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은 여러번 해봤지만 나에게 해외여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설레이고 또한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여행을 하면서 국내나 해외여행이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을 했다.

  실크로드 횡단은 어렸을 때부터 나의 꿈이었다. 그래서 떠날 때의 기대 또한 대단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탄불 까지 가는 코스는 중도에 포기하게 되고 새로 티벳으로의 여행을 하게 된다.

  이렇게 여행은 계획 했던대로만 하는 것 보다는 여러 가지 변수를 두어서 자유롭게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실크로드 여행1편에서는 인천에서 출발할 때부터 우루무치까지의 여정을 적었다. 모든게 신기한때로서 별 어려움 없이 여행한 시기이다.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1(출발편)

 6월 28일(금)

 아침에 집에서 출발을 해서 곧장 탐험연맹을 들렀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석우형이 정말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날 걱정해 주시고 중국화폐도 지원해 주셨다.

  곧장 인천에서 배를 탔다. 배를 탈때 간단한 여권조사를 하고 나서 배를 탔다.
 첫 해외여행이다 보니 많은 기대를 하고 어서 배가 출발하기를 기달렸다.
 그런데 배는 사정이 생겨서 4시간 후에 출발한다고 한다. 설레이는 마음이 싹가시고 그냥 잤다.

 6월 29일(토)

 인천에서 천진까지는 무려 24시간이 걸린다. 배에서 있으면서 외국인이랑 대화를 하고 특히 조선족과 한국 여행객을 통해 중국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려고 노력했다.


 이날 마침 월드컵 3,4위전을 했다. 여기서도 느낀거지만 한국인들의 마음은 다 똑같다는걸 느꼈다. 배의 중앙 프런트에 설치되어 있는 티비앞에 모두 모여서 응원을 했었는데 외국인도 함께 참여해서 구호를 외치고 응원을 했다. 아.. 이제 월드컵도 끈나는 구나..

 중국시간(한국시간보다 1시간 느림)으로 저녁 11시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니까 중국 특유의 냄새가 나는걸 느꼈다. 그렇게 좋은 냄새는 아니다. 배에서 내리지 마자 '빼이찡'하면서 소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를 타고 2시간정도 가니까 북경역에서 내려주었다.. 이때 요금을 50위엔을 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무지 비싼 요금이다.

 북경역에서 내리자마자 잠시 구성된 나의 일행(여자3 남자2)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하긴 아무도 중국어를 잘 못니까..
 이때부터 몸짓을 써가며 이야기를 했다. 북경은 물가가 많이 비싸서 여관에서 하루 투숙하는데 50위엔(한화 7500원)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방황한 끝에 외딴골목의 한 여관에 들어갔는데 침대가 2개 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침대 2개를 붙이고 5명이서 옆으로 누워서 잤다. 이때 시간이 새벽 4시이고 너무 피곤했기때문에 곧장 잠들었다.

 

 6월 30일(일)

 아침에 일어나서 거리를 나가서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역시 사람사는데는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낯선 이국적인 풍경이 신기해 보이기도 했다.

 아침을 먹으로 식당으로 갔는데 막상 주문을 시킬려구 하니까 이건 말을 할수 있어야지... 결국 우리는 옆에 사람들이 먹고 있는것을 가르키면서 주문을 했다.

 시장구경을 하고 나서 대략적인 여행준비를 한후 우리는 각자 갈길을 찾아서 찢어졌다. 5명이었는데 남녀한쌍은 외몽골로 여행을 가고 여자 대학생 2명은 용감하게 내몽고로 여행을 간다고 한다.  

 이렇게 같이 여행하고 찢어지는게 롤플레잉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여행하면서 동료들을 많이 만나고 헤어지겠지..

 먼저 천안문으로 갔다. 중국어를 몰라서 택시기사한테 여행가이드북의 한자를 보여주는 식으로 찾아갔다.

 북경역사박물관에 들어가서 관람을 했는데 20위엔(한화3000원)씩이나 했다. 중국의 유물들은 세밀함보다는 화려하고 크기가 큰데에 치중하는거 같았다.

 아마 우리나라는 금이니 귀중품 재료가 부족해서 작은것을 세밀하게 만들고, 중국은 물자가 남아도니까 크고 화려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북경에 유학중인 용수한테 갔다. 그 쪽 대학에는 한국학생들이 많았다. 친구는 내가 와서 반가웠나 보다. 거금을 들여서 조선족식당에서 한국음식을 시켜서 나를 배불리 먹여주었다.

 친구의 룸메는 일본인이다. 대화 수단은 물론 영어로 대화를 했다. 여행을 와서 느꼈지만 평소에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웬만하면 외국인한테 말이 잘 통한다. 북경에 와서 이야기한 외국인은 거의 다 알아 들었다.

 근데 정작 중국인들은 영어를 하나도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초등학생들도 알고있는 수준의 영어도 못알아듣는거 같다.. 막막하기는 했지만 몸짓과 표정 또한 값을 흥정할때에는 수첩을 이용해서 숫자를 써서 의사소통을 한다.

 북경의 유학생들은 비교적 풍족하게 산다. 왜냐하면 물가가 싸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제일 물가가 비싼 이곳도 맥주 한병에 3위엔(450원)이면 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곳 노동자의 평균 소득이 열심히 일해도 500위엔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싼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 대학의 중국학생들은 각 지방에서 앨리트들만 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프라이드가 강한걸 느낄수 있었다.

 식당에 가서 술을 먹는데 중국학생들은 대부분 책을 가져와서 식당에서 밤새도록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앨리트 답게 열심히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방면에 다른사람의 시선을 별로 신경쓰지 않고 키스를 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이 날은 친구랑 몇몇 한국인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밤을 샜다.

 7월 1일(월)

 11시에 일어났다. 전날 새벽4시까지 술을 마셔서 속이 쓰렸다. 먼저 친구랑 북경역으로 가서 다음날 출발할 기차표를 끊었다. 나의 방랑벽이 도져서 그런지 어서 빨리 북경을 떠나고 싶었다. 기차표는 서안(장안)까지 가는 침대표가 265위엔(약4만원)정도 했다. 시간은 무려 14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역에서 표를 산후 친구가 환전을 한다면서 외환은행 북경지점으로 갔다. 이곳에는 한국인들이 많았었는데 한 가지 좋은것은 한국으로의 국제전화를 공짜로 걸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여행준비가 허술해 보였는지 친구가 날 시장으로 데려갔다. 하긴 거의 2달 이상 여행할건데.. 양말은 아예 안 가져오고 배낭은 뜯어지고, 속옷, T셔츠 1개.. 반바지는 아예 안 가져왔으니까...

 덕분에 쇼핑을 할수 있었는데 이곳 가게들은 정말로 재미있다. 여행용 배낭을 예를 들면 우리나라 이태원에서 10만원 넘게 줘야 살 수 있는 고급배낭이 있어서 가격을 물어보니까 480위엔을 불렀다. 싸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는 그냥 가자고 한다.

 우리가 갈라고 하니까 300위엔을 부르더니 240, 200, 190으로 낮아지는 것이었다. 북경에서는 절대 처음 부르는대로 사면 안된다. 결국 그 배낭은 다른가게에서 130위엔에 살 수 있었다.

 우리는 다니면서 연기를 많이 했다. 대략 시장을 둘러서 가격을 파악한 후 흥정을 하는거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파카가 있기에 물어보니까 450위엔을 불렀다.. 그래서 친구가 100위엔으로 하자고 하니까 그냥 가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연기를 했다.

  뒤 돌아서 가는척하면서 한국말로 '불러라.. 불러라.. 제발 값을 부르라' 주문을 했다.. 그 상인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400, 300, 200, 으로 낮아지더니 결국 150위엔으로 깍았다. 우리나라에서는 15만원정도 하는 옷을 22500원에 산꼴이다. 양말3개는 처음에 하나에 20위엔을 부르더니 결국 3개 20위엔에 샀다^^

 이렇게 시장에서 여행 물품을 고른후 친구가 고급식당으로 가서 근사한 저녁을 대접해 주었다. 샤브샤브인데 4명이서 정말로 배부르게 먹고 평소에 먹어보지도 못했던 양고기도 먹었는데 가격이 115위엔이 나왔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모습.

 여행 첫날 본의 아니게 같은 방을...

 북경의 시장에서(이때까지만 해도 모든게 신기했다)

 북경의 상징인 천안문 앞에서

 절친한 친구인 용수와 함께

나와 대화를 많이 한 용수의 룸메 일본인 쿠보시마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2(북경~서안 기차이야기)

 7월 2일(화)

 서안으로 떠나는 날이다. 이제부터는 친구의 도움없이 혼자 여행해야만 한다. 용수는 오늘이 이사가는 날이라 분주한 모양이다. 오전에 나혼자 빈둥거리고 있다가 용수가 시켜준 마지막 한국음식을 싸갖고 같이 북경서역으로 갔다.

 북경서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역이라고 한다. 역시 규모가 엄청났다. 기차는 비교적 찾기가 쉬웠다. 기차가 많아서 그런지 타야되는 플래폼도 달랐다. 난 6번 플래폼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기 전에 역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일 것이다.

 이제 절친한 친구인 용수랑 헤어질 시간이다. 나 때문에 돈도 많이 쓰고 잠도 못자고.. 아무튼 고마운 친구이다. 용수는 중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내가 정말로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다음에 언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만나면 크게 한턱 쏴야겠다.

 내가 탄 기차는 트과이 침대차이다. 비교적 부유한 사람과 외국인이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14시간을 함께할 침대칸은 비교적 찾기가 쉬웠다. 한칸에 6명이 탈수 있다. 그리고 상,중, 하로 나누어져 있다. 특이하게 중국 기차는 침대가 위로 올라갈수록 가격이 저렴해진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덜 드나드는 위에 칸이 더 유리하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나랑 같은칸에 있는 청년한테 말을 걸었다. 영어는 전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이드북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상대편이랑 정말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에는 중국어 회화집과 단어장을 이용하고, 장소를 알고 싶을때에는 가이드북에 나타난 종소의 한자를 집어준다. 그러면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준다.

