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여행기 6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루.. 하카, 05.1.30)  

1월 30일(일)

 오늘 하루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내가 여행을 하면서 가장 특별하다고 생각한 경험을 했으며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하루이다. 또한 앞으로의 부담이 몰려오는 하루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곳저곳에서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9시 반쯤에 이곳에서 가장 큰 밥티스트 교회로 갔다.

 하지만 가장 크다는 교회는 텅텅 비어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혹시 경찰들이 교회 예배를 막았나?

 다른 교회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내 쪽으로 걸어갔다. 밥티스트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임마누엘 교회를 발견했다.

 교회 안에 들어가니 목사님이 놀라워하시면서 반겨주신다. 하카까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를 하니 목사님은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하면서 마침 오늘 오후 3시에 임마누엘 교회에서 영어 찬송가 경연대회가 있다고 하면서 꼭 참석해 달라고 한다. 목사님은 책 한권을 주시면서 친스테이트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신다.

 어제 스티븐에게 받은 책과 함께 이곳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될 듯하다. 물론 경찰들의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간다는 가정하에서..

 다시 밥티스트 교회에 가니 목사님들이 나를 맞아주신다. 경찰이 예배를 막은 게 아니라 내가 너무 일찍 갔던 것이다.

 10시 반에 예배가 시작되었다. 난 장로들이 앉는 좋은 자리에 앉았다. 목사님에게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예배가 시작될 쯤 사람들은 꾸역꾸역 교회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들 모두는 낯선 외국인인 내가 신기했던지 계속해서 나를 쳐다본다.

 수천개의 시선이 나한테 모여드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1966년 이후 처음 이곳을 찾는 외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기로 했다.

 예배가 시작되었고 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렇게 외딴 곳에도 교회가 있고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난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서 예배하는 모습을 잠깐잠깐 촬영을 했다. 디카 용량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아니면 캠코더라도 가져왔으면 좋았을 텐데..

 예배 방식과 과정은 우리나라 교회와 흡사했지만 여기는 찬송가를 좀 더 많이 부르는 게 특징이다.

 예배 중간에 목사님이 올라오시더니 나를 소개하신다.

 수천개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몰렸다. 난 살며시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사실 속으로는 긴장이 되었지만 지금의 나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이미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항상 웃으면서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목사님이 연설을 하거나 기도를 할 때 미션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 여기서 말하는 미션은 미얀마가 개방되는 뜻이라고 한다.

 차가운 경찰의 눈 때문에 직접 표현은 못하고 미션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예배를 하면서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12시 반쯤 2시간정도 진행된 예배가 끝났다. 예배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쌓더니 서로 악수를 하려고 한다. 내가 마치 연예인이 된 듯한 기분이다.

 예배가 끝나고 그제께 호텔에서 나와 많은 이야기를 했던 폴 목사님이 교회 이곳저곳을 안내해주었다.

 밥티스트 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을 소개해주었고, 교회에서 운영하게 될 병원 건설 현장도 보여주었다.

 병원을 짓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현재 미국에서 거주하는 동포들이 비용을 보내주고 있다고 한다.

 폴은 친스테이트에서 사회복지 시설이 전무한 것도 문제가 되지만 무엇보다 교육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대학교는 물론 고등학교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때문에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꿈을 갖고 살기는 어려운 지역이다.

 폴은 선교의 역사를 알려주면서 1899년에 이곳에 처음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의 묘소로 안내해 주었다.

 선교사의 묘소는 지금도 이곳 사람들이 자주 참배를 하러 올 만큼 성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다 바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폴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비록 기자는 아니지만 이곳 교회의 메시지를 우리나라 교회에 전달하고 싶어서이다. 폴은 기꺼이 인터뷰에 응했고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했다.

 폴과의 인터뷰가 끝난 후 호텔로 돌아와 쉬었다.

 ‘휴.. 내가 멀 하고 있는 거지?’

