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여행기 5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 하카 05.1.28~29)  

1월 28일(금)

 하카의 밤은 비교적 춥다. 때문에 이불을 2개 덥고 자도 일어날 때 보면 몸을 움츠린 채 깨게 된다.

 이불속의 온기의 욕구가 나의 활동을 막으려고 했지만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일어났다.

 오늘 첫 일정은 어제 만난 주디에게 가는 것..^^

 주디의 집에 가니 주디는 이곳에 돌아볼만한 곳을 소개해준다면서 주디의 여동생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하카를 둘러보라고 한다.

 20살인 여동생은 이름이 제시이다. 이상하게 이곳 사람들은 나에게 소개를 할 때 영어 이름을 대는데 아무래도 기독교의 영향이 아닌지 싶다.

 제시는 한국 청년과의 데이트가 설레였는지 옷도 잘 차려입고 화장까지 한 모습이다. 예기치 않게 미인과 데이트를 하게 되다니^^

 제시가 오토바이로 가장 먼저 날 데려다준 곳은 친민족 박물관이다. 박물관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작은 건물이기는 하지만 민속 공예품과 몇몇 사진을 통해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 있었다.

 ‘기독교가 사람들은 많이 변화시키기는 했구나..’

 박물관을 빠져나오는 순간 어디선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구나.

 순간 초등학교임을 알 수 있었다. 초등교사인 나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초등학교 건물에 들어가 교장선생님에게 허락을 받고 수업하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휴.. 그야말로 열악 그 자체이다.

 거의 다 낡아빠진 건물 그것도 각 학년마다 칸막이조차 없어서 옆교실에서 수업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과서 역시 부실했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수업하는 칠판도 거의 다 떨어져나갔다.

 열악 그자체이다.. 우리나라 6.25 직후 천막을 쳐 놓고 공부를 했던 시절이 있다고 하는데 그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동남아에서는 최빈국인 미얀마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 지역은 이렇게 교육 인프라마저 열악했다.

 학교를 구경하고 제시는 근처의 교회에 날 데려다 주었다.

 하카 지역에는 18개의 교회가 있으며 하카 시내에 5개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구역별로 교회를 정해서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예배를 본다고 한다.

 내가 간 곳은 자이언트 교회이다.

 목사님은 날 보자마자 매우 놀라면서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묻는다.

 목사님한테 이곳 기독교 역사에 관하여 들을 수 있었다. 1899년 미국인 선교사가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그 뒤 6대까지 내려오다가 마지막 선교사가 1966년에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그 이후 친사람 스스로 필리핀, 인도 등지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다시 이곳에 와서 목회 활동을 하는 실정이다.

 친민족은 따로 문자가 없지만 미국인 선교사들이 만들어준 영어식 문자를 이용한다고 한다. 덕분에 자신들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책을 가지고 있다. 성경책은 하카에서 얼마 안 떨어진 제작소에서 만들어진다.

 목사님은 나에게 바깥소식에 관해서 나에게 묻는다. 난 외부 세계는 지금 급격히 변하고 있고 미얀마 역시 그 변화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이라고 했다.

 자이언트 교회를 떠나서 간곳은 친스테이트에서 가장 큰 밥티스트 교회이다. 이 교회는 미국인 선교사가 직접 지었으며 지금의 모습은 1969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3000명의 신자를 거느리고 있으며 10명의 목사가 있다.

 이곳 목사님 역시 날 보더니 매우 놀라워한다.

 목사님은 ‘우리는 미얀마가 열리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열악하게 사는지 설명해 주셨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고, 정부의 압박 때문 많이 시달린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외부와의 접촉이 끊겨 있어서 이곳의 모든 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친민족 인구는 대략 50만정도 된다고 한다. 놀랍게도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이다.

 한 지역의 신자가 95~96%가 되는 곳은 전 세계를 찾아보아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든 통계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선교 활동으로는 2위를 차지한다는데.. 혹시 한국의 교회에 알리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혹시나 싶어서 목사님에게 한국 교회에 전할 편지라도 써달라고 했다.