 기차가 출발한다.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의 환경이 창밖으로 펼쳐진다. 북경시를 벗어나자 대부분의 풍경이 농촌이다. 농민들은 옷을 수수하게 입고 모든 작업을 농기계 없이 수작업으로 하고 있다. 빨간 집들이 모여 집단촌을 형성한것과 담에는 구호들이 페인트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공산주의의 색을 벗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서 창밖을 감상하고 있을때 옆 침대의 청년이 껌을 권하면서 말을 걸었다. 약간의 영어가 되는 모양이다. 무척 반가웠다. 이름은 '첸펭'이고 나이는 나랑 동갑이다. 나도 영어가 뛰어 난 것은 아닌데 첸펭의 영어는 더 어설퍼 보였다. 그래도 영어랑 중국어를 섞여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외국인에게 말을 붙일때 가장 많이 써먹는 것이 바로 월드컵이다. 첸펭도 월드컵이 궁굼한 모양이다. 자신도 축구를 좋아한다면서 한국선수를 알고 싶어한다.

 좀 의아해했다. 중국에서 한국축구는 평가절하 된걸로 알고 있다. 특히 CCTV 여자 해설자는 이탈리아가 우리나라에게 졌을때 눈물을 흘리면서 아쉬워 했고, 한국 축구를 욕을 했다고 한다. 국영중앙방송이 저러니 다른사람은 오죽하랴... 최근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중국을 결정적으로 싫어하게 된 계기가 바로 월드컵이 되었다.

 첸펭한테 솔직히 물어봤다. 중국인들은 한국축구를 싫어하지 않냐구?... 첸펭을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건 방송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한국축구를 좋아한다고 한다. 또한 나한테 한국인은 중국에서 그러는 것은 알고 있느냐고 되묻길래 대부분의 한국인은 중국 축구를 응원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대화를 하다보니 첸펭은 군인인걸 알 수 있었다. 바로 인민해방군이다. 나도 1년 반전정도까지는 군인이지 않았는가... 좀 묘한 관계이기도 했다.

 중국은 2년동안 의무복무를 해야한다. 그런데 대학생은 군대에 가지 않는다. 의아해해서 물어보니 대학생은 국가를 위해서 4년동안 공부를 하지 않느냐며 나에게 되 묻는다. 중국의 대학생 개념은 우리와는 완전히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유학생한테 들은 이야기 이지만 중국대학생은 절대 수업을 땡땡이 치지 못한다고 하고, 생각조차 할수 없다고 한다.

 이야기는 중국 경제로 넘어갔다. 이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1인당 국민소득 즉 GNP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양쪽다 영어가 모자란 상태에서 이해시키기란 참 힘들다. 그래서 'one people get the money by one year'이라는 표현으로 이야기를 했다. 궁굼해 하길래 미국의 GNP는 38000$이고 일본은 34000$정도 된다고 이야기 했다. 한국은 8900$이 조금 넘고 인도는 400$정도 된다고 했다. 중국의 GNP를 묻길래 중국은 너무나 빠른 발전을 하고 있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괜히 자존심에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없다고 생각한다.

 첸펭은 한국은 지역이 작아서 빨리 발전하지만 중국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빠르게 발전하기 힘든것이라고 했다. 내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중국은 무궁무진한 자원이 묻혀있지만 무엇보다도 큰 자원은 인구이다. 첸펭이 알려준 중국의 인구는 13억이다. 우리나라의 26배나 된다. 그런데 중국의 체제가 좀 답답하다. 이 13억명이 다이나믹하게 자유의지에 의해서 경제활동을 한다면 정말로 큰 힘이 된텐데 지금의 중국 정치는 통제가 많기 때문이다. 중국의 인구 파워는 26명중에 1명 꼴로 영재교육을 시키면 이미 우리나라의 인구수를 넘어간다.

 첸펭에게 한류 열풍에 대해 물어보았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과장할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HOT, 안재욱, 김희선은 중국의 젊은이라면 거의 알고 있다고 한다.

 북경에서 TV를 볼때 중국애치고는 진짜 이뿐 모델이 CDMA광고 모델을 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김희선이다. 중국에서는 "찐시센"이라고 불리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첸펭과 나의 대화에서 월드컵에 관한 이야기는 도저히 진전되지 못했다. 이유를 알고보니 바로 나라이름이엇다. 중국인들은 세계적으로 불려지는 나라 이름을 거부하고 자기식대로의 한자 이름을 붙이고 있다. 내가 세계지도를 대충 그리면서 물어본 결과는 이렇다.

 브라질-빠시, 아르헨티나-아킨틸, 포루투칼-푸토야, 스페인-시바야, 프랑스-0파쥐, 잉글랜드-잉귀, 독일-저머니아, 폴란드-폴란(그나마 좀 비슷), 스웨덴-쥐덴, 터키-ㅋ터시, 일본-일밥, 한국-한궈, 이탈리아-이태리

 도대체가 이러니 알기가 힘들다. 사람이름 역시 호나우도-로나우도, 밀루타노비치-밀루지...

 첸펭에게 중국의 인구문제를 물어 보앗다. 특히 1가정 1아이 갖기 운동을 물어보았을때 이해시키기 힘들었다. 'baby'란 단어를 모르기에...

 첸펭은 중국의 인구가 많아서 어쩔수 없이 이런 정책을 펴고, 만약에 아이가 2명일 경우에는 1000위안의 벌금을 낸다고 말했다.

 여기서 첸펭과의 벽을 실감했다.

 내가 알기로는 실제로 중국에서는 아이가 2명이 되면 거의 집한채 값을 벌금으로 내야하기 때문에 둘째 셋째 아이는 호적에 올리지 못한다고 한다. 장자만 호적에 올려서 교육등 국가 혜택을 받게 하고 나머지 아이는 농사나 지으며 지내는 것이다.
또 중국에서는 1명의 아이를 가진 여자들은 정기적으로 임신여부를 검사하고 있으며 잉태를 했을경우 강제 낙태를 시킨다고 한다.

 때문에 중국에서 발표한 13억명보다 더 많은 인구가 중국에 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앞으로 중국은 노인문제가 크게 대두될 것이다. 계속해서 산아제한을 하면 표면적인 인구는 줄어들겠지만 노인들을 먹여살릴 젊은이가 크게 부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규제와 제한을 완화하고 경제성장을 서두르는건 어떨까?  우리처럼 선진국형 가족 제도가 형성이 되면 자연스럽게 인구수의 조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첸펭과 나의 대화는 거의 3시간정도 진행 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말로 묻고 싶은것을 묻지 못했다. 바로 1989년에 일어난 천안문 사태이다. 중국으로 건너올때 들은 조선족 아저씨의 이야기는 원래 알던거 보다 더 처참했다. 민주화를 위한 100만명의 시위대앞에 정부는 총과 탱크로 대응을 했던 것이다.

 이때 수천명이 죽고 시신도 트럭에 담아져 아무대나 버려졌다고 한다. 그 당시 중국지도부로서는 10억이 넘는 인구 가운데의 수천명은 아마 값싼 선택일 것이다. 그때의 지도부의 선택이 옳았는지의 여부는 50년 후쯤의 역사책이 알려줄 것이다.

 천안문사태는 중국에서는 말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6명이 있는 침대칸이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첸펭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꿈이 뭐냐고 물어 보았다.
바로 북경에서 사는것이 꿈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에게 있어 북경은 꿈의 도시라고 느꼈다. 난 한국에서는 마음대로 이사를 해도 된다고 알려 주었다.

 기차는 계속해서 달려가고 침대에 누워서 그간의 일기를 정리했다. 미쳐 준비한 도시락이 없는 나에게 용수가 싸준 부침개는 큰 요기거리가 되었다.

 머문 것은 얼마 안되지만 조금 정들은 친구가 다니는 대학. 이곳 학생의 엘리트 의식은 대단하다.

엄청난 수의 사람이 몰려있는 북경 서역

 서안으로 가는 쾌객열차(고급열차이다)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3 (서안)

 7월 3일(수)

 기차에서 잠깐 잠깐 깻다. 기차는 계속 남하하여 석가장, 정주에 다다랗다. 정주에서 잠시 서민들이 기차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통일호와 같은 열차인데 딱딱한 의자에 몇시간에서 며칠까지 기차여행을 해야 한다. 값이 싸기는 하지만 그건 완전히 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 밖을 보다보면 기차 레일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다른 기차가 서 잇는걸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내가 탄 기차가 통행에 있어서 최우선권을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서민들의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싼 기차도 타야 되지만 도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날이 밝았다. 내 생전에 14시간을 기차타는것은 처음이다. 기차를 타면서 창밖에서 본거라곤 농지와 평야뿐이다. 산을 물론이고 구릉지마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 수천년동안 갈고 닦아서 그런 지형이 되었으리라...

 서안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집들의 수도 늘어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출근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전거를 이용해서 출근을 하고 있었다.

 오전 6:30경 드디어 서안역에 도착했다. 서안은 우리에게 장안이라고 알려진 친숙한 도시이다. 중국에서 가장 튼튼한 요새로 알려졌었고, 근처에는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비롯해서 한, 위진 남북조, 당나라때까지 수도로 삼을 만큼 유서 깊은 도시이다.

 역을 나가자마자 역시 예상대로 나를 맞이한것은 호객꾼들이다. 중국의 호객꾼은 정말로 이상해서 외국인인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거는것이 아니라 중국어로 말을 건다. 중국어로 이야기를 하면 알아들을거라 생각을 하나?
아무튼 의아스런운 점중에 하나이다.

 서안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병마용'을 관람하기 위해 가이드북에 적힌 버스를 찾았다. 306, 307버스를 찾으로난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빙마요~'라고 하면서 투어를 하라고 계속 호객들을 한다. '빙마요~'는 '병마용'의 중국말이다.

