 보더니 파미르 비자는 안 받았어도 되었다고 하며 오히려 오비르(거주등록증)이 문제가 된다고 했다.

 거주등록증은 입국한지 3일 이내에 등록을 해야 하는데 날짜가 이미 지나서 벌금을 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벌금 규모는 100달러 이상이라나..

 하루종일 심란하기는 했지만 나를 걱정하는 주변 분들을 생각해서 애써 태연하게 있었다. 사실 이 여행사를 거치지 않았으면 파미르를 아예 안 갔을 것 아닌가..

 선교사님 댁에 이쁜 타직 아가씨가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다. 이름은 파르비나이고 나이는 19살이다. 성격도 명랑하고 이목구비가 또력해서 여지껏 여행을 하면서 만난 가장 매력적인 여자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파르비나가 퇴근할 때쯤 사모님을 통해서 내 사진 한 장을 부탁한다. 마음에 들었다면서 사진을 간직하고 싶다고 한다.

 잘 나온 증명사진을 파르비나에게 주고 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처음 선교사님댁에 머물게 되었을때 한국 남자인 나를 낯설어 하는것 같아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은 관심을 두지 않은 척 했지 명랑하고 아이들에게 상냥한 모습을 슬적슬적 보았었다.

 휴.. 진작 친해졌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파르비나가 퇴근하고 나서 아쉬움이 쏟아졌다.

 오후에 캠프 때 만난 교민 분중 한분이 선교사님 가족과 나를 저녁 초대해 주셨다. 메뉴는 불고기..

 아이들과 즐겁게 지내면서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나와 거래한 악덕 여행사는 이미 교민들에게 소문이 퍼져서 아마 모든 거래가 끊길거라고 한다.

 작은 이익만 추구하다 큰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나 또한 나의 손해로 인해 더 이상 다른 사람이 피해입지 될 것이라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저녁이 다 될 때쯤 오늘 나 때문에 하루 종일 바쁘게 관공서를 돌아다니던 시누한테서 연락이 왔다.

 시누는 내 여권을 건네주면서 5달러에 거주등록을 했고 사정을 잘 설명해서 벌금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또한 파미르 허가증은 내 비자에 표기되어 있지만 어짜피 지금 처럼 또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내일 배웅을 나와주겠다고 했다.

 정말 고마웠다. 이국땅에서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다니.. 시누는 한국인 선교회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한국인들에게 무척 친숙하고 친절하다.

 저녁식사 준비가 다 되고 모두들 모여서 저녁을 먹었다. 평소에도 거의 혼자 식사를 하는 편이라서(급식시간 빼고^^)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게 무척 그리웠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웃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아쉬워하고.. 이런게 바로 한국인의 정 아닌가?

 식사를 마치고 사모님과 은진, 은영, 은지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길에는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는 잘 생긴 타직 청년이었다.

그 잘 생긴 청년이 한번 씩 웃자.. 앞니가 모두 금니였다.. 윽..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타직에서는 물이 나쁘기 때문에 이빨이 잘 썩는다. 또한 금니는 이곳에서는 부의 상징이기 때문에 이빨이 썩는 기미가 보이면 금니를 박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는 유난히 금니를 한 이들이 많다.

 선교사님댁에 지내는 마지막 밤이다. 사모님도 무척 아쉬워하고 아이들도 아쉬워한다. 특히 맡언니 은진이는 자기 직전 아빠가 보고싶다며 계속해서 운다.

 평소 은진이 나이 답지 않게 동생을 잘 돌보고 성숙하게 행동하던 은진이가 아빠가 보고 싶다면서 우니 사모님도 속수무책이다.

 은진이의 울음 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이렇게 두산베에서의 마지막 밤이 흘렀다.

 내일부터는 파미르 하이웨이 여행이다..

 트럭운전사 부인과 아이들.. 타직에서 트럭운전사는 비교적 부유한 직업임을 알 수 있다.

 트럭운전사와 나..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던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쿨럽 터미널.. 이곳에서 두산베로 향하는 차가 출발한다.

온통 초원인 벌판.. 아프간보다는 풍요한 느낌

  끝없는 초원.. 그러나 여전히 건조하다.

도중에 마주치게 되는 호수.. 이곳은 댐으로 물을 가두어서 생긴 호수이다.

 쿨럽~두산베 중간지점의 검문소.. 검문소가 나올때마다 운전자는 1소모니를 준비했다. 부패가 정말 심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악지역.. 우리나라 산맥과 비교하면 어디가 더 이쁜가?

  두산베 시내.. 아프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우연히 마주친 한국 NGO단체의 보호를 받고 있는 고아들.. 페스트푸드점에 특식을 먹으로 가는 길이다.

  한국인 자녀 성경캠프에 참가한 아이들.. 우연인지 그 먼가에 이끌려서 인지.. 난 레크레이션 강사로 활동했다.

 캠프파이어 모습.. 아기자기 하게 부모님들이 준비한 흔적이 보인다.

 최목사님이 아이들을 정렬시키고 있다. 부모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는 행사

부모님들.. 이 멀리 타국땅까지 와서 가족에 의지하며 헌신적으로 살고 계시다.

 최목사님의 진행으로 부모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는 아이들

모닥불에서 구운 감자를 맛있게 먹는 아이.

  깨끗한 두산베 시내.. 그러니 이곳 역시 6년간의 내전을 겪은 아픔의 나라이다.

 두산베 박물관.. 외형은 깔끔하지만 모든 소장품이 20여년전 구소련때 만들어진 낡은 박물관이다.

박물관 안에 있는 마네킹

 박물관 건너편의 소모니왕.. 특별히 내세울 위인이 없는 타직에서는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던 소모니 왕조를 신봉한다.

  두산베 시장의 모습.. 두산베라는 뜻은 월요일이란 뜻이고 80여년 전만 해도 두산베는 월요일에 시장이 열리는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시장 전경.. 어디서나 사람 사는 모습은 똑같다.

정말 이쁜 파브리나.. 아쉽지만 마지막으로 찰칵

 오랜시간 같이한 은진, 은영, 은지.. 이쁘고 착하게 자라리라 믿는다.

 

 타지키스탄 여행기 3 (파미르 여행의 시작 호러그, 제란다 04.8.6~8.7)

8월 6일(금)

 파미르 하이웨이를 가기 위해선 먼저 호러그에 가야 한다. 호러그로 가는 길은 무척 험해서 미니버스를 타고 24시간을 가야하는 머나먼 여정이다.

 아프간에서 타직으로 넘어올 때 호러그로 직접 들어갈려고 했지만 국경을 잘못 찾아서 쿨럽으로 들어갔었다. 참.. 집을 잘못 찾았다는건 말이 되도 국경을 잘못 찾은 경우는 있을까?

 사모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계란후라이와 타직식 마카로니를 준비하시며 동행자와 내가 떠나는 걸 서운해 하신다.

 1주일동안 너무나도 고맙게 대해주신 사모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사모님께서는 메일주소를 주시면서 꼭 연락하라고 하신다.

 어제 나의 비자 문제를 해결해준 시누가 아침 6시반에 택시와 함께 우리를 배웅나와 주었다.

 파미르로 가는 버스터미널은 두산베 시내에서 공항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시누가 차를 잡아주고 나에게 요금을 알려주었다. 요금은 80소모니(약 27달러)

 작은 미니버스는 9명을 채우고 나서 8시에 출발했다.

 두산베를 벗어나고 외곽으로 나가자 도로가 비포장으로 변했다. 날씨가 더워서 1시간에 한번꼴로 정차를 해서 물을 마시면서 갔다.

 지겨운 버스여행이기는 하지만 같이 탄 타직인들은 명랑하고 친근했다.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고 왁자지껄 즐겁게 이야기하며 지냈다.(난 물론 언어가 안되니..)

 버스를 타면서 처음 느낀 것은 타직은 전형적인 산악국가라는 것이다. 물이 풍부해서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험한 산들이 줄이어 이어져 있다.

 11시가 조금 넘어 차는 식당 앞에 멈췄다. 속이 안 좋아서 삶은 달걀과 넌(마른빵)으로 식사를 했다. 같이 버스를 탄 한 아줌마가 식사비를 다 내준다.

 이번 버스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점이 있다면 이쁜 여자애들이 3명이나 탔다. 영어가 전혀 안 통하지만 바디랭귀지로 이야기를 나이가 대략 20살 정도이다. 나이만 알 수 있었고 그밖에 신상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

 처음에는 풍경 사진을 찍기 위해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는데 버스 안에 키가 190이 넘는 아저씨가 불편해하기에 내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그게 고마워서 그런지 자리를 양보해준 이후로 그 아저씨는 나에게 설명을 많이 해주시며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주신다.