 목사님은 친스테이트의 교회의 역사와 지금의 실정.. 그리고 지원이 필요한 항목들을 정리한 프린트를 나에게 주셨다.

 내가 목사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희망을 가지라는 것이다. 열악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 하는 목사님의 고뇌를 볼 수 있었다.

 교회를 나오자 제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서로 미소로서 묻고 대답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 문서를 어디다 전해줘야 하지..

 문서를 한국의 교회에 전해준다고 했는데.. 일단 어제부터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지만 경찰들이 날 계속해서 감시를 하는 듯 하다.

 하카에서 빠져 나올 때 검문을 받을게 뻔하고 미얀마를 빠져나올 때도 문제이다. 안전하게 이 문서를 전해줄 수 있을까?

 또 다른 문제는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어느 기독교 단체에 이곳 실정을 알리고.. 설사 알린다고 하더라도 반응이 시큰둥하지 않을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이러한 나의 고민을 모르는 마냥 즐거운 제시는 주디의 집으로 나를 데려다 준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때가 다 되었네..

 주디는 날 위해 만찬을 준비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넉넉지 않은 살림에 손님대접을 한다고 무리를 한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기를 먹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쉬운 일이 아닐텐데..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차려준 정성 때문에 숟갈을 들었다.

 밥을 먹고 나서 주디는 자신이 키우는 돼지들을 보여주었다. 돼지우리는 좀 원시적이라고 해야 하나? 옛 우리나라 시골의 모습을 보는 듯한 소박한 모습이다.

 바로 옆집에서 청년들이 모여서 게임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가가서 보니 상대방 당구와 알까기가 혼합된 게임이다.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서 재미있다. 나도 같이 게임에 참여했다. 이들에게는 모처럼 만의 외국인과의 게임이겠지?  

 한 청년이 능숙한 영어로 말을 걸기에 어디서 영어를 배웠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대학에서 영문과를 졸업했다고 하지만 이곳 하카에서는 아무 곳에서 쓸데가 없어서 그냥 이렇게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젊은이들과 함께 게임을 할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지만 한편 일을 해야 할 젊은이들이 이렇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오니 경찰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복사를 2장을 해야 한다며 내 여권을 달라고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권을 빼앗기면 안 된다. 난 같이 가서 복사를 할 테니 여권은 내가 가지고 있겠다고 했다.

 경찰과 함께 복사기가 있는 가게를 향해 시내를 걸었다.

 어설픈 영어를 하는 경찰과 이야기를 했다. 하카에는 300여명의 경찰이 있으며 경찰서도 2군데가 있다고 한다.

 한군데는 하카경찰이고 한군데는 양곤 경찰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전체적인 치안은 친민족에게 맡기되 양곤 경찰에서 감시를 하는 구조인 듯 하다.

 복사를 마친 후 경찰은 내가 만달라이로 떠나는 월요일 아침에 또 보자고 한다. 왜 내가 갈 때 보자고 하는 거지? 혹시 짐 수색을 하려는 건 아닌지?

 경찰들은 나에게 친절하기는 하지만 신경이 쓰인다. 내가 호텔에 있을 때면 계속해서 전화가 오는데 아무래도 내 동태를 묻는 듯 하다.

 또한 내가 대화를 한 모든 사람들은 내가 지나간 후 경찰이 다가와

 ‘한국인과 어떤 대화를 했느냐?’ 라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나야 외국인이기에 해꼬지를 당할 염려는 없지만 문제는 이곳 현지 사람들이다. 혹시나 나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되지 않을지 정말로 걱정이 된다.

 또한 곳곳에 나를 감시하는 듯한 사람들을 배치해놓은 듯 하다. 내가 한 지점을 지나갈 때면 갑자기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경찰서 방향으로 가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기에 내가 감시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오늘 몇몇 목사를 만난 이후로 경찰들의 감시가 더 강화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미얀마 정부가 친스테이트에 외국인 접근을 막은 이유가 이곳 사람의 대부분이 기독교였다는 이유도 있었다는 것에 비추어 갑작스러운 나의 출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듯 하다.