 한번은 궁굼해서 호객꾼을 따라갔다. 그러더니 견적을 뽑아준다. 병마용+진시황릉+화청지+박물관+?+? 대략 6개를 합해서 240위엔(약36000원)을 내라고 한다. 아무리 입장료가 비싸더라도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난 병마용과 진시황릉만 볼려구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여행을 추구하는 나에게 투어는 전혀 성격에 맞지 않았다.

 306버스를 찾으려고 해도 힘들었다. 도중에 거리에 앉아있는 외국인에게 말을 걸었다. 주변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나마 영어가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 외국인은 덴마크인이다. 이 사람은 투어를 통해서 관람을 할려나 본다. 혹시 앞으로 여행동료로 삼을 수 있을까 해서 어느방향으로 가냐고 물어보았더니 남쪽으로 갈거라고 한다.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무거운 배낭을 들고 가느니 먼저 여관을 잡고 배낭을 놔둔 상태에서 관람을 하는게 훨씬 편하다고 느꼈다.

 마침 인심좋게 생긴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카달로그를 보여주며 영어로 방을 잡으라고 한다. 처음에 보여준 방은 240위엔이었다. 말도 안되는 가격이다. 120위엔짜리도 그렇다. 그러면 골라보라고 한다. 30위엔이면 괜찮을 듯해서 손으로 집었다. 아저씨는 따라 오라고 한다.

 이 아저씨가 여관에 가더니 50위엔짜리를 소개해 주는게 아닌가? 싫다고 했더니 40위엔으로 깍아 준단다. 그러면서 '빙마요?' 한다. 병마용으로 가냐고 묻는 거길래 간다고 한다. 알고보니 TOUR꾼이다. 끈질기게 조르길래 '오늘은 친구를 만난다'라고 했더니 내일 꼭 참가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함을 준다.

아무튼 이렇게 까지 거짓말을 하면서 호객꾼에게 시달려야 하다니...

 306번 버스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중국인에게 직접 물어 보았다. 가이드북에 잇는 '칭꼬유수위치 빙마요 빠스 삼진류 더루(병마용으로 가는 306 버스가는 길을 알려주세요)라고 하니 대충 알아듣는다.

 물어물어 보다가 가끔 TOUR꾼에게 걸리면 자기한테 오라고 하지만 단호하게 '뿌야요(필요없어요)"라고 말하면 마지 못해 버스 타는 길을 가르쳐 준다. 이런점에서는 순박하다고 느꼈다.
처음에 서안역에서 2킬로 떨어진 지점에서까지 헤맸었는데 물어물어 와보니 처음 기차에서 내렸던 서안역이다.. 이런...

 이때 서양인 관광객이 떼로 몰려가는 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버스는 서안역 오른편에 숨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서안역 정면에서만 찾아다녔으니... 버스에 타니 5위엔을 달라고 한다. 적당한 요금이라서 냈다.

 차가 출발하고 옆에 앉은 서양인에게 말을 걸었다. 네덜란드 사람이다. 나를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반가워하면서 네덜란드 사람은 이번 월드컵에게 모두 한국을 응원했다고 한다. 한국의 시합이 있는 날이면 모두 한국을 응원하는 함성으로 뒤덮혔다고 한다.

월드컵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성과를 직접 느껴본 순간이다.

 나는 한국 국민들은 거스 히딩크를 보내준 네덜란드에게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또한 네덜란드 축구 선수 이름을 대면서 같이 축구 이야기를 하였다.

 서안시내는 정말로 복잡했다. 편히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는데 내 옆에 여자한명이 앉았다.
병마용에 다다를쯤에 가이드북의 한자를 가르키며 어디서 내리냐고 물어 보았다. 여자는 깜짝 놀라면서 영어로 대답하였다. 일단 영어가 통해서 정말로 기뻤다.

 그 사람은 지금 중학교 선생님이고 28살이라고 한다. 그리고 날 중국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생긴것이 슬슬 중국인화 되간다는 것을 알았다.

 병마용에 내리니 정말로 많은 관광객이 있었다. 그런데 입장료가 65위엔(약 10000원)이나 하는것이 아닌가!! 사전 정보를 통해 국제학생증 소지자는 할인이 되는줄 알고 반표를 달라고 하니까 학교에서 꾸민 서류가 필요하다며 거부를 한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비싼표를 샀다.

 병마용은 정말로 넓다. 예전에 시황제가 묻히면서 사후에 자신을 지킬 병사들을 흙으로 빗게 했는데 바로 그게 병마용이다. 정말로 표정이 다 살아있고 손가락하나하나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당시의 첨단 기술은 다 동원했으리라..

 병마용은 정말 넓었다. 그리고 많은 관광객이 있었지만 한국 사람은 찾기가 힘들었다. 아마 월드컵 때문이리라...
원래 병마용에서 사진을 찍으면 안되는데 입장료가 아까와서라도 사진을 마구 찍었다. 다행히 걸리지는 않았다.
병마용 관람이 끝날때쯤에 익산에서 왔다는 한국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정말로 반가웠다.

 병마용을 다 보고 진시황릉에 가기 위해서 미니버스에 올랐다. 요금은 1위안이다. 내가 제일 먼저 탔는데... 그건 손해이다. 중국에서는 일정한 사람의 숫자가 채워지기 전까지는 절대 출발을 안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더운 날씨에 에어컨 바람을 쐬니 살거 같다.

 일정한 숫자가 채워지자 출발을 한다. 여기는 버스 안내원도 있는데 전부다 남자이다. 차를 몰고 가다가 사람이 스쳐가면 갑자기 서더니 목적지를 물어보고 낚아 채가듯이 사람을 태운다.

 난 병마용에서 2킬로 정도 떨어진 병마용앞에서 내렸다. 내가 내릴때 중국인 아저씨 한명이 같이 내렸다. 그 아저씨는 나랑 같이 행동을 하고 싶은가 보다. 영어로 말을 하는데 영어 수준은...? 묻지 마라.. 그나마 약간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게 다행이다.

 그 아저씨이름은 '황...' 까먹었다. 그냥 황씨라고 부르겠다. 황씨는 30살이고 나와 같이 진시황릉에 올라갔다. 순박한 그에 표정이 마음에 들어서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았다. 집은 중국 남부에 있는 장쑤이고 사업을 한다고 한다. 서안은 이번에 3번째인데 서안에는 4일동안 있을 거라고 한다.

 황씨는 정말로 친절했다. 진시황릉은 입장료가 26위엔이다.. 좀 비싸다.. 진시황릉에서 내려오고 나갈려고 하니까 황씨가 잡는다. 중국어로 적혀있어서 미쳐 보지 못했던 부분도 황씨가 인도해 주었다. 중국에서는 요금을 낼때 가이드비가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모든 문화재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수 있는 것이다.

 황씨와 같이 중국어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도대체가 무슨말인지 알아야 듣지.. 그냥 웃으면서 쳐다보았다. 대신 우리와 같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던 사람을 사겼다. 홍콩옆에 있는 광동성에서 온 모녀인데 특히 어린 여자애는 귀여워 보였다. 우리과 새내기 수영이랑 무척 닮았다.

 황씨랑 모녀랑 이야기 하길래 나도 영어로 말하면서 끼어들었다. 여자애가 긴장하듯이 심호흡을 하고 나에게 영어로 이름을 물었다. 물론 영어로는 거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18살정도 보이는 그 여자애는 13살이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은 되지 않아도 같이 사진을 찍을 수는 있었다. 그 여자애의 엄마는 사진찍기를 싫어해서 계속 둘만 찍었다. 아마 외국인인 나와 이야기를 했다는 징표를 남기고 싶어서 그러했으리라..

 진시황릉에서 모녀랑은 헤어졌다. 모녀는 병마용으로 갈려구 하고 우리는 서안시내쪽으로 가기 때문이다.

 양귀비와 현종이 처음만났다던 화청지는 원래 안갈라 그랬다. 그런데 당연히 화청지를 가는줄 알고 있는 황씨에게 내가 화청지는 안보고 산시성박물관으로 갈거라는 의사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무대포 성격을 가진 황씨아저씨와 화청지에 들어갔다. 무려 40위엔(6000원)을 내고서 황씨는 가게에 뛰어갔다오더니 미네랄 워터를 나에게 권한다. 그리고 입장료에 사진을 찍는 기념품이 있는데 나보고도 찍으라고 한다. 물론 황씨의 돈을 내고..

 더욱 고마운거는 좋은 장소가 있을때마다 나보고 사진을 찍으라면서 사진기를 가져가서 찍어준다. 황씨는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아서 찍어 줄수도 없었다.

 이건 고마운거를 넘어서 너무 미얀할 지경이다.

 대신 황씨는 중국어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데 중국어 가이드의 설명을 내가 알아 들을 길이 없다. 그저 진지하게 설명하는 가이드의 표정을 보면 재미있다.

 화청지는 중국의 국민당의 총통 장제스가 있었던곳으로도 유명하다. 1936년쯤인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군에게 밀려 거의 괴멸의 위기에 있을때 공산당은 여기 화청지에서 과감하게 장제스를 납치하고 협상을 벌려 일본에 대항하는 제2차국공합작을 이끌어 낸다. 그래서 공산당이 힘을 키울 시간을 벌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기에 대략 이해가 간다.

 황씨는 내가 마오쩌둥, 주덕, 주은래, 덩샤오핑, 장쩌민, 리붕, 주룽지를 알고 있는것에 놀라는 눈치이다. 마침 김일성이 방문했던 사진이 걸려있기에 김일성이 너희의 친구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화청지에서 끝나지 않고 바로옆의 박물관으로 갔다. 역시 20위엔... 박물관의 테마를 잘 몰라서 그런지 어영부영 보고 나왔다.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 버스를 타고 우리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 웬 꼬마가 앉아있길래 장난을 쳐봤다. 친한척 하면서 영어로 물어보았다..

 하나도 모르길래 가이드북 중국어로 물어보니 13살이고 학교는 안다니고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그외에는 도저히 의사소통이 안된다.

