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여행기 4 (하카를 찾은 최초의 외국인 여행자 'miracle park(기적의 박) 05.1.26~27)  

1월 26일(수)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오전 7시가 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버스 출발 시각까지 30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네..

 부랴부랴 게스트하우스 밖으로 나가니 2일전 나를 하카행 버스오피스로 인도해줬던 자전거 운전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 6시 반에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다.

 거리에 비해 비교적 비싼 1000짯(1000원)을 불렀지만 6시 반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운전자를 생각해서 웃으며 승낙했다.

 하카행 버스는 여지껏 타던 VIP 버스와는 달리 완전 미니버스이다. 이곳에서 하카까지는 2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맙소사.. 난 죽었다.

 사람도 많이 타지만 짐도 정말 많이 싣는다. 운전자는 짐 무게를 재서 초과되는 무게에 대해 초과 요금을 더 받는다.

 외국인인 내가 배낭을 주니 운전자는 무게를 재더니 무사통과.. 어? 외국인인 내가 가도 되는 거야?

 버스는 예정시각보다 30분 늦은 8시에 출발을 했다. 버스 천장을 비롯해서 버스의 바닥도 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때문에 다리를 의자 밑으로 뻗지 못하고 무릎을 가슴으로 모아야 하는 한마디로 태아와 같은 자세로 이 험한 길을 가야만 했다.

 정말로 다행인 것은 내 바로 앞은 출입구가 있어서 다리를 뻗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이마저도 다른 사람이 타기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한자세로 지속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최악이다..

 매번 여행을 하면서 버스나 기차를 탈 때마다 최악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처음 실크로드 여행(2002년 여름)때 북경에서 시안까지 17시간 침대 기차가 최악이었던 것이..

 간단하게 중국 꺼얼무에서 티벳의 수도 라싸를 향해 고산병에 걸리며 히치해서 탔던 트럭에게 타이틀을 넘겨주었고, 그 뒤 동티벳 참도에서 성도까지 비포장 60시간 침대 버스가 최악이었다가 성도에서 청도까지 40시간 잉쭈어(딱딱한 의자) 기차가 최악으로 변했다.

 해를 넘겨 중국 춘절 기간 중 3박 4일 동안 상해에서 쿤밍까지 탄 잉쭈어가 최악이지만 그해 여름 라싸에서 서부티벳 알리까지 5박6일간의 앉은 자세로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했던 얻어 탄 우체국 차에게 또 타이틀을 넘겨준다.

 한동안 타이틀을 유지하던 우체국 차는 작년 여름 언제 저격당할지 모르고 언제 로켓 폭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야말로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불안에 떨어야 했던 파키스탄 폐샤워르~아프간 잘랄라바드~카불(이 구간은 지금도 외교부 홈페이지에 절대 여행하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음)구간에게 타이틀을 넘겨주었다. 단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나마 영어가 통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는 것.

 이제 또 최악이라는 타이틀을 미얀마 만달레이~하카 구간의 미니버스에 넘겨줘야 한다.

 표현은 이렇게 하지만 버스에 탄지 30분도 안 되어 몸이 뻐근하고 한마디로 정말 괴롭다.

 버스가 만달레이를 벗어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많은 검문소가 나타났지만 검문소가 나타나서 서행을 할 때면 운전사 보조는 얼른 뛰어가 돈을 검문소 경찰에게 쥐어준다.

 만달라이에 벗어나서 딱 한번 내려서 검문을 받았다.

 이왕 걸린 것 떳떳하기라도 해야지.. 난 오히려 경찰에게 먼저 다가가 한국인이라고 밝히고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외국인의 출현에 놀랐는지 경찰들은 내 여권을 보더니 미얀마 비자를 확인하고 내 짐 검사를 한다고 했다.

 저자세로 나가되 거부할건 거부해야지.. 난 경찰이 외국인의 짐을 검사할 권리가 없다고 이야기 했다.

 그들도 알아듣는 듯 짐 검사를 포기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오히려 트집 잡힐 것 같아서 웃으면서 내가 들고 있는 봉지를 그들에게 주었다. 봉지 안에는 담요와 세면도구 밖에 없었다.

 당당한게 먹힌걸까? 그들은 내 여권번호를 적더니 날 통과시켜준다.

 버스 안 승객들도 경찰에게 당당한 나의 모습에 놀라워한다.

 검문소를 지나 버스는 조금 달리더니 다시 멈춘다.

 한 아저씨가 일어나서 말을 시작하니까 버스 안의 모든 승객들은 고개를 숙인다.

 ‘아멘..’

 어? 기도하는 건가? 목사님인 듯한 아저씨의 말투도 우리나라에서 기도하는 말투와 비슷하다.

 불교국가에서 이렇게 독실한 크리스찬들이 있다니..