 호텔에 다시 돌아오니 한 목사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사님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물어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목사님 이름은 폴이다. 오전에 방문을 했던 밥티스트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마치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을 가진 목사님이다. 그는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를 했었는데 그때 신세진 한국인 선교사들을 잊지 못한다며 나를 무척 반가워한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체크포인트가 있어서 외국인들은 절대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일례로 1999년 친스테이트에 기독교가 들어 온지 100주년이 되는 해라서 1966년까지 이곳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미국인 선교사를 초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얀마 정부는 그마저도 거부를 해서 결국 미국인 선교사는 미얀마는 입국 했지만 결국 하카에는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어떻게 하카에 들어왔는지 되물으며 나를 보고 ‘miracle park’이라고 표현한다. ‘기적의 박?’ 그거 괜찮은 문구인데^^

 폴도 그렇고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바깥세계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 미얀마 TV는 그야말로 전시용이라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은 철저히 숨기고 군인과 불교에 관한 방송만 할 뿐이다.

 위성 TV가 있는 집이 있기는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기에는 부족한 듯 하다.

 난 폴에게 지금 동남아 경제는 급격하게 발전을 하고 있고 미얀마도 그러한 영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듯 하다고 이야기 했다.

 이곳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거의 같은 질문을 하고 난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어둠이라는 표현이 알맞은 듯 하다. 때문에 외국인인 나에게 마음을 열고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다.

 미얀마는 북한과 비슷한 5가정 감시체제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웃끼리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못한다고 한다.

 난 폴을 믿고 경찰이 나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것에 대해 물어보았다. 폴은 당연하다고 하면서 내가 여기 있는 내내 감시를 당할 거라 했다.

 난 오늘 밥티스트 교회에서 받은 문서를 폴에게 보여주면서 이 문서가 경찰에게 적발 될 경우 문제가 없는지 물어보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문서를 본 폴은 정부를 비판한 내용이 있어서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한다. 그렇지만 굳은 표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고 한다.

 더욱더 부담이 느껴지네.. 문서를 미얀마에서 빼오는 것도 문제지만 과연 이곳 상황을 한국 교회에서 어떻게 받아줄지 확신을 못했다.

 이곳의 목사님들은 내가 온 것에 대해서 이곳을 외부에 알릴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차라리 나 말고 선교사가 이곳에 왔었어야 하는데..

 폴은 내가 이곳에 떠나면 다시 하카는 문이 닫힐 거라고 한다. 내가 여기에 온 것에 대해서 경찰과 이민국 직원도 적잖게 당황하고 있으며 내가 떠난 후 체크포인트가 강화될 거라고 한다.

 결국.. 이곳에 유일무일 한 여행자인 나에게 큰 임무가 주어진 셈이다. 하카에 있으면서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 최대한 많은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폴은 다시 만나자며 조용히 호텔을 떠났다. 하카는 전기사정이 그야말로 열악해서 2일에 한번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전기가 들어올 뿐이다.

 오늘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날이라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조용히 생각을 하며 스르르 눈이 감기길 기다렸다.

 하카에 처음으로 들어온 외국인 여행자.. 나로 인해 기대감으로 술렁이기 시작한 하카.. 그리고 점점 죄여드는 경찰의 감시..

 참 여행이란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 오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야 했다. 처음 중국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를 놓치고..

 방콕에서 주영이를 만나 생각지도 않았던 친스테이스에 관한 정보를 얻은 것을 비롯해서 만달라이에서 지금은 열리다시피한 밤부와 까따를 거부당하고, 그동안 철저하게 외국인의 접근이 금지되었다가 최근에 느슨해진 하카로 가는 버스를 탔다는 점..

 인생은 한편의 연극이라고 한다. 연극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바로 대본이다. 사람들의 삶은 한편의 대본을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여행이라는 연극은 미래의 스토리를 전혀 알 수 없기에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상큼한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게 아닐까?

 

1월 29일(토)

 하카에 머문지 3일째 되는 날이다. 어제까지와는 달리 오늘은 활동을 자제하기로 했다. 때문에 오후 3시까지 아무 할 일없이 침대에 가만 누워있기만 했다.