 서안역으로 와서 황씨랑 아쉬운 작별을 했다. 황씨는 명함을 주면서 꼭 메일로 연락을 하라고 한다. 나도 황씨랑 헤어져서 아쉽지만 여행자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다.

 서안의 날씨는 너무 덥다. 그래서 낮에는 여관에서 자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바로 잠이 들었다.

 저녁 7시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서안역에 가서 기차표를 끊는 것이다. 중국어를 모르는 나에게는 정말로 고난이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가이드북을 통해 한자로 "오전, 직괘(보통열차), 자위관(목적지), 침대"라고 적었다.

 서안역의 매표창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짜증날수도 있지만 이럴때 중국인들과 부대껴본다는 생각을 했다. 무려 30분을 기다린것 같다. 그런데 여기는 새치기가 성행한다. 미리 앞으로 가서 틈이 생기면 돈을 들이밀면서 목적지를 말하는 것이다. 머.. 어딜가나 사람사는건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선 줄의 매표원은 좀 권위적이고 오히려 표사는 사람들을 혼내기도 한다. 내심 말이 안통하는 난 어쩌나 걱정을 했었다. 난 아까적은 글을 들이밀면서 씩 웃었다. 내가 외국인임을 알게된 매표원은 친절하게 기차의 종류를 알려준다. 결과는 OK.. 5일 11시 30분에 자위관으로 떠난다 표값은 185위엔이고 한 15시간은 가야할거 같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여관으로 돌아와서 CCTV를 봤다. 여기의 광고는 우리나라의 광고가 많다는것을 느꼈다. 보다보면 김희선이 나오는 광고도 있고, 강타가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지나가는데 특정 음료수를 지닌 여자애에게 다가가는 음료수 광고도 있고, 펠레가 나와서 소리지르는 국내에서도 나오는 광고도 있다.

 CCTV뉴스를 통해 어제(2일) 한국에서 월드컵을 기념하는 행사를 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먼 이국땅에서 그런 소식을 뒤늦게 알게된 나의 처지가 좀 슬프기도 했다.

 오늘도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잠에 들었다... 내일은 산시성박물관을 갈 것이다.

 

 진시황과 같이 묻혔던 웅장한 병마용

병마용과 함께..(원래 사진찍으면 안됨)

진시황능 꼭대기에서(규모가 어마어마함)

13살이라고 믿기지 않는 꼬마 여자애와 함께 (진시황능 정상)

 처음본 나에게 정말로 친절했던 황씨.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으로 유명한 화청지 연못에서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4 (서안2)

 7월 4일(목)

 잠을 일찍자서 그런지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났다. 할것두 없고 그래서 일단 서안에서의 아침 풍경을 보기로 했다.
일단 무작정 동쪽으로 향했다. 내가 있는곳은 서안의 성내였었는데 성벽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동쪽 성문을 벗어나니까 바로 공원이 있었다.

 알고보니 성벽 밖에는 모두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사람들이 나와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데 대부분이 아침운동을 나온 노인들이다.

 여기는 마치 축제를 하는것 같았다. 여기저기 모여서 무술을 연습하고 음악에 맞쳐 춤을 추고,..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팽이 비슷한것을 명주실로 연결된 막대기를 휘둘로 공중에서 돌리는것인데 일단 거기서 나는 소리가 정말로 신기했다. 저 물건의 이름이 머냐고 물어봐서 알아보니 '펑골'이라고 한다.

 공원안에는 많은 새장들이 있었다. 새를 키우는게 취미인 노인들이 저마다 새들을 가져와서 키운 뽑내는거 같았다. 덕분에 공원은 아름다운 새소리와 음악소리의 하모니가 연주되는 장소가 되는듯 했다.

 아침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마침 어제 과도한 입장료와 기차표로 위엔화가 다 떨어져서 중국은행에 가서 환전을 하기로 했다. 환전은 쉬웠다. 달러를 가지고 중국은행에 가면 환전을 해준다. 직원들도 어느정도 영어가 통했다. 아싸.. 환전에 성공,, 환율은 100달러에 129위엔 3일전보다 3위엔 떨어져 있었다.

 난 평소에 목걸이를 하지 않다가 이번 여행내내 목걸이를 하고 있다. 바로 여권과 us달러와 신용카드가 있는 지갑은데 만약에 내가 이걸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여권없이 귀국도 못하고 특히 타지에서 여권을 재발급 받으로 한국영사관으로 갈수 있는 돈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행에 있어서 가장 주의해야될 부분이다.

 특히 어제 돈을 세어보는데 100달러가 비는걸 발견했다. 100달러면 우리나라돈으로 12만원이고 이곳 봉급자의 거의 3달치 월급이다. 왜 비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조심하라는 수업료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궁굼해 하는 이를 위해.. 현재 난 us 1456달러를 가지고 있고, 800위엔 조금넘게 가지고 있다.

 다시 여관으로 가서 산시성역사 박물관으로 갈 준비를 했다. 5번 버스를 타야하는데 어디서 타는지 알길이 없었다. 지나가는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할아버지는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는거 같았다. 그래서 '한궈(한국인)'이라고 대답하니까 무척 신기해 하는 모양이다. 의사소통이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 할아버지도 몰라서 주위 친구를 불렀다. 그친구도 몰라서 또 다른친구를 부르고, 또 2명이 더 불리고.. 내 주위에 5명이 모여서 열띤 토론을 펼쳤다. 물론 난 그냥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결국에는 한 할아버지가 손수 큰길까지 데려가서 가르켰다. 그리고 5번 버스를 타는곳을 찾았다. 서안 시내에서는 일률적으로 1위엔이다. 난 버스기사에게 가이드북에 있는 한자를 가르키면서 목적지를 말하니까 버스위에 달린 전광판을 보라고 한다. 음.. 버스에 그런 최신시설도 있다니.. 전광판에는 목적지를 영어로 표시한다. 난 기사뒤에 있으면서 지켜보았다. 버스는 영락없는 우리나라 80년대 버스이지만 앞에 전광판이 있고 운전석 옆에는 뒷문을 보여주는 cctv가 설치된것이 이채로워 보였다.

 여기 버스기사는 정말로 힘들어 보인다. 중국에서는 신호등이 필요없다. 사람도 자전거도 무질서하게 길거리를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고는 잘 안일어 나는것 같다. 여기 버스기사는 운전도 해야하고, 타는사람에게 일일이 요금확인도 하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자전거와 사람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야 하고.. 와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버스기사는 여자이다. 중국에서는 여자가 이렇게 일하는것이 전혀 새롭지 않고 당연하다. 그리고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소리를 빽 지른다. 우리나라보다 여권이 신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버스는 완전히 사람이 꽉 차서 무척 더웠다. 옆에 할머니가 나에게 뭘 물어보길래 '한궈'라고 대답했다.. 무척신기해하는 모양이다. 주변사람들이 나만 쳐다본다. 표정으로 할머니와 친해질 수 있었다. 산시성 역사 박물관에 다다르는 순간 나보고 내리라고 가르쳐 주었다. 중국인들은 외국인에게 친절하다는것을 깨달았다.

 산시성역사박물관은 중국에 여행갔다온 사람들 말에 의하면 가장 잘된 박물관이라고 한다. 입장료는 35위엔이다. 바로앞에 중국 학생이 학생증을 보여주니 15위엔에 표를 준다. 혹시나 해서 그동안 방치했던 국제학생증을 보여주었다... 이럴수가!!! 통하는것이 아닌가.. 액수를 떠나서 통용되는거 자체에 기쁨을 느꼈다. 15위엔으로 훌륭한 박물관을 볼 수 있었다.

 박물관안에는 많은 외국인이 있었는데 한국인은 찾아볼수 없었다. 선사시대부터 청나라까지의 유물이 총 망라되어 있다. 중간에 중국인 한명이 나에게 말을 건다. 영어가 꽤 유창하다. 나도 같이 영어를 하면서 나의 영어실력이 꽤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나의 영어능력은 100%이상을 발휘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박물관 영어가이드라서 영어를 잘 한다. 한국인은 이 박물관을 4번째로 많이 방문한다고 한다.

 박물관 구경을 끝내고 나오니 정말로 더웠다. 특히 여기는 내륙지방이라 더욱 그랬다. 더위에 강한 내가 땀을 뻘뻘 흘릴정도이니.. 일단 근처의 대안탑으로 갔다. 물론 20위엔의 입장료를 내고... 대안탑은 7층이나 되고 당나라때 만든것이다. 시설도 잘 되어 있어서 바로 옆의 절에 들어가서 문화재를 구경할수 있었다.

 탑을 구경한후 다시 여관으로 들어갔다. 너무나 더워서 그냥 자 버렸다.

 일어나니 7시다.. 이제 여기 글을 올리는 작업을 할려고 시도할 차례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글을 쉽게 읽지만 이 글을 쓸때까지 정말 눈물 겨웠다. 먼저 길을 나와서 한참 걸었다. 중국인들에게 PC방을 물어보았지만 나의 말을 이해할 턱이 없었다. 그렇게 시내를 헤메다가 혹시 유학생들을 만나면 알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길을 가다 보니 KFC가 보였다. 이곳 물가에 비해 비싸기는 하지만 내일 자위관으로 가면 더이상의 패스트푸드점은 당분간 보기가 힘드니 저녁이라도 먹자는 식으로 들어갔다. KFC에서도 거의 영어가 안 통한다.. 내가 영어로 이야기 하니까 점원이 다른사람을 불르더니 그 점원을 통해서 겨우 주문을 시킬수 있었다.

 내가 앉은 옆자리에는 여자2명이랑 남자 1명이 먹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그들에게 PC방을 물어보았다. 타자치는 시늉을 하니까 남자애가 알아들었다. 중국어로 피시방은 "왕빠~"라고 한다. 여자애 한명이 영어를 좀 아는지 나에게 긴장하며 말을 건다. 간단한 소통이외에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남자는 20살이고 여자1명은 22살, 또 다른 여자애는 20살이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피시방까지 안내해 주었다. 시간당 2위엔.. 글을 쓰기에 괜찮다...그런데 한글 로밍 프로그램을 깔아도 실행이 되지 않는다. 컴퓨터에 프로덱터가 걸려있어 깔아서 재부팅 해봤자 다 지워지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특성상 재부팅은 반드시 해야한다...