 기도가 끝난 후 목사님에게 물어보니 아까는 버스가 무사히 하카까지 가기를 기도한 것이며 친족은 대부분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불교국가인 미얀마에 독실한 크리스찬들이 있다니.. 놀랄 일이다.

 버스는 평지를 계속 달리다가 산악지역에 진입을 한다. 똑같은 자세로 있어야 했기에 괴롭기는 했지만 가끔 몸을 비틀고, 가끔 버스가 정차할 때에 바깥으로 나와 최대한 많이 움직여서 몸을 풀어준다.

 하카로 가는 도로는 포장이 안 되어 있고 폭이 좁지만 다른 차들이 거의 없어 멈추지 않고 갈 수 있다. 단지 너무 많은 짐을 실을 탓인지 언덕을 갈 때에는 꽤 힘겹다.

 버스 기사는 미얀마 가요를 틀어주었는데 그 노래들이 재미있다. 이 곳 노래는 유명한 팝송이나 우리나라 가요를 자신들의 언어로 가사로 바꿔서 부르는데 반주마저 똑 같기에 재미있다.

 우리나라도 60~70년대에 유명 외국곡을 우리말 가사로 변환 시켜 부른 적이 있다고 한다.

 내 옆에 앉은 청년은 미얀마 가요를 따라 부르는데 한번은 ‘we are the world' 반주가 나오기에 영어로 노래를 불러주니 무척 신기해한다. 어떻게 자기나라 가요를 부르는지 궁굼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아까 기도를 했던 목사님이 테입을 기사에게 주면서 틀어보라고 한다.

 노래 대신 목소리가 나오는데 아무래도 유명 목사님의 설교인 듯 하다. 그런데 설교중에는 계속해서 ‘코리아’라는 단어가 나온다.

 설교가 재미있는지 사람들은 가끔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정차 했을 때 목사님에게 테이프 설교 내용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목사님은 한국의 배울 점에 대한 설교라고 하면서 이곳 사람들에게 한국은 유럽의 한 나라와 마찬가지로 잘 사는 나라로 인식이 되어있다고 한다.

 내가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들은 이야기 중에 하나는 바로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잘 사는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의 질서 의식이나 습관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이곳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배우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이 일본보다 한국을 더욱 높이 평가하는 것은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 했으며 또한 30~40년 전만 해도 이곳 미얀마 보다 더 못살았지만 지금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된 나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위상이 이렇게까지 올라가다니..

 이러한 위상은 최근 몇 년 동안에 급격히 올라간 것이기에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밤이 되자 기온이 쌀쌀해졌다. 이럴 때 같이 캄보디아 여행을 했던 준구가 귀국하기 전 나에게 남긴 타이항공 담요가 무척 요긴하게 쓰인다.

 버스가 어서 하카에 도착하기를 바라며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1월 27일(목)

새벽 6시가 조금 넘어서 잠에서 깼다.

 버스는 여전히 비포장도로를 느릿느릿 달리고 있었다. 구부정한 자세로 계속 있었기에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지만 지금은 추위가 더 문제이다.

 옆 사람의 체온에 의지해서 버티고 있을 때 창 밖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아..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오전 7시가 되자 저 멀리 하카가 보이기 시작했다. 산등성이에 위치한 하카는 한주의 주도로 보기에는 작아 보이지만 아름다운 도시이다.

 하카에 들어서기 전 검문이 있을 줄 알았지만 전혀 없었다. 생각보다 많이 느슨하네..

 버스는 이곳 지역의 유일한 스타디움(스타디움이라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작기는 하지만..) 아래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멈췄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그런데 여기서 멀 하지?

 일단 영어가 통하는 버스승객의 도움으로 하카에서 유일한 호텔에 묵게 되었다. 호텔 주인아줌마는 외국인은 처음 보는지 당황하는 표정이다.

 처음 하루에 6000짯을 부르던 것을 간단하게 3000짯으로 깍았다. 호텔 수준을 볼 때 3000짯 이하로도 깍을 수 있지만 모처럼 만의 손님일텐데 매정하게 하기는 싫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세면을 하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버스 안에서 잠을 많이 자기는 했지만 그게 어디 제대로 잔 것인가..

 잠들려고 한 순간 아줌마가 날 깨운다. 이곳 경찰이 날 찾아왔다는 것이다.

 경찰은 정중하게 내 여권의 내용을 적으면서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헤어질 때 내가 악수를 청하자 두 손으로 고개를 쑥이며 악수를 한다.

 경찰이 가고 나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제는 정말 자야지..

 하지만 주인아줌마는 다시 날 깨운다. 이번에는 이민국(immigration)에서 왔다는 것이다.

 거 참 사람 귀찮게 하네..