 오후가 지나자 버스는 절벽 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이미 익숙해진 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운전사 아저씨는 타직 전통음악을 계속 트셨는데 가끔 핸들을 놓고 춤을 출 때가 있어 더욱 불안했다.

 전체적인 풍경은 재작년 여행을 했던 동티벳 길과 매우 흡사하다. 절벽위의 길과 끝없이 이어진 초원.. 그리고 설산들.. 도로가 열악한것 마저도 동티벳과 비슷하다.

 밤 9시 정도가 되자 차는 검문소 앞에 멈췄다. 이곳 사람들은 파미르를 바닥샨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바닥샨주의 경계이다.

 타지키스탄은 4개주로 된 하나의 나라이지만 주의 독립성향이 강해 사실상 4개의 나라라고 보면 된다. 때문에 주를 넘을 때마다 허가증을 지녀야 하며, 이곳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은 여권이 있다. 자신의 나라를 여행하는데도 여권을 지녀야 하는 답답한 특수 상황이다. 나 또한 이곳 비자를 얻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하지 않았는가..

 타지키스탄의 또 하나의 특수상황은 바로 모든 국경은 러시아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중앙아시아의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위협감을 느낀 러시아는 타지키스탄의 모든 부채를 대신 갚아주고 러시아 군인들을 주둔기간을 2년을 더 연장했다고 한다.

 국경에만 러시아 군인들이 있는게 아니라 이렇게 주 경계에도 러시아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다.

 서류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난 무사히 통과하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하루종일 버스를 타서 그런지 허리가 좀 뻐근하다. 비포장 도로에 덩컹거리는 버스에 앉은채로 잠들며 또 하루가 지나갔다.

 8월 7일(토)

 흔들리는 차에서의 선잠은 힘들기 그지 없다. 깊은 잠을 자는것은 불가능하고 중간중간에 계속 깨기 때문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조금씩 뜨고 나니 옆에 여자애가 내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다.

 난 버스를 타면 갑자기 명랑해지며 오버를 많이 하는 편이다. 외국인이라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아서 그런지 튀는 행동을 많이 한다.

 말이 안통해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려고 과장된 몸짓을 하고 다양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한다.

 내 어깨에 기댄 여자애는 그러한 나의 모습에 호감이 갔었나 보다. 낮부터 일부러 내 옆자리에 앉더니 나의 행동을 따라하기도 하고 가끔 툭툭치기도 한다. 무엇보다 외국인이라서 신기해 하는 눈치이다.

 하긴.. 나도 어린 시절 처음 외국인을 봤을 때 영어로 말하는 것 자체를 신기하고 경외감 있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새벽 4시가 넘자 버스 기사는 한 식당 앞에 멈춰서 급하게 뛰어가더니 자리를 잡고 잔다.

 하루 종일 운전을 해서 피곤한가 보다. 무리하게 빨리 가는 것 보다는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게 더 안전하겠지..

 버스가 멈춘 곳은 두 개의 산맥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협곡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다.

 이 지역의 지형은 전체가 산악으로 되어 있어서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며 오직 우리가 지나가는 이 길만이 실 줄기 같이 파미르의 중심지인 호러그로 이어져 있다.

 밤이라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렁찬 계곡 소리와 양옆에 거대한 산들의 실루엣은 뚜렷히 보였다.

 어제 친해진 키 큰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호러그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아프가니스탄이고 왼쪽은 타지키스탄이라고 한다. 사람이 살것 같지 않은 이곳에도 엄연히 국경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가 탄 버스 안에는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는 아줌마가 타고 있었는데 쉬고 있는 동안에 아줌마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아줌마는 두산베에서 의사를 하고 있으며 대학을 다니는 딸과 함께 본래 집인 호러그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딸은 다름 아닌 나에게 기대어 잠자던 여자애이다. 아줌마를 통해서 그 애는 18살이고 경제학과 1학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이가 40살인 아줌마는 20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의사 아줌마를 통해 이 나라 지식인들이 현재의 타지키스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충 이야기 들을 수 있었다.

 아줌마는 단호하게 지금의 타직 정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 했다. 정부, 경찰, 공무원 모두가 썩었으며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옛 소련시절이 가장 살기 좋았고 그때가 지금도 그립다고 말한다.

 난 아줌마에게 머라고 이야기 해야할지.. 난감했다. 잘못 이야기하면 잘 사는 나라의 외국인이 와서 잘난 척 하는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냥 솔직히 말하기로 결심했다.

 아줌마에게 한국도 독립 후에 전쟁을 겪었으며 오랜 독재 통치 기간을 거쳤고 국민들이 정부와 싸워서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다고 이야기 했다. 타지키스탄이 잘 되기 위해서는 옆에서 자고 있는 딸 세대때 많은 변화를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줌마에겐 민주주의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자리잡은 것 같다. 타지키스탄에서의 한국과 같은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며 다시 공산주의 시절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아는지 아줌마는 씩 웃는다.

 아줌마는 불현듯 결혼에 대해 나에게 묻는다.

 언제 결혼하나고 묻는 아줌마에게 최소한 30살이 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하며 몇 년째 애인이 없다고 이야기 했다.

 다른 종족과의 결혼.. 즉 국제 결혼에 대해 묻기에 마음에 맞는 사람만 있으면 누구하고도 결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줌마: ‘그런데 부모님이 그런 결혼에 동의를 하니?’
 나 : ‘우리 부모님은 나를 믿기 때문에 분명히 동의를 할 거에요.’
 아줌마: ‘그래도 부모님이 동의를 안 하면’
 나 : ‘그때는 애인 손을 잡고 저 멀리 다른 나라로 도망치면 되죠.’

 우린 같이 웃었다. 혹시 자기 딸을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 아닐까라는 왕자병스러운 생각이 조금 들었다.^^(8살 차이인데 넘하다.. 그래도 딸이 꽤 이쁜데..)

 두산베에서 출발한지 무려 26시간만인 오전 10시 드디어 호러그에 도착했다. 파미르의 중심지이고 파미르 하이웨이의 출발지점이 되는 곳이다.

 고도가 높아서 크게 덥지는 않지만 햇빛이 유난히 강하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거의가 긴팔을 입고 다닌다.

 나와 동행자..

 아참.. 저번 여행기부터 내가 동행자라고 표현하는 이에 대해 설명하겠다. 한국인이고 두산베에서 만나서 파미르 하이웨이까지 같이 왔다. 여행기에서 동행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본인이 여행기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말라고 하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아무튼..

 동행자와 하루 묵을 숙소를 찾았지만 싼 숙소는 방이 꽉 찼고 제일 싼 곳이 10달러가 넘었다.

 숙소를 찾다가 중국어가 적힌 침대 버스를 발견했다. 그 앞에는 중국인 운전사가 있다. 여행중국어긴 하지만 어느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기에 반가웠다. 버스는 카슈가르를 향해 모레 새벽 1시에 출발하고 요금은 35달러라고 한다.

 1주일에 단 한대 있는 버스이다.

 그냥 버스타고 편하게 중국 국경을 넘어? 헛된 유혹이 몰려왔지만 이곳까지 오기에 겪을 우여곡절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

 숙소를 찾아 한참 헤메고 있을 때 우리에게 반가워하며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이곳 여행사에 있으며 우리를 찾았다고 한다.

 그의 사무실로 가서 알아보니 그는 아프간에서 만난 이스라엘 여행자 샤기가 나에게 건네준 명함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랜트카를 이용해서 여행을 할것인지 묻는다.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을 부른다.

 우리는 호러그에서 하루 묵을 것이라고 말하니 그는 싼 숙소는 없다고 말하면서 홈스테이를 이용하는게 어떤지 물어본다. 홈스테이를 하는데 하루 20달러라고 말한다.

 풋.. 말도 안되는 가격.. 론니에는 분명 홈스테이가 2달러라고 써 있다.

 이름을 묻기에 내 이름을 이야기 하자 그는 컴퓨터를 켜더니 메일로 보내진 내 파르미 허가증을 보여준다.

 메일을 보니 일본인 2명과 한국인 2명이 허가증이 스캔되어 있었는데 그 두 한국인이 우리인 셈이다.

 참으로 경악했다.. 이렇게 여행사끼리 서로 연결되어 철저하게 외국인을 뜯어먹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외국인이 거의 없어서 이처럼 조직적으로 뜯는가 보다.

 그러한 술수에 휘말려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우린 사무실을 나와서 다시 숙소를 찾았다.