 도대체 미치겠다. 주인에게 먼저 설명을 하니까 못알아 듣는다. 그래도 친절하게 다른사람들이 도와줬는데 다행히 영어를 조금하는 아저씨가 내 옆에 쭉있으면서 도와줬다. 프로그램이 실행되지 않는 과정과 그것을 위해서 컴퓨터에 들어있는 프로덱터를 해제해야된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무려 15분이 걸렸다.

 이 아저씨가 문제를 알고 주인에게 알려왔을때 돌아온 대답은 sorry였다. 대신 아저씨가 나랑 나가더니 택시를 잡고 뭐라고 하면서... 글로 가면 된다고 한다. 택시는 대형 피시방으로 갔고 거기서 컴을 할수 있었다. 역시 프로그램이 깔리지 않았지만 다행히 영어가 유창한 대학생이 있어 쉽게 해결하고 이렇게 글을 쓸수 있었다.

 내일이면 자위관으로 간다. 자위관은 만리장성의 끝부분이다. 거기서도 글을 쓸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루하루 지나면서 참으로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한다고 느꼈다. 오늘 내가 도움을 받은 중국인은 정말로 많다. 그들에게 정말로 감사할 뿐이다..."쎄쎄'


마치 축제를 보는 듯한 장안성벽의 아침 풍경

양손에 줄을 잡고 팽이 같은 물체(펑골)를 돌리는데 이상한 소리가 난다.

산시성 박물관에 있는 거대한 사자상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5 (서안~자위관 기차안에서)

 7월 5일(금)

 4일 밤 늦게까지 피시방에서 글을 썼었다. 일기를 놔두고 궂이 인터넷 상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혹시나 여행중에 무슨일이 생겨서 나의 기록들이 소멸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다.

 숙소로 돌아오니까 새벽 4시 였다. 여기서 난 선택의 길목길에 서야 되었다. 자위관으로 가는 침대기차가 11시반에 출발한다. 적어도 10시에는 체크아웃을 해야 하는데 피곤한 상태에서 혹시 늦게 자지 않을지 걱정되서 그랬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밤을 세기로 했다. CCTV를 보면서 밤을 지샜다. 졸리기는 했지만 견딜만 했다. CCTV5 스포츠 채널을 보는데 미국 메이저리그를 방영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까 김병현이 있는 애리조나 이다. 덕분에 심심치 않게 시간을 떼울수 있었다. 물론 김병현의 22세이브와 함께...

 김병현이 세이브를 올리고 나서 바로 갈 준비를 했다. 배낭을 꾸리고 체크아웃을 하러 갔다. 중국의 여관이나 호텔에서는 '야진'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여관비 외에 일종의 담보를 맡기는 것이다. 이 여관에서는 50위엔의 야진이 있었는데 아무 탈 없이 받을 수 있었다.

 역으로 나갔다. 역시 많은 호객꾼들이 날 맞이 했다. 그들을 뿌리치고 일단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서 중국어 가이드책을 보면서 밥을 시켰고 반찬은 직접 가서 골랐다. 그런데 반찬의 양이 어마어마한것 이다. 난 조금만 나올줄 알았는데 과도하게 많이 주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해보니까 29위엔...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다짐을 했다.

 서안역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서양인 2명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남자, 여자 1명씩인데 키가 무척컸다. 아마 190은 족히 넘어보였다. 혹시나 싶어서 말을 걸었다.

 그런데 나랑 목적지가 같은 자위관으로 가고, 기차도 나랑 같은 기차이다..!! 이런 우연이.. 그들은 내 옆 차에서 여행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여행 동료를 얻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인이고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한다. 이것도 정말 기막힌 운명이다. 나도 1~2년 안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운명이 아닌가!! 많은 우연에 우리는 더욱 친해졌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난 여행을 하면서 만난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런걸 느낀다. 모두다 내가"koream", "한귀~"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축구 이야기를 한다. 거의다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대단하다고 표시한다.

 네덜란드 사람인 그들과 축구 이야기로 부터 시작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중국의 공안(경찰)로 보이는 사람이 따라오라고 한다. 무슨일인가 싶어서 가보니 우리를 외국인 대기소로 안내해준 것이다.

 외국인 대기소는 외국인만이 갖는 특권이다. 혼잡한 역안을 피해서 외국인 대기소는 쾌적하고 사람도 적게 있다.
방안의 동양인은 나 밖에 없었다. 대기소에는 스페인인과 독일인이 있었다. 스페인인들이 소란을 피워서 우리 일행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난 네덜란드 동료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영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교육환경에 대해서도 물어 보았다. 네덜란드는 학급당 인원수가 26명정도 되고 아무리 학생수가 적더라도 복식학급은 절대 없다고 한다. 그리고 한명의 선생님이 거의 모든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다.

 예비교사의 입장에서 네덜란드의 교육환경이 정말로 부러웠다.

 마지막으로 기차를 타기전에 자위관까지 가는데 몇시간정도 걸리냐고 물어보았다. 내 생각에는 17시간이면 될줄 알았는데 그들의 대답은 28시간이라는 것이다...
오~예... 순간 난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기차에 탔다. 이번에 탄 기차는 북경에서 출발하는 열차와는 달리 중국의 일반인이 많이 타는 열차이다. 쾌적함은 떨어지겠지만 중국인들과 친해지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리라.

 나의 좌석을 찾고나서 어리둥절하게 있는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영어로 말을 건다. 모처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뻤다. 그 아저씨의 이름은 이홍셍이고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아저씨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30살이다. 결혼은 5년전에 했다고 한다.

 우리 둘이서 차창에 앉아서 2시간정도 이야기 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본다. 외국인인 내가 신기해 보였나 보다.
축구 이야기 부터 시작해서 중국 사람들이 갖는 한국에 대한 생각을 물어 보았고, 또한 이홍셍이 궁굼해 하던 한국에 대한 것들을 대답했다.

 이홍셍과 대화가 끝나고 내 침대에 앉았다. 중국의 침대는 3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낮에는 주로 1층침대에 앉아서 지낸다. 자연스럽게 3명의 중국인과 이야기 할수 있었다. 한명은 27살이고 우루무치로 간다고 한다. 또한명은 24살이고 같은 일행이었다. 이들과의 대화는 거의 되지 않았다. 나머지 한명이 22살이고 공대에 다닌다고 한다. 그나마 영어가 통하는 대상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개를 했다. 그런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그런지 대화가 자주 끊겼다. 나를 뺀 3명은 포카를 꺼내더니 카드놀이를 하는 것이다. 중국식 카드 놀이인데 뭔게임인지 알길이 없었다.

 어렸을때 즐겼던 원카드가 생각이 나서 그들에게 바디 랭귀지로 설명을 했다. 금방 알아들은 모양이다. 즐겁게 한국식 카드놀이를 할 수 있었다.

 카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연예인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중국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안재욱', '김희선', 'HOT'를 알고 있다. 난 조금 잘생긴 청년에게 '어? 안재수~(안재욱)"라고 했다... 그는 부정하면서도 매우 좋아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드디어 말이 안통하는 중국인과 대화 할 수 있는 이슈를 발견했다. 바로 동양의 베스트 셀러 삼국지 이다. 물론 우리가 부르는 삼국지의 이름과 중국인이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를 하는데 더욱 재미있었다. 내가 한국식 이름으로 말하면 우리 일행은 커다란 고민을 해야 했다. 과연 내가 누구를 말하는지 그들이 나의 발음과 바디 랭귀지를 통해서 추측을 했을 뿐이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나마 영어가 유창한 이홍셍이 나의 말과 중국 청년들 사이를 통역을 해주어서 지겹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서 알게된 삼국지의 중국식 이름은 다음과 같다..(이걸 아는데 엄청난 시간이 들어감...)

 유비-류삐, 관우-콰이유, 장비-장삐, 제갈량-쪼우갈량, 손권-손촨, 맹획-멍호아(이걸 알았을때 제일기뻤다.. 설명하는데 젤 어려웠음), 공손찬-공쏘우차, 조조-차오차오, 주유-조우유, 마초-머처, 여포-류빠, 하후돈-샤오둔, 하후연-샤오안, 정욱-조우윤, 원소-완소, 원술-완술, 여몽-류망, 감녕-갬념, 사마이-스바이, 육손-룩수....

 삼국지 이야기와 많은 중국의 인물을 서로 맞쳐가며, 또한 한국의 축구선수를 맞추어 가며 즐겁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그들과 내가 동화 되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차창밖의 풍경은 완전히 별 천지였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풍경이다. 이렇게 산이 없고 넓은 땅이 있을까?.. 감탄을 했다.

 잠을 못자고 밤을 새서 그런지 매우 졸렸다. 나랑 이야기 하던 청년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잠을 잤다.

 일어나니 저녁 6시정도 되었다. 그런데 기차밖의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완전히 산으로 둘러쌓인것이다. 아.... 이곳이 중원과 서역을 연결하는 '하서회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웅장한 산에 둘러쌓여 장관을 이루었다.

 기차안을 둘러보니 출발할때 부터 아무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다. 궁굼해서 이홍셍을 통해서 말을 걸어 보았다. 난 이미 기차안에서는 인기스타가 되어 있어서 아무한테나 말을 걸어도 웃으면서 답해주었다. 하긴... 외국인인 내가 먼저 나서서 말을 걸고, 가끔가다 오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도 거부감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나 보다.

 그 여자는 24살이고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라고 한다(이홍셍이 Middle라는 단어를 몰라서 이해시키는데 힘들었다.) 중국의 동쪽해안 항저우에 사는데 우루무치로 여행중이라고 한다. 항저우에서 시안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서안부터는 기차를 타는 것이라고 한다.

 한눈에봐도 딱딱한 선생님 타입이었다. 우리는 별 이야기 없이 이야기가 끊어졌다.