 이민국 직원은 정중하게 나에게 인사를 하고 내 여권을 보면서 이것저것 적어간다.

 직원에게 나 말고 한국인이 이곳에 온 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대답은 no.. 그럼 일본 사람이 온 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역시 ‘no'

 내가 일본 사람을 물어보는 것은 일본 여행자에 대해 묘한 라이벌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이 일찍이 발달한 일본은 세계에 일본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여행지 정보가 있는데 한국인 역시 여행정보가 없으면 일본 정보를 보게 될 정도이다.

 난 이들을 뛰어넘고 싶다. 적어도 ‘한국에도 이런 여행을 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의식을 일본인 여행자에게 심어주고 싶었고, 실제로 몇몇 여행은 일본인 여행자들이 인정할 정도로 빡센 여행을 했었다.

 음.. 이야기가 잠시 딴데로 샜군..

 이민국 직원이야기로는 외국 여행자가 이곳에 온 것 자체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아.. 그래서 경찰과 이민국 직원이 당황 하고 있구나.

 이민국 직원 역시 최대한 정중하게 날 대해준다. 내가 무슨 VIP인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호텔 주인아줌마는 혹시 사람이 계속 찾아오면 내가자는데 방해가 되니까 여권을 자기에게 맡기면 안되냐고 물어본다.

 호의는 고맙지만 절대 안 될 소리.. 만약 지금 여권을 이곳에서 잃어버리면 난 다음달 학교 개학(2월 14일)에 맞춰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 할 것이고, 그럼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의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고(라면 뽀글이..) 주인아줌마와 함께 버스 오피스에 가서 버스편을 예약했다. 내일 아침 버스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빠듯하고, 그 다음 버스는 다음주 월요일에 있어서 월요일 버스를 예약(7000짯)했다. 이곳에서 4일을 있어야 하네..

 호텔에 다시 돌아와 부족한 수면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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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2시 다시 일어났다.

 추웠던 아침과는 달리 낮은 포근하다 못해 더운 편이다.

 하카를 쭉 둘러보기 위해 호텔을 나서니 저 멀리 큰 교회가 보였다.

 교회에 가니 1899~1999라는 간판이 보였다. 바로 이곳의 선교의 역사를 기록한 간판인데 1999년에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운 간판인 듯 하다.

 교회를 벗어나 시내중심을 걸었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날 쳐다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못했고, 만달라이에서 온 특이한 복장의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길가에 한 집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하는 거지?

 놀랍게도 길에서 목사님의 설교 테입을 틀어놓고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사람들의 신앙심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한 카페에 들어갔다. 슬슬 배도 고프고 이곳 차 문화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자만 있기 심심해서 옆에 대화를 하고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어? 영어를 할 줄 아네..

 할아버지는 외국인이 이곳에 왔다는 것에 대해 대단히 놀라며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연신 묻는다.

 2차대전 때 일본군이 이곳까지 왔었다고 하는데 그때 할아버지는 15살 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의 미얀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역경을 겪으셨고 지금은 사진사를 하면서 황혼을 보내시고 계신다.

 오랜만에 쓰는 영어가 반가웠는지 할아버지는 내 찻값까지 내주시더니(그렇게 안하셔도 되는데..) 자신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손녀를 만나러가자고 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는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내가 누구인지 물어본다. 할아버지는 ‘꼬리아~’라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신다.

 할아버지는 시장에 잠시 들려 찬거리를 사신 후 날 손녀댁으로 안내해 주셨다.

 손녀는 날 보더니 매우 놀라워하면서 능숙한 영어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물어본다. 그녀의 이름은 ‘주디’이고 나보다 한살 많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고 내가 궁굼해 하던 친민족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 또한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집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 동안 많이 답답했는지 미얀마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하카는 미얀마 중에서도 극히 열악한 환경에 있다. 공장이 하나도 없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고 있으며 대부분이 기독교도이기에 불교국가인 미얀마에는 소외를 당하고 있다.

 제니와는 1시간 정도 대화를 했다. 주디는 나와 대화를 하면서 희망을 본 듯하다. 연신 나에게 하카를 방문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면서 내일 자신의 집에 다시 방문해 달라고 한다. 내 대답은 물론 ok..

 호텔에 다시 돌아오니 어둠이 스산하게 깔리고 있었다. 주인아줌마는 어설픈 영어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친척이 영어가 능숙하다면서 같이 친척집으로 가자고 한다.

 하카에는 가로등이 존재하지 않아서 밤에는 후래쉬를 들고 다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때 나처럼 하수구에 넘어질 수도..(어째튼 많이 아팠다...)

 주인아줌마 친척인 스티븐은 능숙한 영어로 반갑게 날 맞아 주더니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문을 잠근다.