 모든 간판이 러시아어나 파미르어이고 이곳 사람들에게 영어는 전혀 새로운 세계의 언어이기에 숙소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찾은 숙소도 터무니없이 비쌌다.

 ‘음.. 호러그는 머물 곳이 못되는 구나’

 어짜피 파미르하이웨이가 목적이므로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일단 여기서 120킬로 떨어진 ‘제란다’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동행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이곳에 며칠 머물기를 원했다. 이야기를 해보니 동행자는 여행을 원했고 난 모험을 원해다. 생각이 다르면 어쩔수 없지.. 아쉽지만 헤어지기로 했다.

 다시 홀로 여행이 되었다. 나만의 롤플레잉 게임을 다시 가동해야겠다.

 제란다에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갔다. 터미널로 가는 도중 여자 꼬마애 2명과 마주쳤는데 그 중 한명이 재작년 월드컵때 한창 유행했던 ‘Let's be red' 글씨가 쓰여진 빨간 두건을 쓰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국인이라고 말하며 사진을 찍어주고..

 한가지 걱정되는게 있다면 돈이다. 돈이 모자라는게 아니라 작은 단위의 돈이 없다는 것.

 오직 5달러짜리 3장이랑 18소모니(6달러)가 있을뿐이다. 이 돈으로 중국까지 버틸 수 있나..? 환전을 하려고 했지만 도대체 어디서 환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모험을 한번 해보자.. 최대한 돈을 아끼면서 중국 국경을 넘기로 했다. 머.. 어떻게 되겠지..(사실 좀 막막하다..)

 제란다는 호러그에서 파미르하이웨이를 향해 출발해서 처음으로 닿는 도시? 아니 마을이다.

 하이웨이이기에 많은 차들이 지나갈 줄 알았는데 버스도 없다. 이곳은 거의 왕래가 없나? 제란다에 가는 택시를 찾았지만 무려 10달러나 달라고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

 이렇게 막막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친구를 만드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 주변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청년들에게 한국인이라며 바디랭귀지로 인사를 했다.

 다들 흥미가 있는 듯 나에게 맥주도 권한다. 좀 친해지고 나서 제란다로 가는 택시를 알아 본다고 이야기 하니 잠깐 기다려 보라면서 택시를 알아봐준다.

 다행히 5달러와 3소모니.. 총 6달러에 제란다까지 가는 택시를 구할 수 있었다. 택시는 사람을 다 태우고 나서 출발 했는데 인상 좋은 택시기사 아저씨는 택시를 좀 몰고가더니 안되겠다며 10달러를 달라고 한다.

 이럴때 좋은건 과격한 제스처.. 난 즉각 택시에서 내려 배낭을 꺼내서 갈려고 했다.

 그러니 택시기사가 잡는다. 그러더니 처음 금액대로 가자고 한다.

 호러그를 벗어나니 파미르하이웨이가 시작되는 곳에 검문소가 보였다. 외국인이라서 검문소에서 내려 여권 검사를 받았는데 서류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파미르하이웨이에 외국인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아서 간단하게 검사를 마친 군인들이 오히려 반가워한다.

 그들은 같이 사진을 찍자며 내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아프간과 마찬가지로 아곳 타직 사람들도 사진을 찍어주는걸 좋아한다. 때문에 이들과 금방 친해지기 위해서는 사진기가 가장 좋은 도구이기도 하다. 다음 여행때는 꼭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가지고 다녀야지..

 검문을 마치고 본격적인 파미르 하이웨이에 들어섰다.

 어제 호러그를 오면서 봤던 풍경이 동티벳과 흡사하다면 이곳 파미르하이웨이는 서부티벳을 빼다 박았다.

 나무가 하나 없는 숨막힐 듯이 거대한 산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듯 펼쳐져 있는 도로.. 그 웅장함에 감탄을 했고 이런 척박한 곳에서도 사람이 산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택시를 타서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사진 찍기가 좋다는 것이다. 버스를 타면 아무래도 여러사람의 시선이 있고 창문이 한정되어 있어 사진 찍기가 불편한데 택시 앞자리는 그런 부담이 없다.

 택시는 2시간을 가더니 나를 제외한 모두를 내린다.. 아.. 이곳이 목적지였구나..

 초원에 드문드문 흙집이 있는데 그중에 한 집 앞에서 택시가 섰다. 택시 기사는 같이 점심을 먹자며 나를 흙집으로 데리고 갔다.

 작년 서부티벳 여행 때도 히치를 한 우편차가 가옥들을 방문을 하며 차를 대접 받았었는데 그때 나도 같이 방문 했었다. 그 덕에 티벳 전통 민가를 볼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곳 파미르 사람들의 생활을 엿 볼 수 있었다. 열악하기는 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척박한 환경에서도 적응하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볼 수 있었다. 가축의 똥으로 난로를 지피고.. 우유와 넌(마른빵)으로 연명하는 사람들.. 내가 과연 이렇게 살라고 하면 그럴수 있을까?  이미 문명의 이기에 찌든 나에게는 불가능한 삶이다.

 택시는 다시 나 혼자를 태우고 6달러를 낸게 미안할 만큼 더 먼 거리를 간다.

 오후 4시반쯤에 제란다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가옥이 얼마 없는 마을이다.

 이곳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역시 바디랭귀지..) 제란다에서 1킬로 정도 떨어진 트럭 운전자들의 여관으로 갔다.

 론니에는 이곳 여관비가 1달러라고 되어 있는데.. 론니 정보가 4년전꺼니까 지금은 2~3달러 정도 하겠지..

 그런데 방이 없단다.. 이런.. 시간도 늦고 어디서 숙소를 찾아야 하지?

 주인 아줌마에게 제스처로 그냥 마루바닥에서 자도 되니까 재워만 달라고 했다. 잠시 남편과 상의를 한 아줌마는 배낭을 집안으로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

 여관에는 이곳 여관 주인가족을 비롯해 근처 공사장에서 일하는 파미르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모두들 외국인인 나에게 흥미 있어 한다.

 아참.. 아까부터 타직인이라는 표현대신 파미르인이라고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을 파미르인이라고 한다. 타직인과 민족은 같지만 쓰는 언어와 문자가 전혀 다르다. 의식 또한 타직과는 다른 나라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이곳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언어는 파미르어랑 약간의 타직어와 러시아어이다. 당연히 나와는 의사소통이 완전히 안 되는 상황이다. 이름을 물을 수 있을 정도의 영어를 해서 서로의 이름은 알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모여 함께 식사를 했다. 외국인인 나를 상석에 앉게 하고 음식도 제일 먼저 대접했다. 국수와 고기국을 섞어놓은 메뉴인데 정말 맞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는 파미르인들은 내가 신기한지 계속 나를 향해 즐겁게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돈은 얼마나 들고 다니냐고 묻길래 지갑에 들어있는 5달러와 15소모니를 보여주면서 이게 다라고 했다. 그리고 중국에 가면 신용카드를 쓸거라 거짓말을 했다.

 모두들 놀라면서 돈이 없으면 어떻게 여행하느냐고 진심으로 걱정해 준다. 갑자기 나타난 젊은 외국인 때문에 모두들 진지한 얼굴로 상의 하는 것을 보니 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비밀주머니에 1405달러가 있음..) 너무도 착한 사람들이다.

 쪽지에 그들의 이름을 한글로 써준 후 주면 자신의 이름이 한글로 써진게 신기하듯이 소중하게 종이를 접어서 간직한다. 나야 평소에 쓰던 문자를 쓰는 거지만 그들한테는 그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든 소중한 선물이 된 셈이다.

 한글을 나처럼 소중하게 쓰는 이들이 있을까?^^

 이 여관의 주인아저씨 이름은 골론이다.(이름 외우기 너무 쉬웠다.) 골론은 식사 후 나를 근처 짓고 있는 건물로 데려갔다.

 제란다 지역은 온천이 풍부한 지역인데 때문에 여기저기서 온천물이 샘솟는 것을 볼 수 있다.

 골론이 짓고 있는 건물은 그런 온천을 이용한 호텔이다. 규모도 큰 편이고 사우나 시설도 잘 되어 있었다.

골론은 나에게 자랑스럽게 건물 이곳저곳을 보여줬다. 모처럼만에 온 외국인에게 자신의 건물을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산책을 하면서 아름다운 마을의 풍취도 감상했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호의적이다. 나 역시 모든이들에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고 웃으면서 대해준다. 마치 내가 VIP가 된 것처럼 나를 배려해주고 악수를 하면 정성스럽게 악수를 하며 인사해준다. 마을의 모든이들의 관심이 나에게 집중되는 이 느낌.. 마치 연예인이 된 듯하다.