 내가 있는 옆방에는 많은 대학생이 있었다. 그중에 한 여자애가 앉아있기에 말을 걸었다. 학교는 대학에 다닌다고 하는데 영어를 거의 못한다. 이홍셍이 그나마 통역을 해주어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 여자애는 나랑 이야기 하는게 즐거웠나 보다. 이름은 루동리이다. 나이는 22살이고 돈황으로 일하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대학생인데 돈황의 호텔에 일하러 간다기에 이해가 안가서 전공이 뭐냐고 물어 보았다. 전공은 정유쪽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쪽의 일이 일자리가 없어서 돈황으로 일하러 간다고 한다. 한달에 1000위엔씩 받고 3년동안 일을 한다고 한다. 물론 대졸이라서 그나마 많이 받는거지만 고급 인력을 호텔 종업원으로 유출하는것도 그렇고, 한달평균 15만원이라는 것에 씁씁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한국의 연예인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인기 연예인은 물론 내가 잘 모르는 류승범까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의 연예인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했고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던 이홍셍이 피곤하다며 자신의 침대로 갔다. 모처럼 이쁘장하게 생긴 여자애랑 이야기를 했었는데 생각하며 아쉬했지만 중간의 통역이 없어진 이상 어쩔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자기 침대로 가더니 공책과 볼펜을 가져오는 것이다. 알고보니 루동리는 영어를 못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나보다 잘한다. 그런데 말하기가 전혀 안되는 것이다.

 그녀가 공책에 영어로 질문을 하면 내가 영어로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하다가 답답해서 영어로 대답하라고 하면 이건.. 도저히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중국에서는 영어 교육을 시키기는 하지만 읽기와 쓰기만을 시킨다고 한다. 말하기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는 영어는 잘하지만 그것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영어로 말을 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중국인에게 영어 말하기를 가르쳐 주는게 정말로 어렵다는것을 금새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27개의 글자를 가지고 조합을 해서 단어를 만든다. 예를 들면 'ㄱ'과 'ㅏ'를 합치면 '가'가 되고 우리는 '가'라고 쉽게 발음을 할 수 있다. 영어도 그와 마찬가지로 's'와 'a'가 합쳐지면 우리말로 '사'라고 발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어는 다르다.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뜻과 의미가 있기 때문에 단어를 조합을 해서 말을 한다는 개념 자체가 형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teacher'을 'tea(티)' 'cher(쳐)로 영어 단어를 조합을 해서 읽을 수 있지만 중국인은 'teacher'자체를 하나의 의미로 인식 하고 있기 때문에 발음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Denmark'를 처음보는 사람도 우리는 덴마크라고 읽으면서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중국인은 그 단어를 배운적이 없기 때문에 읽지를 못하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이다.

 루동리는 중국의 엘리트답게 나의 설명을 이해할수 있었다. 개념을 이해시키고 나니 그 다음의 진도는 정말 빨랐다. 이미 배운 영어가 있기 때문에 그러리라..

 이야기를 하면서 난 그녀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3년동안 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여유가 되면 티벳을 여행하고 싶다고 한다. 외국으로의 여행은 계획이 없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아직 중국에서는 해외여행은 극히 일부만 가는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자기도 많은 여행을 하고 싶지만 경제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다.

 난 여기서 우리나라의 60~70년대 대학생들의 생각을 루동리의 생각을 옅볼수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암울했던 그때 현실과 경제적인 문제로 자신의 의지와 떠나고픈 욕구를 눌러야만 했던 그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이렇게 내 의지대로 여행할수 있게 만들어준 그들 세대에게 정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루동리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구체적인 숫자를 들어서 중국은 빠르게 발전을 하고 있고, 10~15년 정도 후에는 한국보다 더 잘 살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다.

 이야기를 하면서 루동리는 날 통해서 자유로움을 맛보고 있었고, 그래서 나와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불이 꺼졌다. 침대 기차에서는 10시정도가 되면 불을 끄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이 켜져 있는 차량이 연결되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좁은 통로에서 공책으로 쓰면서 이야기 하는게 힘들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그녀는 자신이 미래를 위해서 준비할게 머냐고 물어보았다. 난 영어라고 대답을 했다. 한국의 영어열풍을 소개를 하고 중국의 경제가 커지면 외국과의 거래가 급증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영어가 유창한 인물이 많이 필요하게 될거라고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인은 나라 이름을 비롯해서 'asia', 'africa'는 물론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단어도 모른다. 모두 자기식대로 해석을 해서 쓰기 때문이다. 대국의 오만함이랄까... 예를들면 월드컵은 '쓰제배(세계배)"라고 한다.

 만약에 루동리가 영어에 능통하고 외국인과의 이야기를 할려면 이것부터 고쳐야 된다고 말하고 나라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루동리가 공책에 중국식 나라이름을 쓰면서 발음을 한다. 그러면 난 'world'식 발음을 하면서 적어준다. 이렇게 해서 30개 정도의 나라를 알 수 있었는데 이것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특히 그녀가 '단마'라고 발음한거는 도저희 추측할 길이 없어서 세계지도를 그려가면서 겨우 찾았다. 알고보니 '덴마크'이다.

 그녀는 'china is winter'이라고 썼다. 지금의 중국의 현실에 대해서 많이 답답한 모야이다. 그렇지만 난 'spring come to you soon'이라고 바로옆에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의 기차는 가끔가다 크게 흔들린다. 특히 지금처럼 주로 서민들이 타는 기차는 그 정도가 심한데 둘이 공책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 갑자기 기차가 크게 흔들렸다. 때문에 우리 둘은 서로 껴안는 꼴이 되고 말았고 그런채로 5초동안 있었다.
이럴수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3류 로멘스가 나한테도 일어나다니!!

 우리는 잠시 어색했지만 둘다 싱긋 웃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주는 그녀가 고맙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그녀가 눈을 스스르 감는 것이다.

 그 다음은...?

비밀이다...!!!


 아니다... 오해할까바 적어야 겠다. 그 순간에 기차 승무원들이 지나가는 것이다. 기차안의 높은 사람이 집합을 걸었나? 중국의 기차에는 생각보다 많은 승무원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25명은 지나간거 같다.
승무원들이 다 지나가고 나서 그녀에게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이야기를 많이 하자고 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먼저 들어 갔다.

 그녀가 가고 나서도 아쉬움과 뿌듯함이 교차했다.
만약에 승무원들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그래도 난 아무 행동도 안했을것이다. 그녀가 눈을 감는 순간에 난 지나가는 여행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려고 먼길을 가는 그녀에게 그리움이라는 것을 심어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날 좋아하는게 아니라 동경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움과 뿌듯함이 교차하는 가운데 내 침대에 누웠다. 물론 잠이 금방 올리는 없겠지만 귀에다가 이어폰을 꼿고 평소에는 절대 듣지 않는 우리나라 가요를 들으면서 잠 들 수 있었다.

 이렇게 나에게 많은 사람과 경험을 안겨준 기차는 자위관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여행은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나의 목적지 이스탄불은 가까워진다.

 누가 뭐래도 여행의 목적지는 가면 갈수록 점점 가까워진다. 고로 난 오늘도 여행을 한다.

 서안역에서 우연히 만난 네덜란드 인.. 사진은 서안역 안에 있는 외국인 대기실..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던 중국인 여인 '루동리'

문득 차창 밖을 보았을 때 점점 주변 풍경이 건조해 진다는 것을 느꼈다.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6 (자위관)

 7월 6일(토)

 달리는 기차안에서 깨었다.
 어제 늦게 자서 그런지 오전 10시쯤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앞에 있는 3명의 친구들과 누가 더 잘 생겼느냐를 주제로 논쟁을 했다. 난 제일 연장자한테 안재욱 닮아서 제일 잘생겼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3명은 계속 내가 잘생겼다고 우기는 것이다. 이글 썼다고 제발 왕자라고 보질 말길.. 진까 논쟁했음..물론 바디 랭귀지로)

 어제 루동리와의 일이 생각나서 바로 옆 침대칸으로 찾아갔다. 덕분에 그쪽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루동리를 포함해서 7명인데 모두 같은 학교 같은과이고 돈황으로 3년동안 일하러 간다고 한다.

 남자는 2명인데 더워서 그런지 둘다 웃통을 벗고 있다. 중국에서는 배가 나온 사람도 더우면 웃통을 벗고있는것이 자연스러운가 보다.

 의외로 많은 한국연예인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 3시간정도 이야기를 했다.

 중국의 기차를 타면서 느끼는 것인데 중국인들은 기차를 타면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쉽게 말을 걸고 친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5~6시간 같은 의자에 앉아도 한마디 말을 하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과는 다른점중에 하나이다.

 아무래도 며칠씩이나 하는 긴 여정을 가야하는 중국인들이 즐거운 여행이 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화라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말이 통하지 않는 나도 즐겁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자위관역이 가까워지고 오후 3시쯤에 이홍첸이 나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간다며 인사를 하러 왔다. 우리는 아쉬워서 서로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다시만날것을 약속하면서 헤어졌다.

 드디어 오후4시.. 28시간의 기차여행이 끝나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아쉬움이 더 했다. 기차안에서 사귀게된 내 또래의 친구들은 10명이다. 내가 갈려고 하니까 아쉽다면서 내 이름과 이메일을 적어간다. 그리고 기차문에서 나와 플래폼에까지 배웅을 해준다. 고마운 친구들...

 자위관 역에서 네덜란드 친구들과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꼬마애들이 하루종일 자기주위에서 놀았고 잘때는 윗 침대 사람이 엄청난 소리로 코를 골아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공기의 느낌이 내가 살아오던 곳과 확실히 다르다. 역시 사막지역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하서회랑을 지나서 사막지역으로 들어선 곳이다.

 자위관은 계획된 도시 답게 잘 정돈이 되어 있고 여태까지 본 도시중에 제일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서 시내로 들어왔다. 버스비는 무조건 1위엔이다. 버스를 타는데 귀엽게 생긴 중국 여자애들이 큰 마음을 먹고 그러는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우리에게 영어로 말을 건다.