 밤에 나를 부르고 문을 잠그는걸 보니 경찰을 의식한 듯 하다.

 그는 나에게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물어본다.. 휴.. 벌써 몇 번째 똑같은 대답을 해야 하는지..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빅뉴스였다. 불과 몇 달전까지만 해도 만달레이에서 하카까지 오기위해서는 수많은 체크포인트(검문소)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최근에 잠시 느슨해 졌는데 그때 내가 이곳에 온 것이다.

 여행자에게는 어둠만이 쫙 깔린 이곳에 단 한줄기의 얇은 빛을 타고 한국인인 내가 들어온 것이다.

 스티븐도 제디와 마찬가지로 외부세계에 대해서 많이 궁굼해 했다.

 현재 동남아는 정치적 안정과 개방에 맞물려 급격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서로들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있고, 경제 발전과 맞물려 개개인의 소득수준도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오직 한 나라만이 제자리에 머물고 있으니.. 바로 이곳 미얀마이다.

 스티븐은 한숨을 쉬며 어서 미얀마의 문이 열리기를 매일 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영어가 뛰어난 스티븐이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개개인의 능력이 삶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국가의 역량이 따라줘야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스티븐 역시 다시 자신의 집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한다. 난 그러겠다고 말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카는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고 하카자체가 어두운 분위기라 별은 정말로 빛났다.

 별은 하늘아래.. 즉 지상이 어두워야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이곳 미얀마도 그런걸까? 아래 민초들의 삶이 어렵고 어두울수록 미얀마의 별(장군)들은 더욱 빛나게 되겠지?

만달라이에서 출발직전 찍은 사진.. 탁발을 나가는 스님의 모습

  이 버스가 만달라이와 하카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버스이다.

  하카까지 가는 길은 200킬로가 조금 넘지만 무려 22시간이 걸린다.. 끝없이 이어진 열악한 아스팔트길

  산악지역에 들어서기 전에는 사방이 평지이다.(사막과 비슷하기도 하다.)

  산악 지역 사람들의 집.. 짚과 나무로 지어져 있다.

  산악지역은 경사가 심하기 때문에 이처럼 집이 공중에 떠이씩도 하다.

 저녁을 먹었던 마을 거리.. 아직까지는 미얀마족인 듯 하다.

  깜찍한 친민족 여자 아이.. 우리나라 어린이와 비슷한 외모이다.

  하카를 얼마 안남기고... 버스안에서 밤을 새고나니 저 멀리 동이 트고 있다.

  버스위는 물론 좌석까지 짐이 한가득 하다.

  하카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건물.. 친스테이트에서 가장 큰 밥티스트 교회이다.

  평화로운 하카.. 나는 1966년 이후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외국인이 되었다.

  동이 틀 무렵의 하카.. 산등성이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버스안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목사님과 함께.. 난 아침기온이 쌀쌀해서 비행기 담요를 걸치고 있다.

  하차를 하고 물건을 내리는 모습.. 승객들의 가족인듯한 많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아마 외부세계에 대한 소식을 묻는 듯 하다.

  호텔 아줌마가 갖다 준 화로..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은 볼 수 없는 물건이다.

  친스테이트 선교 100주년인 1999년에 세워진 비석.. 이 지역은 100년이 넘게 기독교를 간직하고 있다.

  굴렁쇠 비슷한 것을 놀이기구 삼아 노는 아이

  마을의 작은 교회.. 하카 곳곳에는 많은 교회가 있다.

  하카 전경.. 인구는 2만명정도이고 친스테이트 수도이다.

  이곳의 유일한 생산수단은 농업이다. 넓은 지역에 논이 분포해 있다.

  하카 중심부 거리.. 차가 거의 없다.

  이곳 사람들의 생활 자체가 기독교이다. 거리에서 확성기를 통해 녹음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하는 하카사람들

  하카의 유일한 시장.. 다양한 식료품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나에게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탄압을 당했던 이야기를 하며 회한에 잠긴 할아버지.

  시장안의 정육점. 고기의 무게를 재는 저울의 모습이 이채롭다.

  시장안에서 할머니와 나.. 할머니의 외모가 우리나라 할머니의 모습과 흡사하다.

  두아이를 데리고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 친지역 여인들은 생활력이 강하다로 한다.

 제니의 집안 부엌의 모습.. 허름하지만 잘 정돈되어 있다.

  제니의 집안.. 기독교를 생활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2층이 제니의 집이다.

  내가 머물렀던 하카의 유일한 호텔.. 주인아줌마가 꽃을 좋아해서 많은 꽃들이 심어져 있다.

  스티븐과 나.. 갖힌 사회인 이곳에서 스티븐은 외부세계에 대한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친민족 전통옷을 입은 나의 모습..(잘 어울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