 호텔에 있으니 수많은 전화가 걸려온다. 나의 안부를 묻는 전화도 있을 것이며 감시하는 전화도 있는 것 같았다.

 오후 3시가 되자 몸이 근질근질 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침대를 박차고 나와 하카시내를 둘러보았다.

 하카는 산 능선에 지어진 도시이다. 우리나라의 마을과 도로는 산의 계곡을 따라 지어지는 것에 비해 이곳 친스테이트는 산 능선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도로가 이어져 있다.

 하카시내를 돌아다니니 한국인이 이곳에 온 게 소문이 났는지 사람들이 나를 주목한다.

 특히 동네 처녀들이 나를 보며 수줍어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한국에서 건장한 청년이 오니까 설레이는 건가? 말만 잘 통했으면 애인 없는 서러움을 해결했을 텐데...^^

 내가 이곳에 와서 이곳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한국에 대해서 이곳 사람들과(물론 영어가 통하는 사람) 대화를 할 때면 한국에 대해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한다.

 하카 시내를 둘러보고 주디네 집을 방문했다.

 주디는 오늘 날을 만나기 위해 2명의 노인이 이곳으로 와서 기다렸다고 한다. 또한 경찰이 3번이나 와서 오늘은 내가 오지 않았는지, 어제는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조사를 했다고 한다.

 난 주디에게 경찰의 시선 때문에 여기 오래있지 못한다고 말하고 내일 다시 찾아온다는 말을 하고 주디네 집을 나섰다.

 주디를 비롯해서 가족들과도 많이 친해졌지만 아직 이곳은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기에는 제약이 많다.

 호텔에 다시 돌아오니 경찰이 호텔에 와 있었다. 호텔 아줌마는 그냥 친구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날 감시하는 듯 하다.

 밤에는 호텔아줌마 친척은 스티븐을 다시 방문했다. 스티븐은 내가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그고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스티븐도 주디와 마찬가지로 경찰이 2번 자신을 찾아와서 나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스티븐은 평범한 여행이야기만 했다고 대답했다며 안심하라고 한다.

 스티븐은 1966년에 마지막으로 떠난 미국인 선교사가 친스테이트에 대해 쓴 책을 나에게 선물해주었다.

 스티븐의 형은 현재 미국에 있으며 친언어로 된 영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해서 거의 완성단계에 있으며, 친언어로 된 컴퓨터 자판을 만드는 작업도 시작했다고 한다.

 스티븐이 미얀마가 열리면 가장 먼저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 물어보았다.

 난 첫 번째 핸드폰이 밀려들어올 것이고, 두 번째로는 자동차 산업이 활성화 될 것이라 했다. 세 번째로는 인터넷이 올 것이라 했다.

 미얀마의 전화사정은 그야말로 열악하다. 전화기 자체는 비싸지는 않지만 전화를 한대 설치하기 위해서는 2~3년을 기다려야 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고 한다.

 이곳 하카도 전화사정은 열악하기 때문에 개방이 되면 핸드폰이 밀려들어 올 것 같다. 아프가니스탄 같은 경우는 오랜 전쟁으로 전화망이 거의 파괴가 되었기 때문에 손쉽게 설치할 수 있는 핸드폰 산업이 호황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주었다.

 자동차 산업은 현재 미얀마의 차량을 봤을 때는 급성장을 할 듯 하다. 10년 된 고물자동차 가격이 우리 돈으로 1700만원이고 한국의 무쏘 자동차도 1억 5000만원이라고 한다.

 미얀마가 개방이 되면 차량이 많이 수입 될 것은 뻔한 이치지만 기본 차량을 소유한 기득권이 차량 가격의 폭락을 우려해 쉽게 열릴 듯 하지는 않다.

 세 번째로는 인터넷이다. 친지역은 공장과 자원이 거의 없지만 한 가지 좋은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미얀마에서 인도와 연결되는 통로 상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도로 산업이 발달을 할 것이고, IT는 인터넷 5대 강국인 인도에 의지할 듯 하다.