 내용은 간단한 이야기인데 여자애 둘이서 말을 할때마다 큰 숨을 쉬어서 우리 일행은 재미있게 시내로 들어갈수 있었다.

 자위관 시내에서 숙소를 잡았다. 서양사람들은 어떻게 숙소를 잡을까 궁굼해서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역시 네덜란드인의 꼼꼼함을 엿볼수 있었다. 먼저 가이드북에 적힌 호텔로 들어가서 제일싼 방을 물어보았다. 28위엔 부른다.

 그리고 미련없이 다른호텔로 가서 가격을 묻는다. 3인실에 1인당 30위엔(한화4500원).. 그리고 방을 직접 확인하고 샤워시설이 없는것을 보고 미련없이 가방을 다시 멘다.

 우리가 갈려고 하니까 종업원이 우리를 잡더니 더 좋은 방을 30위엔에 주겠다고 한다. 가보니 샤워시설이 있고 쾌적한 방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이렇게 좋은 방을 싸게 얻을수 있구나... 난 속으로 감탄을 했다. 오케이.. 앞으로 써먹어야지

 우리는 한사람씩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로 갔다.
이곳 자위관에서 부터는 가끔 이슬람인들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간 식당이 이슬람식당이다.

 외국인인 우리가 신기했는지 메뉴를 주문하는데 사람들이 재밌다는 듯이 모여든다. 몸짓과 필담으로 주문을 했다.

 내 옆에 터번을 쓴 할아버지가 있기에 눈을 찡긋 거리면서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한궈(한국인)"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다리를 막 흔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엄지손가락을 드는 것이다.

 한국 축구 굿.. 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여행을 하면서 모든사람들이 나를 처음 보면 하는 이야기가 한국 축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먹기 힘든 양고기를 시키고 우리 일행은 서로 소개를 했다. 그 둘의 이름은 까먹었다. 수첩 어딘가에 적혀 있겠지..

 우리는 네덜란드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했다. 평소에 먼나라이웃나라를 읽었던 것이 크게 쓸모 있었다. 그들은 내가 네덜란드 역사와 풍물을 잘 알고 있는것에 놀라는 눈치이다.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틀린영어를 쓰면 그들이 고쳐주고 가르쳐 주었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식사가끝나고 계산을 하니 3명이서 배부르게 고기를 많이 먹었는데도 30위안(4500원)밖에 안한다. 역시 물가가 싸긴 싸구나..

 사막지역인데 마침 비가 온다. 이곳이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는 것은 비가오는데도 우비나 우산을 쓰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pc방에서 오랫만에 메일을 확인했다. 그런데 메일을 쓸수가 없다. 이곳 피시방은 프로그램을 임의로 깔지 못하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네덜란드 친구들은 여자도 아무렇지도 않게 잠옷 차림으로 자는 것이다. 머.. 자연스러운거니까 낯뜨거운 티를 내지 말아야지..

 네덜란드 남자가 마돈나 정품CD를 꺼내더니 5위안(한화750원)에 샀다고 한다.. 아.. 이런방법도 있구나.. 좋아하는 가수의 정품을 살수 잇는 좋은 기회를 북경과 서안에서 날려버린 것이다. 혹시 다음에 중국에 여행을 하면 많이 사야겠다.

 7월 7일(일)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자고 있는 여행친구들을 깨우지 않을려고 복도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 화장실은 칸막이가 있으나 마나이다. 1M도 안되는 것이다. 혹시나 사람들이 올까마 조마조마하며 큰일을 보았다.

전체적으로 여행이 늦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서둘려고 했다. 이대로라면 이스탄불에 도착했을때 개강하고도 몇주 지날거 같기 때문이다.

 아침을 거르고 호텔 체크 아웃을 한 후 관광지를 보러 갔다. 네덜란드 친구들은 하루더 있을 모양이지만 원래 아침을 먹지 않는다며 나와 같이 밖으로 나왔다.

 택시는 비쌀거 같아서 삼륜 오토바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삼륜 오토바이는 너무 좁아서 나 혼자 한대와 네덜란드 커플 1대를 타 기로 했고 자위관까지 5위안에 가기로 했다. 물론 흥정을 하는데 우리 주위에 사람이 몰려 들어서 구경을 했다.

  자위관은 만리장성의 가장 서쪽의 요새로서 견고한 성채를 자랑하고 있다. 요금은 40위엔이지만 국제학생증을 제시하니 20위엔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네덜란드 남자는 40위엔을 내라고 하자 그냥 숙소로 돌아갈려구 한다.. 그러니까 매표원이 그냥 20위엔에 들어가라고 잡는 것이다.

 자위관은 정말로 견고해 보였다. 역시 이민족들을 막기위한 중국왕조의 의지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성채는 말을 타고 올라갈수 있도록 계단과 함께 경사진 비탈길을 만들어 놓았다.
마치 건물들에서 장애자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을 보는듯 했다. 원조가 바로 여기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 일행이 자위관에서 나오니까 아까탔던 오토바이와 택시가 우리를 부른다.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현벽장성에 가고 도시로 돌아오는데 20원 달라고 한다.. 과감하게 우리는 길을 걸었다.
그런데 가깝다고 생각한 현벽장성이 아무리 걸어도 나오지 않는다.. 나중에 알고보니 12킬로 떨어진 것이다. 히치라도 해서 갈려고 하니까 잘 되지 않는다.

 그냥 막막히 서있을때 오토바이 한대와 택시 한대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알고보니 아까 우리와 흥정을 했던 택시이다.. 우리는 다시 표정 관리에 들어가서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택시는 3명에 30위엔이라고 하며 그 이하는 힘들다고 한다. 우리는 상의를 해서 수락하기로 했다.

 자위관에 이어서 현벽장성으로 갔다. 여기는 8위안밖에 안해서 할인이고 뭐고 없었다. 현벽장성은 자위관보다 더 괜찮았다. 산 꼭대기까지 장성을 타고 올라가는게 힘들기는 하지만 올라가서 본 자위관시의 모습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장성을 올라가면서 장성이 그어놓은 중국쪽과 이민족쪽의 땅을 보았다. 중국쪽의 땅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초원과 오아시스.. 그리고 사막이 어우러져 있으며 이민족쪽으로는 오직 험한 산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아무래도 중국민족의 욕심히 과한듯 싶다. 혼자서 좋은 땅만 차지할려구 하니까 유사이래 매일 이민족 침략을 당했지..

 현벽장성 관람후 다시 자위관 시로 왔다. 네덜란드 친구들은 점심을 먹으로 가고 난 곧바로 만리장성 제일돈을 보러 갔다. 보러가기전에 그동안 짧지만 정 들었던 그들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인사를 했다.

 나혼자 만리장성 제일돈을 가는데 왕복 10위엔에 오토바이 운전자와 합의를 했다. 물론 2위엔정도 깍았다.

 만리장성 제일돈은 시내와 의외로 많이 떨어져 있다. 10킬로정도 떨어져 있는데 오토바이 아저씨는 험한길을 갈때 뒤에 내가 불편해 할까바 조심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마웠다.

 만리장성 제일돈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고 거꾸로 말하면 처음 시작되는 곳이다. 거기에 도착하니까 멋진 치렌산맥이 펼쳐지고 한국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50미터 절벽이 바로 앞에 펼쳐졌다. 정말로 장관이고.. 무엇보다도 공짜라는 점이 좋았다.

 거기서 오랫만에 한국사람을 만났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족인데 사업을 한다고 하며 혹시 무슨일이 있으면 자기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라며 명함을 준다.

 전화걸일은 없겠지만 마음만이라도 정말 고맙다.

 조선족 아저씨의 일행이었던 홍콩인 2명도 사귀게 되었다. 영어가 유창해서 이야기가 잘 통했고, 나와 같이 사진을 찍었다.

 만리장성 제일돈을 보고 자위관 버스터미널로 왔다. 돈황으로 가기위해서인데 그때 마침 네덜란드 친구들이 오는게 아닌가..^^
그들은 내가 세면도구들을 놓고 와서 버스시간표를 보고 내가 버스타는 시간에 갖다 줄려고 했다고 한다. 고마운 사람들...

 그들에게 만리장성 제일돈이 정말 괜찮다고 전하고 아까 타고온 오토바이 운전자와 흥정을 해 주었다.

 자위관 버스터미널...

 한마디로 짜증났다. 가이드 북에는 돈황까지 28위엔이라고 되어있는데 66위엔으로 가격이 올라 있었고 무엇보다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30위엔을 더 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30분 동안 싸웠지만 아무런 결론도 낼 수 없었다. 자위관에서 버스터미널은 하나이므로 어쩔수 없이 거기를 이용해야 된다.

 잠시 나와서 점심을 먹었다. 국수 한 그릇에 1.7위엔 밖에 안하다. 근데 먹고나면 배부르다.

 힘들겠지만 기차역으로 가기로 했다. 기차를 타면 돈황까지 류위안역에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악덕 버스터미널에 돈 퍼주는건 더 싫었다.

 기차역에 가니 매표원은 정말 친절했다. 그리고 기차역에서 좀 잘 사는 듯한 3명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그들과의 영어는 나나 그들이나 영어실력이 뻔하니까 그렇게 어렵지 않게 대화할수 있었다.

 그들중 한명은 내 배낭 가격을 물어보았다. 150위엔이라고 하니까 자기는 미제를 샀는데 150달러를 한다고 한다. 무려 8배 차이이군.. 그러면서 미제 텐트를 자랑을 했다.

 잘살면 과시하는것은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감탄하는척 해주었다.
자위관역 공안(중국경찰)과 금방 친해질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축구 이야기를 하면서 너도나도 나한테 말을 거는 것이다.

 여기서 역장이랑 사진을 찍을수도 있었다.

 기차표는 류위안역까지 23위엔이다..
공안2명의 배웅을 받으며이렇게 자위관을 떠났다.