 날이 어두워지자 날씨가 추워졌다. 배낭에서 긴 옷을 꺼내 추위를 달랬다. 지금이 과연 8월이 맞을지 의심이 될 정도로 추웠다.

 생각지도 않게 온천욕을 하게 되다니.. 온천물의 온기가 서서히 나의 몸에 스며들 때 지금까지의 모든 피료가 사라진 듯하다.

 온천욕을 끝내고 잠자리 역시 극진했다.

 잠은 여관이 아니라 집안에서 잤는데 골론의 아들부부 내외의 방인듯 한 방에 자라고 해서 가니 이미 정성스럽게 잠자리를 깔아놓았다.

 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곳 사람들은 나를 진정한 손님으로 맞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음 호러그에 도착했을때 여행사 직원은 20달러에 홈스테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난 이곳 제란다에서 돈 한푼 들이지 않고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이곳 문화를 몸으로 체험 할 수 있는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타직에 건너와서 한번도 돈을 주고 잠을 잔적이 없다. 만약 내일 역시 공짜로 자면 타직에서 한번도 숙박업소를 이용하지 않는 셈이네^^ 너무 좋은 사람들만 만나는군..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렇게 많은 행운들이 오는지.. 피식 웃며.. 스르르 눈이 감겼다.

 아참.. 가끔 내 홈페이지나 전화를 통해 여행에 관한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언어 때문에 걱정을 하신다.

 하지만 난 자신있게 내 체험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다. 여행에 있어서 언어는 부수적인 것이다. 열린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그건 그렇고 단 10달러와 15소모니로 앞으로 어떻게 여행하지? 이곳 사람들도 다들 불가능 하다고 하는데.. 차비만 해도 만만치 않을텐데.. 앞으로의 여정이 어떻게 될까?

나에게 큰 도움을 준 신우.. 유난히 한국음식을 좋아하기도 하다.

  파미르하이웨이 입구로 가는 호러그로 가는 차량들.

  호러그로 가는 길목.. 건조하지만 나무들이 많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녹색이 눈에 띈다.

끝없는 산악지대..

호러그로 가는 길목은 계곡으로 이어진 길이기도 하다.

계곡을 옆에두고 비포장도로가 계속된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기름을 비축해놓은 야적장

  고도는 점점 더 높아진다.

지형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때문에 이렇게 퇴적층이 쌓인 경우도 있다.

 날카로운 눈빛의 소녀.. 사진 찍는걸 좋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절벽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도로..

  가 본적은 없지만 마치 그랜드캐년은 온듯한

  조금씩 경사가 가파라진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푸르름이 더 해진다.

 콜러그로 가는 길에 몇 개 없는 다리.

  풀을 찾아 헤메는 소들.. 대부분 농가가 소를 키운다.

  동네 코흘리개들..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버스안에선 춤판이 벌어졌다. 지금 춤추는 여인이 20살이라고 한다.

  내가 타고 온 차.. 이 좁은 차를 26시간이나 타고 왔다.

저녁 무렵.. 유유히 가축들이 지나가고 있다.

 고원 정상부근에서 바라본 근처의 모습.. 파란 융단을 깔아놓은 것 같다.

 새벽 4시경.. 계곡을 사이에 두고.. 왼쪽 산이 아프간이고 오른쪽은 타지키스탄이다.

  호러그에 다가 올때쯤.. 높은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오른쪽은 나와 영어로 이야기를 했던 아줌마.. 가운데는 그 딸..

그토록 오고자 열망했던 호러그 시내

 이곳에서 'Let's be red'  두건을 쓴 붉은 악마 여자아이를 만났다.. 정말 반가웠다.

천진난만한 파미르인 아이의 미소

호러그 시내 주변은 온통 산이다.

호러그 시장.. 허름한 건물이다.

폼잡는 파미르인.. 영화배우 같기도 하다^^

  호러그 버스 정류장 근처

 파미르 하이웨이가 시작되는 지점.. 숨막힐듯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파미르의 상징인 마르코폴로 산양.. 실제로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어둠속에서의 한줄기 빛인듯.. 깍아지르는 산을 가로질러 도로가 나 있다.

  이곳 도로도 계곡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길가에 파미르 하이웨이 첫 관문인 검문소가 보인다.

검문소 군인과 함께.. 돈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돈이 아니라 사진찍기를 원했다.

검문소 군인들.. 전형적인 파미르인들이다.

  유엔 지원화에 만들어진 학교.. 아프간에 비해서는 국제사회의 지원이 거의 없는 편이다.

하이웨이에 걸쳐 있는 마을.. 계곡 주변에는 간간히 마을이 보인다.

같은 택시를 타고 온 아이.. 역시 사진찍는걸 좋아한다. 현지인 같지 않게 자유로운 포즈를 취해 놀랐다.

길가에서 찰칵.. 주변 환경과 한국인인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

웅장한 고산들 사이에는 계곡과 도로가 나와 있다.

8월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쌓여있는 고산

설산과 아름다운 푸르름이 어우러져 있다.

이 지역은 2000년째 실크로드로 사람들이 왕래한다.

 파미르아이.. 외국인이 낯선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파미르인의 가옥.. 비가 거의 오지 않고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흙집이다.

택시운전사와 집주인 할머니..

이집의 모녀와 나.. 꼬마애와 사랑의 하트를 그렸다^^

  단란한 파미르 가족.. 황량한 곳이기는 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다.

  파미르인집.. 휴.. 만약 나보고 여기서 살라고 하면..

  제란다로 향하는길.. 생각보다 먼길이다.

  강 주변에는 초원이 있고 가축들이 방목되고 있다.

  길 한가운데서 멋진 포즈..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이 깨끗해진다.

  친절한 여관주인 골론 내외..

유일하게 영어가 좀 되는 골론의 딸.. 현재 콜러그 대학 1학년 생이다.(이뻤다~)

오늘 하루 신세진 여관.. 해발 4000미터가 넘는다.

이곳에서는 온천이 용출된다. 온천이 뿜어져 나온 모습

 이곳 작업인부와 함께.. 한국인을 처음 봐서 그런지 다들 반갑게 맞아준다.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 입맞에도 맞았고 무엇보다 날 진정한 손님으로 대해주었다.

주인집 내외..(사실 골론가를 정확히 파악 못합) 단란한 모습이고 이곳 주민치고는 사는편인 것 같다.

 나와 같은 방을 쓴 멤버.. 사진에 보듯이 깨끗하고 아늑한 침실이었다.

 

 타지키스탄 여행기 4 (파미르 하이웨이 04.8.8)

8월 8일(일)

 너무도 편한 잠자리라서 일어나기가 싫었다. 그러나 난 여행자.. 더 이상의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일어나서 대충 씻은 뒤 떠나려고 하자 아침을 먹고 가라고 한사코 말린다.

 우리나라의 정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구나..

 아침을 먹으면서 한 마을 사람이 이곳 제란다에 일본인 여행자 1명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같이 차를 타고 가라고 한다.

 이곳에서도 일본인을 만나게 되다니.. 오늘의 목표인 무르갑을 손쉽게 가게 되어 기쁘기도 하지만 대화가 되는 상대를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골론 가족을 비롯해 이곳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후 제란다 마을로 내려왔다.

 일본인이 렌트한 듯한 차를 보니 ‘Great game'이라는 심볼이 붙여져 있었다.

 Great game이라 함은 19세기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한창일 때 이곳 파미르 지역에도 그 영향력이 미쳤는데 러시아는 인도와 파키스탄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이곳 파미르를 비롯해서 아프간에까지 진출할려고 시도했다.

 당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가장 위협을 느낀 영국은 3번에 걸쳐 아프간에 침공을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 조약을 맺어 아프간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Great game의 시작.. 러시아는 파미르를 통해 인도로 진출하려고 시도했고 영국은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프간에서 파미르로 진출했다.

 결과는 영국의 승.. 아프간을 거머쥔 영국은 아프간 동쪽의 파미르지역을 점령해 중국 국경과 잇는데 성공한다. 현재도 아프간 영토중에 동쪽의 돌출된 부분이 있는데 바로 Great game 게임의 산물이다.

 그런데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자기네 나라를 열강들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던 소산인 ‘Great game’을 이름 붙이다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이 빌린 차인 만큼 무척 비싸보였다. 드라이버에게 물어보니 이 차는 중국국경까지 간다는데 이 좋은 차를 타고 거기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88킬로 떨어진 아리출까지만 같이 갈 생각을 했다.

 일본인이 숙소에서 나왔을 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중년인 듯 한 이 남자는 건성으로 대답하더니 그냥 차에 타는 것이다. 예의상 몇 마디라도 해야 하는거 아냐?