 침대에 누워 중얼거려봤다. 단지 호기심에 이끌려 이곳에 왔을 뿐인데 이제는 알 수 없는 사명감이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우선 이곳 사람들이 나를 너무 특별하게 보는 것도 그렇고, 또한 경찰들이 항상 날 주시하는 것도 그렇다. 무엇보다 지금 내가 모은 자료를 어떻게 한국 교회에 전달할지도 걱정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 기독교도 아닌 내가 자료를 한국교회에 넘겨줘봤자 과연 관심을 가져줄지도 확신이 안 섰다.

 그렇지만 이곳 사람들을 위해서 노력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너무나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 아닌가..

 3시가 다 되어 아침에 들렀던 임마누엘 교회로 갔다. 목사님은 나를 기다리셨는지 교회 안으로 나를 안내해 주신다.

 작은 교회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1000여명정도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제일 앞자리로 안내되었다. 내가 앉으니 옆에 나의 통역을 맡은 청년이 앉았다. 내가 웃으며 인사를 하자 청년은 이 행사는 나를 위한 행사가 될 거라며 답했다.

 행사는 모든 진행과정이 영어로 진행되었다. 찬송가를 비롯해서 기도, 해설자의 소개까지 모두가 영어였다.

 ‘여기 사람들이 영어를 다 들을 수 있는 거니?’

 청년에서 물으니 청년은 거의가 못 알아듣는다고 답한다. 그리고 내가 참석함으로서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와 가수들이 많이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1993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가 꾸준히 유지되는 것도 그렇지만 어떻게 행사시기를 맞춰서 내가 여기에 왔는지도 정말 신기할 뿐이다.

 노래 수준도 생각보다 높았다. 이곳의 가수인 듯한 젊은 이들이 나와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수준이 가수 못지않았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목사님이 영어로

 ‘지금 이 자리에는 한국에서 온 특별한 손님이 있습니다.’라며 나를 소개시켜 주셨다.

 난 깜짝 놀라 일어나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런데 목사님은 나보고 나와서 연설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순간 당황했다. 난 영어를 잘 못하는 편인데 이렇게 1000명의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라고 하다니..

 그래도 난 한국을 대표하게 되지 않았나.. 용기를 내어 단상으로 올라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몰렸다. 속으로는 무척 긴장이 되었지만 평정을 찾고 웃으면서 천천히 연설을 했다.

 ‘전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제가 실수를 하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라고 말하자 목사님은 문제없다고 말씀하신다.

 ‘저를 환영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카는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고, 숨겨진 곳입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2가지에 놀랐습니다.

 하나는 이곳 사람들의 대부분이 기독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친절하고 친근하다는 것입니다.

 아.. 또 하나 있군요.. 여기 여자 분들이 다 이쁘다는 것이에요.. ’

 그 이후의 연설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냥 멍한 상태에서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연설을 했다는 것만 기억이 날 뿐이다. 정확한 영어는 아니지만 술술 연설을 하는 나를 보면서 스스로 놀랬다.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낯선 외지인이 갑작스레 오게 되어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연설을 하는 장면.. 흡사 ‘시티오브조이’, ‘티벳에서의 7년’과 같은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다.

 원래 이런 영화는 잘 생긴 금발 서양청년이 와서 찍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곳 하카에서는 건장한 한국청년이 주인공이 되었다.

 연설이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참.. 이곳에 와서 대단한 경험을 하는구나.’

 이곳 사람들이 영어로 알아듣지는 못하기에 목사님이 나의 영어를 다시 친언어로 번역해 말씀해 주신다. 오늘 행사에서 유일한 친언어이다.

 행사가 다 끝났다. 오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 악수를 하려고 하고 말을 걸어보려고 한다.

 행사가 끝난 뒤 교회 바로 아래에 있는 목사님 댁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젊은이들은 나를 둘러쌓아서 궁굼해 하는 것들을 나에게 물어보았다.

 저녁 식사는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가 다 나왔다. 이곳에서는 먹기 어려운 음식일텐데..