 스티븐에게 한국의 인터넷 사용 현황과 핸드폰의 쓰임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스티븐은 한국에서는 거의 소형 컴퓨터 화 된 핸드폰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감탄해 한다. 자신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 한국에서는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에 대해서도 소개를 해주었다. 특히 영어와 같은 경우는 지금 한국에서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있어서 스티븐을 비롯해서 이곳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할 수 있으면 매우 유용할 것이라 했다.

 스티븐은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티븐에게 앞으로의 사업 아이템을 제공해준 듯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미얀마가 개방이 되고서야 가능한 일 아닌가..

 난 하카의 목사님을 비롯해서 현지 사람들에게 미얀마가 개방된 이후에 다시 한번 방문할 것이라 말한다. 지금의 하카와 발전된 하카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이곳에서 찍는 사진과 지금의 느낌은 무척 중요할거라 생각 된다.

 내일은 이곳 교회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하려고 한다. 내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이곳 산골 오지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기독교를 간직하고 있었는지 궁굼하고 이곳 목사님들의 요청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난 한국의 평범한 교사이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픈 마음이다.

호텔 정원에 핀 꽃.. 아름답다.

  하카 외곽의 모습.. 경사진 환경이지만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다.

  아담한 친민족 박물관

  다정하게 놀고 있는 형제.. 하카 아이들에게는 마땅한 놀이터와 장난감이 없는 형편이다.

 친민족 박물관의 모습.. 내가 하카를 찾게 된 이유는 론니플래닛에 실려있는 사진 한장 때문이었다. 그 사진에는 한 할머니의 얼굴 전체에 문신이 그려진 모습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토속적인 모습일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곧 깨지게 되고 이렇게 박물관에서만 옛모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물건은 어디에 썼는지 사뭇 궁굼하다.

  물통인 듯한 항아리

  내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수줍어 하는 아이

  이곳의 학교 모습.. 아이들이 날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다.

  이곳에서 유일한 교수 방법은 오직 칠판뿐이다.

  5학년 교실의 여학생들.. 미얀마의 모든 학생들은 초록색 론지를 입는다.

  이곳의 교과서.. 열악한 환경이기는 하지만 열정적인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어느정도의 교육은 이루어지는 듯 하다.

이곳 학교의 선생님들과 함께

  저쪽 중앙도로를 지나서 50킬로정도를 가면 인도 국경이 나온다고 한다.

  주디네 집에 가니 친척들이 찾아와 있었다. 이들은 경찰이기는 하지만 친근감 있게 나를 대해주었다.

  주디가 대접한 음식.. 여기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융숭한 대접이었다.

  누룽지를 삶고 있다. 식생활은 우리 민족과 비슷하다.

  집 뒷편에는 돼지를 키우고 있다.

  주디의 집에서 바라본 하카 전경

 미얀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놀이.. 몇 년전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알까기와 비슷한 놀이이다.

  주변의 꼬마들이 모여들었다.

  나 역시 한수 배워야지.. 청년의 지도를 받으면 분전했지만 결국 졌다..ㅡ.ㅡ

  친스테이트에서 유일한 종합운동장.. 하카에서 유일하게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쾌활한 표정의 소년

  호텔 아줌마가 차려준 저녁

  호텔 부엌의 모습.. 모든 연료는 땔감을 쓴다.

  잡화점.. 비교적 많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곳에서 유일한 테니스코트.. 선수들이 모두 맨발인 것이 특이하다.

  여기저기서 수다를 떠는 아낙네들

  아이를 업고 길을 가는 여인.. 많은 사람들이 맨발로 다닌다.

  언제나 즐거운 표정의 아이들

  힘겹게 수레를 밀고 있는 청년의 모습

  호텔의 반대쪽에서 바라본 호텔쪽 모습..

  하카의 인구는 대략 2만명정도 된다고 한다.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거리는 한산하다.

  이곳에서 몇 안되는 차량.. 언제쯤 이곳에도 문명이 들어올지..

  사진을 찍을려고 하니까 포즈를 취하는 아이

  평화롭게 병아리들을 거닐고 모이를 줍는 암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