 더 웃긴것은 처음에는 드라이버가 같이 타고 가자고 하더니.. 미안하다면서 이 일본인이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같이 타는 걸 거부했다고 한다.

 내가 언제 같이 차타자고 부탁했나? 머.. 차를 얻어타는게 목적이 아니라 정보를 얻는 것이 목적인데.. 아침부터 재수 없는 일본인을 만나다니.. 이거 아침부터 일진이 안 좋은것 아닌가?

 오늘의 목표는 무르갑까지다. 이곳 제란다에서 아리출까지 88킬로 이고 아리출에서 무르갑까지 100킬로인 머나먼 여정이다.

 일단 아리출까지 히치를 하려고 기다렸지만 1시간을 기다려도 차가 지나가지 않는다.

 이곳 파미르 하이웨이는 지나다니는 차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소련 시절 키르키즈 Osh시에서 이곳 호러그시까지 파미르 하이웨이 공사를 했었는데 그 때는 아프간과도 연결이 되어 많은 트럭들이 지나갔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구소련도 무너지고 또한 두산베 북쪽에 좋은 길을 만든 지금.. 파미르 하이웨이는 파미르 사람들의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교통편 이외에는 없다.

 1시간을 기다려도 차가 지나가지 않았다. 대신 마을 택시기사인듯한 남자가 나에게 오더니 무르갑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면서 기름값만 달라고 한다. 기름은 값으로 120소모니(40달러)를 달라고 한다.

 이 친구.. 상대를 잘 못 골랐나 보군... 차가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위협을 했지만.. 어디 내가 그런 말에 굴복할 상대인가..

  옛 사람들처럼 파미르 하이웨이를 걸어가며 즐기기로 했다. 이래뵈도 국토순례를 6번 한 몸 아닌가..

 88킬로니까 한 2일이면 가겠지. 하이웨이 바로 옆에는 강이 흐르고 있으니까 생존하는데는 크게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크고 웅장한 산들이 그림처럼 쭉 이어졌고 저 멀리 목동들이 양을 몰고 다니는 모습도 간간히 보였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걷기 시작한지 1시간이 지나니 미니버스가 한 대 지나갔다. 히치를 하려고 했지만 실패..

 햇볕이 더욱 쨍쨍하게 내리쬐고.. 고산지대라 걷는데 조금씩 힘겨워졌다.

 배가 고프다고 느낀 걷기 시작한지 2시간이 지날 무렵 트럭 한 대가 저 멀리 보였다.

 ‘저걸 꼭 히치 해야지..’

 다행히 트럭은 섰고 인상 좋은 운전사는 트럭 화물칸에 타라고 한다. 화물칸에는 기름통 2개가 전부여서 주변 사진을 찍기 딱 좋았다. 하늘이 사진을 맘껏 찍으라고 이런 차를 보내나 보다.

 이미 2명의 파미르인이 화물칸에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화물차가 비포장 도로를 달릴때 기름통이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고 있었다.

 일종의 아르바이트인 셈이다. 차를 타는 대신 기름통 잡아주기..

 그런데 한 20분 있다가 이들이 목적지에 다 왔는지.. 내린다.. 머야 나 혼자 기름통을 잡아야 해? 그래도 아리출까지 트럭을 타는게 어딘가..

 고개를 넘고 사막지역이 나타났다. 만약에 저길 걸어 갔으면 무지무지 고생했으리라..

 흔들리는 기름통 2개를 잡으며 사진도 찍고.. 그렇게 아리출까지 도착했다.

 아리출은 제란다보다는 큰 규모이지만 거의 죽은 마을이나 다름이 없다. 마을 분위기가 미국 서부시대때 쇠퇴한 마을과 흡사하다고 보면된다.

 황량한 사막  배낭을 내리려고 하자 오늘 무르갑까지 간다며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한다.

 한 식당에 들한 가운데 사람들은 저마다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운전사는 나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계속 얻어먹네..

 식당 주인은 외국인이 신기한지 나에게 이것저것 물으려고 하지만 그게 어디 되나.. 이내 포기 하고 만다.

 점심을 먹고 아리출 마을에서 무르갑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모은 후 다시 출발했다.

 두산베에서 호러그까지 가는 길이 동티벳과 흡사했다면 호러그에서 무르갑까지 가는 길은 서티벳 풍경과 흡사하다. 티벳의 모든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은 파미르 하이웨이가 아닌가 싶다.

 이곳의 풍경을 여행기에 적기에는 좀 벅차다.. 여행이 끝나고 사진으로 설명을 하겠다^^

 무르갑에 가까워지자 검문소가 보였다. 서류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당당하게 여권을 보여주니 무사통과..

 트럭은 또 달리기 시작했고 저 멀리 무르갑이 보였다. 구소련 시절 만들어진 한마디로 추춘 도시이다.

 한 여름에도 영하 20도까지 내려가고 겨울에는 영하 60도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때문에 도시의 모든 사람이 긴옷을 입고 있으며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서늘함이 느껴졌다.

 트럭은 기름통을 내려주더니 한 집앞에 선다. 트럭 운전자들이 잠깐 자는데 이용하는 듯한 그 집에 운전사는 나보고 오늘 같이 지내자고 말한다.

 집 안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의사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

 짐을 챙기고 피곤함을 잠깐 잠으로 달래고 있을 때.. 트럭 운전사가 날 깨운다.

 저녁 식사를 하라는 것이다. 계란 반숙에 양파를 섞고, 마른빵에 짜이(차).. 어제 지낸 제란다 보다는 열악하기는 하지만 이 운전사와 의사 역시 나를 진정 손님으로서 대해준다는 것이 느껴졌다.

 식사를 하고 영어가 통하는 의사와 대화를 했다. 의사 선생님 이름은 글로스이다.

 글로스가 문뜩 나에게 여기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어떤지 물어본다.. 무심코 ‘very hard(무척 어렵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실수.. 뒤늦게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고 착하다고 이야기 해보지만 이미 내 마음을 알았는지 웃기만 한다.

 그는 원래 집이 호러그인데 이곳 무르갑에서 근무를 한다. 때문에 가족들 얼굴보기가 무척 힘들다고 한다.

 호러그에 왔을때 만났던 의사 아줌마와 마찬가지로 현재 타직에 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그리고 현실에 대해서 상당히 답답해하는 것 같다.

 20~30년 전 우리나라 지식인들도 외국인을 볼 때 그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사는 걸 부러워하게 만들어준 우리나라의 기성세대들에게 정말로 감사를 드린다.

 어렸을 때 주말의 영화를 보면 서양 애들이 비행기를 타고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다니며 여행을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과연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한 부러움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진 지금은 다른 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로스는 러시아, 타직, 키르키즈, 파미르어에 능통하고 영어 또한 독학을 했다고 한다. 독학을 한 것 치고는 꽤 잘 하는 편이다.

 이야기 도중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쌀쌀하기는 했지만 하늘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은하수들이 쏟아질듯이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잘 보이면 인공위성 2대가 지나가는 것이 보일 정도이다.

 별들이 너무도 빛나서 멍하게 고개를 하늘을 향한채 서 있었다.

 ‘저 별 중에 10년 전의 모습이 있을 것이구 100억년전의 모습도 있겠지..’

 1광년은 빛이 1년동안 이동한 거리이다. 가장 가까운 별이 4광년이 조금 넘는 반면 가장 먼 별은 130억 광년까지 발견되었다. 즉 4년전 빛과 130억년전의 빛을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밤하늘이다.

 모두가 잠들고.. 나 역시 그로스랑 이야기를 하는 도중 하품이 나왔다. 그로스는 손수 내 자리를 깔아주며 추울거라며 이불을 2개나 덮어준다.

 눈이 스르르 감기려고 할 때 호롱불에 의지하며 나의 론니플래닛을 읽는 그로스의 모습이 스케치 되었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고민 많은 지식인.. 바로 그 모습이다.

 오늘은 아침에 밥맛없는 일본인을 만나 스타트가 안 좋았지만 결국 인심 좋은 트럭운전사를 만나 이곳 무르갑까지 왔다.

 어제 잠들기 전 10달러와 15소모니로 어떻게 중국 국경까지 갈지 고민을 했었는데 오늘은 한 푼도 안 썼다.. 아.. 생각해보니 타지키스탄에서 한 번도 숙박업소에서 안 잤다. 어제의 희망이 현실화 되다니..

 고생은 좀 했지만 많은 파미르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고 많은 추억들을 거두어 갈 수 있는 여행이다.

 내일은 중국이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타직~중국 국경을 넘는게 험란하겠지만.. 머 어떻게 되겠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편하게 하루를 묵었던 제란다의 여관

이곳은 곳곳에서 온천이 뿜어져 나온다.