 나와 나의 통역을 맡은 청년과 함께 식사를 했다. 맛은 있었지만 사실 부담스러워서 많이 먹지는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주디네집에 가기 위해서 거리로 나왔다. 하카전체에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진 듯 사람들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주디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반가워한다. 이제 내일이면 가는데, 혹시 나 때문에 경찰서에 기지는 않을련지..

 사실 주디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똑부러지는 성격의 주디이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안하기로 했다.

 주디는 나에게 언제 다시 하카를 방문할 건지 물어본다. 난 미얀마가 개방이 되고 하카가 발전된 이후라고 대답했다.

 어짜피 그전에는 다시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또한 이곳의 변화된 모습을 훗날 보고 싶기 때문이다.

 다시 방문하는 시기는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날이 빨리 찾아오기를 모두가 바라고 바란다.

 호텔에 돌아와 쉬니 목사님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계속 나를 만나러 온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일 내가 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주소를 다 적어간다.(내주소만 10번 넘게 적은 것 같음)

 하카에서의 4일이 지났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4일이 어떻게 지나갈지 막막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

 전기가 안 들어오는 날이라 밤에는 촛불을 켜놓아야 했지만 나에게는 촛불을 보며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도대체 내가 뭘 한거지?’

 너무나 뜻밖의 경험이라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어떤 여행보다도 보람 있고 알찬 여행이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이곳 사람들에게 나 하나로 인해서 ‘코리아’ 이미지가 좋게 각인이 되었을 것이다.

 외교관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여행자 한사람 한사람이 바로 외교관인 것이다.

 이제는 또 떠날 준비를 해야지.. 특별한 경험도 했고 무엇보다 론니플래닛을 이겼다는 뿌듯함이 다가온 여행이다.

하카 밥티스트 교회의 예배당

  예배당 전경.. 1000명~1500명이 앉을 수 있다.

  나와 절친해진 폴 목사님과 함께

  교회 사무실건물

  이곳은 교회 별관이다.

역대 목사님들의 이름

교회에서 바라본 저 위의 스타디움

  십자가와 어우러진 평화로운 일요일이다.. 과연 이곳이 미얀마일까?

  젊고 잘생긴 전도사님

  교회의 일을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여인

  이곳은 교회에서 세운 고아원이다.

  고아원 아이들

  하카의 하늘에는 구름이 아름답게 퍼져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마을의 전경

목사님.. 젊어보이지만 42살이라고 한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500여명의 친족의 성금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병원

  하카에 기독교를 전해준 미국인 선교사가 잠들어 있는 묘지

선교사님의 묘.. 평생을 하카를 위해 선교활동을 했고, 돌아가시고 나서도 하카와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 교회에서 콘서트를 보러 온 사람들

  천진난만한 어린이 합창단

  여고생 합창단.. 정숙한 모습이다.

  우리나라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부르는 청년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청년

  어린이 합창단 모습.. 마이클 잭슨의 'Here the world'를 열창했다.

  미모의 사회자.. 외국인인 내가 와서 인지 긴장을 많이 한 모습이었다.

  목사님이 행사 진행 순서를 안내하는 모습

  여고생 합창단이 노래를 하는 모습

  임마누엘 교회 주임목사님이 예배를 하는 모습

  CCC 소속 젊은이들이 나와 합창을 하는 모습

  열정적으로 영어 노래를 부르는 모습

  나를 위해 준비한 푸짐한 만찬.. 이곳의 사정을 알기에 이 음식을 먹기가 정말로 미안했다.

  교회 관계자들과 함께

  며칠동안 오토바이로 나를 태워줬던 제시와 함께.

  호텔에서 아이들과 함께

  호텔 주인아줌마와 함께.. 4일 동안 머무는 기간에 나를 많이 배려해주셨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통했다.

  나의 장난^^ 사랑의 하트

  서로 주먹을 겨누는 모습

  밥티스트 교회 목사님.. 이 목사님은 한국으로의 유학을 희망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