온천을 배경으로.. 출발직전..

강에는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도록 나무다리가 세워져 있다.

온천이 용출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양들을 방목 하고 있다.

  제란다의 여학생들.. 외국인이 신기한지 웃으면서 대해 주었다.

제란다에서 바라본 파미르 하이웨이.. 고개 정상은 4200미터가 넘는다.

  파미르하이웨이 국토순례 시작.. 시작 순간 찍은 제란다 마을

  도로변 옆에는 풍부한 유량의 강물이 흐른다.

세면을 하는 모습.. 목이말라 물도 마셨다.

세수할 때 바라본 다리의 모습 2개중에 하나는 거의 파괴되었다.

저 멀리 설산이 보인다.

뒤를 돌아봤다. 길은 완만한 경사이다.

  히치한 트럭에서 소년과..

파미르하이웨이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져 있다.

  고지대라서 그런지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위의 설산으로부터 흐르는 강이 보인다.

  정상부근에서 바라본 모습.. 끝없는 고원이 펼쳐진다.

  트럭이 지나가다 마주친 승합차.. 고장이 나서 장시간 고치고 있는 중이다.

  트럭위에서 바라본 풍경.. 높은 지대라 산꼭대기만 조금씩 보인다.

트럭뒤는 이렇게 흙먼지가 풀풀 날린다.

  끝없이 이어진 길.. 진정한 파미르의 모습이다.

 저 멀리 파미르의 상징인 마르코폴로 산양 동상이 보인다.

 이렇게 오지속의 오지에도 전봇대가 있다. 전기는 현대에 있어서 필수품이다.  

간혹가다 마주치는 집들.. 많지 않은 숫자이다.

긴 고원길을 지나 내리막길 시작.. 경사는 완만하다.

고원부터는 거의 사막지역이다.

  저 멀리 호수가 보인다.. 주변에 하얀 소금이 보인다.

  좀더 가까이에서 본 모습.. 2개의 호수가 있다.

끝없이 이어진 아스팔트길이 보인다.

  소금호수 지대.. 따가운 햇볕 탓인지 삭막하게 느껴졌다.

 아스팔트는 몇십년 동안 보수가 안된 듯 심하게 균열되어 있다.

 소금호수가 아닌곳에는 간간히 식물들이 보인다.. 전체적인 공기가 매우 건조했다.

  저 멀리 알리출 마을이 보인다.

  마을 한가운데 흐르는 실개천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경찰과 식당 아줌마와 함께

 알리출 마을의 전경.. 생기가 없고 왕래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주인 아줌마와 딸.. 딸은 나와 동갑이다.

  알리출 마을 근처.. 저 멀리 검은색 야크가 보인다.

  알리출 마을.. 파미르 하이웨이가 쓸모없게 된 지금 마을은 활기를 잃고 점점 소멸해가고 있다.

배고픔에 지친 듯 낯선 사람을 아무생각 없이 지나치는 개

  트럭을 배경으로 동갑내기 여인과 그의 아버지인듯한 사나이와 한컷~

  미국 국기를 모자삼아 쓴 파미르 아이.. 과연 미국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까?

알리출에서 함께 트럭을 탄 파미르인들..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드문드문 초원지대와 저 멀리 설산에 깊게 패여 있는 계곡들

 알리출을 지나자 그나마 초록이 보였다

  끝없이 이어진 길.. 이길의 끝은?(아마 키르키즈까지)

저 멀리 유목민들의 텐트가 보인다.

여기에는 그나마 물이 있기에 유목민들의 삶을 지탱할 수 있다.

 트럭위에서는 바람을 맞아야 했다.. 석회물질이 들어간 물로 머리를 감아서 머리카락이 뭉쳐 있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하이웨이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파미르 하이웨이는 구소련 해체이후 죽은 도로이다. 이날도 거의 다른 차량을 보지 못했다.

  거의 평지와 마찬가지라서 도로는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저 멀리 봉우리가 특이하다.

무르갑이 가까워지자 큰 산맥들이 앞을 막고 있다.

 알 수 없는 신분의 사나이와 함께.. 군인은 아닌 것 같다.

  무르갑으로 향하는 검문소.. 비교적 허술하다.

  검문소에서 만난 파미르인들과.. 자세히 보면 군인같기도 하다.

  무르갑이 가까워지자 계곡이 보인다. 마치 서부티벳 쟈다 토림을 보는듯

 파미르 하이웨이를 보면서 웅장하고 다양한 지형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무르갑.. 구소련때 물류도시로 번창했지만 파미르 하이웨이가 거의 죽은 이후 점점 쇠퇴해가고 있다.

 오늘 나를 쭉 데려다준 트럭.. 시동을 거는 모습.. 과연 몇 연도 차 일까?

무르갑 시내.. 사람도 아예 보이지 않고 한산하다.

무르갑의 민가.. 인구가 4000명 정도 된다.

한눈에 보기에도 빈집이 많다. 여름인데도 영하 20도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언덕위에서 바라본 무르갑.. 이곳을 찾은 한국인은 과연 몇이나 될까?

열심히 론니 중앙아시아편을 보는 의사 그로스.. 외부세계에 대한 동경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타지키스탄 여행기 5 (한국인 최초로 타직~중국 국경넘기 04.8.9)

8월 9일(월)

 글로스의 배려로 이불 2개를 덮고 자서 그런지 무척 편하고 따뜻하게 잤다.

 따뜻함의 유혹을 떨쳐낸채 일어나니 역시 무르갑의 명성답게 차가운 기운이 나의 전신을 강타했다. 그렇지만 이내 해가 뜨고.. 타직에서의 마지막 날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오늘은 타직~중국 국경을 넘는다. 이 국경은 불과 3개월전에 열렸고 국경에 대한 정보는 물론 외국인이 통과가 가능한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국경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기에 더욱 두려웠다. 만약 국경을 통과하지 않게 된다면..? 키르키즈스탄 비자가 없기 때문에 고생하면서 온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만약 다시 두산베로 돌아가는 것은 앞으로 지금까지의 여행에 대한 회의가 들 수 있을 정도로 심한 정신적인 타격이 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오늘 역시 아침은 운전사와 글로스에게 얻어 먹었다. 이렇게 친절하게 손님을 대접해주니 정말 고마울 뿐이다.

 감사함을 표시하고 불확실한 국경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짐을 다 챙기고 고마운 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하자. 글로스는..

 '이미 네 친구인 운전사가 널 태우고 국경 근처까지 가주니까 좀 기다리렴..'

 내심 국경까지 갈 차가 히치가 될까 고민 했었는데 정말로 고마운 말이다. 운전사는 원래 키르키즈인 osh시로 갈 예정이었지만 한국에서 온 친구가 걱정이 되었나 보다.

 오늘은 방향을 바꿔서 타직의 가장 남쪽인 마을로 향한다고 한다. 물론 중국 국경을 스쳐가기 때문에 히치를 할 걱정을 덜은 셈이다.

 아침을 먹은 후 운전사의 사업 파트너들이 찾아왔다. 타직 남쪽 도시까지 갈 사람과 그쪽으로 물건을 보낼 사람들을 모집했는데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인 모양이다.

 이곳의 민족은 정말 다양하다. 5000명도 안되는 무르갑에 타직, 키르키즈, 파미르인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다. 덕분에 아침부터 나를 포함해서 4개 민족이 모여 식사를 즐기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난 말이 통하지 않아 미소만 지었다.

 11시에 트럭은 남쪽을 향해 출발 했다. 출발 직전 기름을 넣고 사람들을 태웠는데 모기가 무척 많았다. 모기들이 나를 새로운 신제품으로 느껴지는 듯 계속해서 나에게 달려 들었다. 트럭위에서 20~30마리 정도의 모기를 죽였다.

 이렇게 극한곳에서도 모기가 살다니.. 전 인류의 숙원 사업중에 하나인 모기 퇴치가 결코 쉽게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별 생각을 다 하는군.. 그나마 모기가 여지껏 시달렸던 빈대, 벼룩보다는 간지러움이 덜 하다.

 차가 다시 떠나고 무르갑시가 점점 멀어져 갔다. 흙머지를 일으키며 트럭은 사막의 도로를 헤쳐 나갔다.

 파미르를 떠나 어서 중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막상 파미르를 떠난다는 아쉬웠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같이 트럭에 탄 꼬마녀석 하나는 신기한 듯 나를 계속 쳐다본다.

 트럭이 달리는 동안 보이는 차는 오직 앞서 나간 짚차 한대 뿐이다. 오고 가는 차는 그 외에는 한대도 없었다.

 그리고 무르갑을 벗어나서는 완전히 사막지역이기 때문에 만약 운전사가 날 태워주지 않았으면 난 꼼짝없이 사막을 걸어야 하는 극한 상황을 맞이 했을 것이다.

 행운의 여신이 언제나 날 지켜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무르갑시에서 남쪽으로 1시간 반정도 달리자 남쪽길과 동쪽으로 중국 국경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왔다.

 트럭은 친절하게도 중국 국경으로 향하여 5키로 정도를 더 달리더니 검문소가 보이는 지점에서 날 내려준다.

 이제 또 다른 은인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는가?

 어제 제란다에서 히치를 해서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돈 한푼 받지 않은채 손님으로서.. 아니 진정한 친구로서 대해준 운전사.

 다시 만나기 힘들다는 것을 서로 알기에 오랫동안 포옹을 하고 아쉬워했다. 어떻게 살던지 간에 잘 살았으면 한다.

 트럭은 다시 떠나고 난 한 할아버지와 함께 국경 초소로 갔다. 국경초소가 보이기는 하지만 아스팔트 길을 30분을 걸어서 닿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국경에서부터는 단단히 대비를 해야 했다. 자칫하면 바꾸를 당할 수 있기에 단단히 작전을 세웠다.

 더군다나 국경 수비대들이 썩을대로 썩어서 외국인에게 돈을 뜯는다는 것은 여지껏 경험으로 예상이 가능했다.

 지갑에는 5달러와 15소모니만을 남겨 두고 나머지 1405달러는 비밀 주머니에 단단히 숨겨 두었다.

 검문소에 가자 2명의 파미르 군인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내 배낭을 단단히 검사를 하고 비자, 허가증을 까다롭게 검사를 한 다음 타고온 차는 없나고 물어본다.

 이곳 검문소에서 국경이 32킬로나 떨어져 있기에 걸어서 가는것은 불가능 하고 통과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검문소에는 중국 정부에서 보내준 명단이 있는데 그 명단에 있는 외국인만 통과 시켜줄 수 있다고 한다. 명단을 보니 중국인 이름만 적혀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이군..

 그들은 다시 호러그로 돌아가서 비행기를 타고 두산베로 간 후 다시 비행기를 타고 중국 우루무치로 가라고 한다. 역시나 외국인이 아직 넘지는 못하는구나..

 아.. 눈 앞이 깜깜하다..

 그래도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지..

 이제부터 준비한 작전 개시를 했다. 난 그들에게 난 한국의 대학생이고 지금 돈이 아예 없다고 말했다.

 내 지갑을 다 열어 보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5달러에 15소모니(5달러)가 전부라고 이야기 했다.

 다시 호러그로 갈 수 없으며.. 가지고 있는 신용카드를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중국 타슈쿠르간에서 이것을 쓰면 달러 인출이 가능하기에 꼭 국경을 넘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고민을 하며 연신 전화질을 했다. 아마 내 상황에 대해서 상부에게 보고를 하고 있으리라..

 혹시나 돈이 있을까 싶어 내 배낭을 한번 더 수색을 한다. 다행히 나의 몸은 전혀 수색할 생각을 안 했다.

 수비대는 곤란해 하며 중국 국경을 넘으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데 군용차를 이용하려면 기름값 30달러는 있어야 한다고 했다.(풋.. 말도 안되는 소리..)

 다시 걸어서라도 가면 안되나고 물어보니.. 그건 절대 안된다고 한다.

 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전부이고.. 타슈크르간이나 카슈가르에 가기전에는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 했다.

 국경수비대들과 이미 친해지고 물오른 나의 연기에 깜빡 속은 그들은 계속 전화를 하더니 기쁜 표정으로 국경에서 짚이 올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5달러만 주면 될 것이라고 했다. 순진하게 국경수비대 애들도 나와 함께 기뻐한다.

 휴.. 다행이다.. 일단 하나의 고비는 넘긴 셈이다. 그들은 5달러에 짚을 탈 수 있게한 수고비를 달라고 하기에 15소모니중 10소모니(4000원)를 그들에게 주었다.

 어짜피 소모니는 중국을 넘어가면 소용이 없기에.. 이제 지갑에는 5달러와 5소모니가 남았다.

 30분 넘게 기다리자 국경에서 짚이 왔다. 중국어가 능통한 파미르 장교 하나와 영어가 어설픈 장교 하나가 타고 있었다.

 그들 역시 기름값이 필요하다며 40달러는 줘야 한다고 한다(그새 10달러 올랐군..)

 난 다시 사정을 말하며 배째라고 나왔다. 연기에 어찌나 몰입했던지 내 스스로가 정말로 돈이 없을거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장교들은 만약 중국 국경을 넘더라도 50위엔을 주고 타슈쿠르간까지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갈거나고 묻는다. 난 히치를 해서라도 갈거라고 했다. 그들이 이해가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둥 한다.

 아!! 참!!

 지갑에는 한국돈 25000원이 있었다. 한국돈을 장교에게 보여주면서 이 돈을 타슈쿠르간에 와 있는 한국인과 교환하면 될 거라고 했다. 그들이 환율이 어느 정도냐는 질문에 10000원이 10달러는 한다고 이야기 했다. 더 높게 이야기하면 그들이 가져 갈거 같아서 적절하게 이야기 했다.

 지금 난.. 나의 모든 여건과 상황을 이용해야만 했다.. 다행히 모든게 맞아 떨어졌다.

 내 모든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다행히 이미 친해진 수비대들이 옆에서 말을 잘 해줘서 짚차를 탈 수 있었다. 얏호~ 1차 관문 통과다. 일단 다시 두산베로 갈 일은 없게 되었다.

 엇.. 그런데 달리던 차는 다시 검문소로 향한다.. 휴.. 알고보니 나와 같이 탄 노인이 여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검문소에서 출발.. 너무나 긴장이 되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들은 나의 여권을 계속해서 뜯어본다. 흔치 않은 외국인이 신기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건지.. 아프간~타직 국경을 넘을때 비자에 여권번호가 잘못 적혀 있어 고난을 치룬 나로서는 불안했다.

 난 론니를 그들에게 건네며 이 책도 읽어보라고 했다.

 짚차는 고장이 자주 났고 느리게 갔다. 중국 국경이 닫힐 시간이 1시간 반 밖에 안 남았다는데. 불안하지만 이렇게 까지 온 이상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32킬로를 달려 타직 국경에 도착했다. 콧수염 장교에게 지갑의 전부인 5달러와 5소모니를 주었다. 이제 지갑에는 한푼도 없었다.

 중국과의 국경에 철조망이 있었고 양옆에 컨테이너 건물 2개가 있었다. 다른 국경과 달리 러시아 군인들이 있는것 같지 않았다.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러시아 군인이 있지 않는 한 이들 역시 한 통속이리라..

 왼쪽의 컨테이너에 먼저 들어갔다. 거기서는 짐 검사를 하는 모양인데.. 2번이나 까다롭게 검사를 한다. 아마 돈을 숨겨뒀는지 찾으리라..

 그들은 노트북을 꺼내 보이며 왜 신고를 안 했냐고 물어본다. 역시.. 트집을 잡는다.

 난 대수롭지 않게 아프간에서 넘어올때 러시아 군인들이 노트북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으며 믿지 못하면 그쪽 국경에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내말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몸 수색에 대비해서 이미 비밀주머니에 있는 달러를 입고 있는 체육복 잠바 속주머니에 옮겼다.

 체육복 역시 수색을 당할 확률이 크므로 속주머니에 있는 달러뭉치 위에 파키스탄 루피 지폐를 살짝 올려놓았다. 만약 걸릴경우 루피를 꺼내서 그들에게 보여줄 참 이었다.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루피 지폐가 이렇게 결정적으로 쓰일줄이야..

 다행히 몸수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돈 없이 어떻게 여행할거냐는 질문을 했다. 난 신용카드를 보이면서 이걸로 카스에서 300달러 베이징에서 500달러 환전이 가능하다는 그럴 듯한 거짓말을 했다.

 모든 말과 행동이 수긍이 간듯 그들은 배낭에 짐을 다시 넣으라고 한 뒤 바로 옆 오른쪽 컨테이너로 가라고 한다.

 오른쪽 컨테이너는 그야말로 이곳 국경의 최종 관문이다.

 여기서 스탬프를 받고 중국 국경으로 넘어가면 끝이다.. 이제 막바지.. 정말로 힘겹다.. 머리가 아플 정도이다.

 오른쪽 컨테이너에는 아까 같이 차를 타고 온 콧수염 장교과 영어가 조금 되는 장교를 비롯해 3명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 컨테이너에 있던 2명도 다시 이리로 들어 온다. 5명대.. 나 1명..

 그들은 나를 짚차를 태우면서까지 여기로 날 데려와서 5달러 밖에 못 뜯어 낸게 못내 억울한 모양이다.

 영어가 조금 되는 장교가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짐을 수색해야겠어'라고 나에게 말하며 짐승처럼 내 배낭에 달려든다.

 마지막 관문이라는것을 실감하라는듯 나에게 호의적인 콧수염 장교를 제외하고 모두들 짐승처럼 달려들어 내 짐을 꼼꼼히 검사한다.

 옷가방과 짐들을 하나하나 완전히 풀어서 검사를 한다. 이미 5번째 짐 검사이다.. 정신적으로 너무나 지칠대로 지쳤다..

 태연한 표정으로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발 나의 몸만은 건들지 않기를 속으로 바라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행운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 빌었다.

 짐 검사를 마친 군인들이 나의 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의 몸을 수색하면.. 정말 끝장이다..

 아.. 여기서 1400달러가 걸리면... 총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고 여지껏 철저하게 그들을 기만했기에 이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까 고민을 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영어가 능통한 장교가 나에게 먼가 말을 할려는 찰나..

 나에게 호의적이고 다른 군인들과 함께 내 배낭을 뒤지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던 콧수염 장교가 군인들에게 시계를 가르키며 머라고 외치며 내 배낭을 끌고 문 앞으로 간다.

 시간이 날 살리는구나.. 정말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선임자로서 선량한 외국인 대학생에게 짐승처럼 달려드는 부하들이 속으로 마음이 아팠으리..

 군인들은 나에게 카슈가르까지 짚차를 태워줄테니 자신들과 약속을 하자고 한다. 그러면서 100~200달러를 요구한다. 휴.. 갈때까지 갔군..

 카스까지 가고 그들에게 돈을 건네려면 중국 군인과 연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뇌물을 받으면 사형인 중국 형법을 알고 있기에 난 천연덕스럽게 답변을 했다.

 난 학생이라고 강조하며 정말로 지금 돈이 있으면 너희들에게 돈을 주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그들은 이내 포기한다.. 아마 마지막으로 나에게 돈이 있는지 찔르는 것이리..

 내 여권에는 출국 스탬프가 찍혀지고 타직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콧수염 장교가 나와 함께 중국 국경초소로 가더니 자고 있는 중국 군인을 깨운다.

 만약 여기서 몸수색을 해서 가지고 있는 돈이 들통난다면..

 중국 군인은 여권의 중국 비자를 확인하고 길따라서 5킬로 정도 더 가라고 했다. 거기에서 입국 심사를 하는 모양이다.

 콧수염 타직 군인이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나도 헤어져서 아쉽다는 표정을 했지만 속은 무한정한 기쁨이 몰려오고 있었다.

 난 언덕밑으로 내려가고.. 타직 군인이 안 보일 무렵..

 와!!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기적적으로 국경을 통과했다. 몇 시간동안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 머리가 아팠다.

 '와 성공이다... 만약 두번 이 짓을 하라면 절대로 못해.. 절대로...'

 꼬옥꼭 잘 숨어 있던 달러를 다시 세아리며 나를 지켜준 행운의 여신에게 정말로 감사했다.

 주변에는 설산과 초원이 펼쳐져 있었으며 저 멀리 목동들이 야크를 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4킬로정도 내려가자 컨테이너 초소가 보였다.

 중국 군인은 4명이 있었는데 친절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 그들에게 한국인이 이곳을 통과한적이 있냐고 물어보니 한국인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여행중국어와 한자.. 그리고 바디랭귀지를 섞어 그들과 이야기 했다.

 처음 보는 한국인이 신기한지 그들은 환영한다며 호의적으로 대해주었고 목이 마르다고 하니까 얼른 따뜻한 물을 대령한다.

 중국 군인에게 아시안컵 결과를 물어 보았다. 결승에서 일본에게 패했다고 하고 한국은 이란에게 졌다고 한다.

 한국이 진것을 알고는 있지만 일부러 실망한 표정을 하자 군인들은 월드컵때 잘하지 않았냐며 위로를 아끼지 않는다.

 이곳 초소에서도 짐검사를 했다. 정중하게 미안하다며 짐검사를 하는 장교에게 협조를 하며 짐검사에 임했다.

 그들은 내 몸수색도 했는데 그들을 믿고 주머니에 있는 달러를 보여 주었다. 장교는 달러를 보더니 잃어버릴지도 모르니 얼른 집어 넣으라고 한다.

 짐검사를 마치고 그들은 환영한다며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리고 나를 짚차에 태워 국경 사무소까지 데려다 주었다.

 오늘 이곳을 넘은 유일한 외국인이라 사무소 직원들도 흥미로운듯 나에게 모여든다. 순간적으로 스타가 되었군^^

 간단한 짐검사와 공안의 입국목적 심문을 받은 후 버스에 올랐다.

 이곳 국경은 타슈쿠르간까지 100킬로 떨어져 있다. 생각보다 많이 떨어져 있네..

 국경사무소직원들 대부분의 타슈쿠르간에 살면서 이곳 국경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버스운전사가 나에게 타슈쿠르간까지 50위엔(7500원)을 주라고 이야기 한다. 난 중국돈이 없어서 5달러(6000원)와 파키스탄루피 100루피(2000원)을 주면 안되냐고 물어 보았다. 운전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커이(좋아)하고 대답한다.

 파미르 첫 여행기에 내가 호러그에서 출발을 했을때 과연 내가 15달러와 15소모니로 버틸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는데 절묘하게 그 돈이 맞아 떨어졌던 셈이다.

 버스가 가는동안 낯익은 풍경을 보며 고된 하루를 정리해 보았다. 정말로 힘들기는 하지만 커다란 성취감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하루이다.. 머리가 지근거리는게 신경쓰이기는 하지만..

 벌써 3번째 오는 카라코람 하이웨이..

재작년 파키스탄 입국에 실패해서 되 돌아왔고 작년 서부티벳 여행 후 파키스탄으로 넘어갔고.. 이번에 세 번째..

 차는 2시간정도 달리더니 타슈쿠르간에 도착했다. 교통빈관 10위엔(1500원)..

 방에 가니 일본인 2명이 있었다. 그들이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자랑스럽게 타직에서 바로 넘어왔다고 이야기 했다.

 그들은 그런 여행에 대해 들어본적이 없다면서 무척 놀라워 한다.

 이것저것 물어보며 흥미로와 하길래 지금은 여행자 씨가 마르다시피 한 아프간 여행과 타직 파미르 여행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 해주니 그들은 '스고이(대단해)~'를 연신 외치며 내 이야기에 열중을 한다.

 영어가 그나마 되는 일본 청년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한다.

 '넌 전문 여행가이니? 아니면 대학생이니? 그런 크레이지(미친)한 여행을 한 넌 직업이 머야?'

 일본인답지 않게 상대의 직업을 묻기에 난 웃으며 이야기 했다.

 '아니..^^ 그냥 방학을 맞이한 한국의 초등교사야..'

어제부터 나를 트럭에 태워준 운전사(가운데)와 친절한 파미르인 사나이와 함께

  내가 탄 고물 트럭.. 그래도 이 트럭 덕분에 파미르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언덕에서 바라본 무르갑 시내.. 황량하지만 낮이 되니까 간간히 사람들이 보였다.

 휘발유 가게.. 기계가 없어서 철저하게 손으로 기름을 나른다.

  무르갑을 빠져 나오는 순간.. 인구 5000명이 되는 소규모 도시이다.

  함께 탄 파미르인들.. 각자 사연을 안고 트럭에 탔다.

  중국 국경으로 가는길.. 어제 달려왔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 멀리 철조망과 초소가 보인다.. 이곳은 길도 잘 닦여 있다.

  쭉 이어진 철조망.. 자세히 봐야 보인다.

 건문소 군인들과.. 이들에게 샹냥한 미소로 대해서 그런지 친해질 수 있었다.

  중국측 텐트.. 국경 건물을 만드는 인부들이 사용하는 듯 하다.

 중국 국경을 통과하고.. 뛸 듯이 기뻤다.

  국경초소.. 중국 군인들은 낮 잠을 자는 중이었다.

  중국쪽 파미르.. 한국인 최초로 넘은 곳이다.

  저 멀리 까만 점이 야크떼이다.

  설산과 구름이 아름답다.

  타슈구르간.. 2년사이에 이곳이 3번째이다.

  같은 방을 쓴 일본인들과.. 이미 난 영웅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