 

 식당에서 한국축구에 열광한 이슬람 할아버지

 서역지방으로의 마지막 관문 자위관

만리장성의 서쪽끝을 실감할 수 있는 현벽장성

 만리장성이 끝나는 지점에는 사진처럼 어마어마한 낭떨어지가 있다.

 자위관 역에서 사귀게된 홍콩 친구들

 자위관 역장님이라고 한다. 공안이지만 무척 친절했다.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7 (자위관~돈황기차여행)

 7월 7일(아까꺼 이어서..)

  류위안으로 가는 기차는 가장 서민들이 타는 기차이고 딱딱한 의자이다. 게다가 입석이다.
그렇지만 걱정 안해도 된다. 입석이라도 자리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아무데나 앉아도 되는 것이다.
난 젊은 남자애들 2명이 있는 좌석에 앉았다. 이제 기차에서 사람들이랑 친해지는 법을 알게된 난 축구, 삼국지, 중국인물, 한국가수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의사소통을 했다. 나랑 이야기하는 2명은 영어를 전혀 못하지만 이제는 그런건 상관없다.

 내가 탄 기차칸의 모든 사람들이 날 쳐다본다. 외국인이 먼저 나서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말걸고 그러는게 신기한 모양이다. 머 이젠 그런건 익숙해졌다.

 기차안은 정말 덥고 특기 너무 건조했다. 사막지역을 지나서 그런것이다. 기차안에서 많은 물을 마셨다. 차창으로본 환경은 그야말로 사막밖에 없었다.. 극한 건조지역이라는 것이 어떤것인지 몸소 느낀 순간이다.

 기차안에서 바디 랭귀지를 하고 있을때 여자애 한명이 '안녕하세요'하면서 말하고 도망친다. 순간 깜짝 놀랬다. 갑자기 한국말을 들어서 그런것이다. 그 여자애는 이내 나한테 오더니 영어로 말을 거는 것이다.

 시안의 어떤 대학에 다니고 전공은 영문과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 기숙사에 한국유학생이 있어서 '안녕하세요'를 안다는 것이다.

 대화를 하면서 영어를 못하는 나보다 영문과인 여자애가 더 떤다.. 나한테 이야기를 할때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말을 하고 하나하나 다 들을려고 노력을 한다.

 나 영어 진짜로 못하는데...

 혹시 이글을 읽는 사람중에 내가 영어가 아주 유창해서 영어를 잘 쓴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걱정된다..
내 영어 실력은.. 고3때 웬만한 학생은 80점 만점중에 50점은 넘어가는 상황에서 40을 넘기지 못해서 끙끙거리던 실력이다. 수능때 50점을 넘겼을때 어찌나 기쁘던지..

 그것도 5년전의 일이고, 전공상 어쩔수 없이 듣는 영어를 빼고는 거의 접해보지 못한 상황이다.
10일되는 지금까지의 여행에서 난 영어가 많이 늘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자신있게 말하는걸 깨달은 것이다. 내가 말한 영어는 나중에 분석해 보면 문법이 하나도 안 맞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다 말하면 웬만하면 알아듣는다.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은 문법에 맞는 정확한 영어보다는 확실한 단어와 몸짓과 표정이 어우러지면 통한다는걸 깨달았다.
그리고 중국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오직 내가 살길은 영어라는 점이 나의 영어실력을 단기간에 끌어 올린거 같다.

 서안에 유학중인 여자애는 우루무치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하고 영어로 이야기하는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이내 가 버린다.

 다시 남자 2명과 이야기를 했다. 답답했는지 여자애 한명을 데리고 오더니 통역을 시키는 것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영어를 해서... 3명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모두다 중국 남부의 충칭대학에 다니고 남자애 한명은 건축과 나머지 두명은 사회복지과라고 한다. 사회복지과라는 단어를 알게된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목적지인 류위안역에 도착했다. 그 때 시간이 저녁 8시정도?
역에서 나오는데 자연스럽게 중국청년 한명이 나한테 따라붙었다. 같이 돈황으로 가고 싶어 하는거 같았다. 얼떨결에 동료한명을 얻었네..^^

 그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9일 우루무치행 표를 살려고 했는데 하루전의 표까지만 판다고 한다.
중국친구와 나는 택시를 탔다. 류위안역에서 돈황시까지는 110킬로정도 되는데 운전사는 처음에 둘이 50위엔으로 불렀지만 내가 다시 40위엔으로 깎았다.

 손님 4명이 찰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역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한국말로 말을 거는것이 아닌가..
내가 '우루무치'라고 할때 한국인 특유의 발음이 났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나랑 동갑인데 결혼할 중국인 여자친구와 함께 여자친구 어른에게 인사겸 여행을 한다고 한다. 중국인 여자는 한국에 유학을 와서 그랬는지 우리말이 능통하다.

 그리고 역안에서 4명의 한국 여행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있는데 '막고굴, 명사산 학생 할인 꼭 받으세요..'라며 아주 핵심적인 정보를 주었다. 난 자위관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택시가 출발했다. 그런데 이곳은 너무나 건조한 것이다. 택시바람을 맞고 있으면 시원한거 보다 목이 답답함을 느꼈다.
나외에 나머지 4명의 중국인이 처음에 '한국축구 최고'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중국말을 하나도 못듣자 아무말 없이 돈황시까지 갔다.

 돈황가는길은 대부분이 사막인데 해지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 시간은 비록 9시이지만 이곳은 북경보다 1시간 반정도 느린 지역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돈황에 도착하고 역에서 따라붙은 중국인 동료는 집으로 간다고 한다. 알고보니 돈황시가 집이라는 것이다. 내가 걱정이 되서 방잡는데 까지 같이 따라오면서 도와줄려고 했다.(별로 도움은 안됨)

 방을 잡고 침대에 누워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오늘 버스터미널에서 96위엔 내라는걸 뿌리치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절반도 안되는 43위엔이 들었고 많은 친구들을 사겼기 때문이다.

 

 기차안에서 알게된 중국 대학생들

류위안 역에서 마주친 한국인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여자는 중국 대학생

 처음 보는 나에게 정말로 친절하게 대해준 중국 대학생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8 (돈황)

7월 8일(월)

최악이었다.. 비록 30위엔을 주고 싸게 잔 죄도 있지만 선풍기가 없는데에서 정말로 덥게 잤고, 무엇보다도 모기에게 시달렸기 때문이다.

 모기에게는 일어나서 피의 복수를 하고(한 10마리 잡았음)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갔다.
처음에 가야할곳이 막고굴인데.. 시내에서 25킬로 떨어져 있다. 버스를 타면 좋지만 투어를 빼놓고는 특별히 가는 버스도 없었다.

 한참 고민을 하면서 일단 식당에 들어갔다. 소고기국과 국수를 합친 음식인데 입맛에도 잘맞고 맛있었다. 아줌마도 친절해서 중국어를 못해도 대충 이해하고 음식을 맛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5위엔으로 포식한뒤 시장으로 갔다.
과일이라도 먹을까 해서 갔다.

 자두 10개에 10위엔에 샀는데.. 사고 돈을 준 순간 아뿔사...! 계산해보니 엄청 비싸게 산 것이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다시는 흥정안하고 쉽게 바가지쓰지 말아야지.. 여행의 또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지나가던 택시를 불러서 흥정을 했다. 막고굴을 갔다가 시내로 돌아오는데 60위엔..
난 단호히 거절하고 걸어갔다. 그런데 택시기사가 자꾸 날 잡으면서 흥정하자고 한다.

 난 편도에 20위엔.. 그 아저씨는 난감해 한다. 다시 갈려구 하니까 또 잡는다 난 편도에 25위엔.. 그아저씨는 편도에 30위엔 달라고 한다.

 10분간의 협상끝에 28위엔에 낙찰되었다. 혼자 택시타고 가는 값치고는 정말 싸다는 생각과 함께...

 막고굴을 가는 동안 돈황 시내 근처에 있는 명사산이 보였다. 모래로만 된 산인데 멀리서 보니까 정말 아름다웠다.
사막에서의 길은 무조건 일직선이다. 하긴 걸릴게 없으니.. 그래서 그런지 택시는 무척 빨리간다. 한참을 가다가 저 멀리 돈황이 보였다.. 돈황에서도 20킬로 정도 떨어진 오아시스의 나무가 보인다.. 난 속으로 실크로드의 체험을 위해 한번 돈황에서 오아시스까지 걸어가볼까? 라고 생각했다.. 오후에 명사산을 오르면서 이 생각을 실현했으면 진짜 죽었을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막고굴은 서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다. 그러다 보니 입장료가 80위엔이라고 한다. 매표소로 가는 도중에 46일동안 여행을 하고 있는 홍콩 대학생이랑 어울려서 이야기를 하면서 갔다. 이 남자는 영어를 조금 해서 말이 통했다.

 역시 예상대로 국제학생증은 안되고 80위엔 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제 류위안 역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버텼다.. 매표원은 절대 안된다고 하고 난 학생증으로 유리를 두드리고 영어로 왜 안되냐고 말하면서 버텼다.
홍콩애한테는 미얀해져서 먼저 가라고 했다.

 한 10분정도 버티니까 마지못해 학생할인을 해준다. 학생표는 40위엔이다.. 아싸 돈벌었다..
막고굴에 들어가서 중국인들 사이에 붙었다. 물론 중국인 가이드의 설명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첫번째굴을 다 보고 나갈려는 순간 갑자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한국인이다...와!! 땡잡았다. 그것도 북경에서 막고굴을 직접 연구하는 한국인 교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난 그 교수님의 물당번이 되어서 굴들의 설명을 들었다.

 처음 본 굴은 바로 428번굴이고 북주때만들어진 굴이다. 굴에 적힌 설화들을 설명을 들을수 있었다. 두번째는 256번 굴이다. 막고굴은 당시 부자들의 시주에 의해서 만들어 졌는데 그 지방의 부유한 유지들이 불심을 가지고 내세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96번 굴을 들어가는 순간 우리일행은 감탄했다. 불쌍의 크기가 엄청난 것이다. 바로 당나라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측전무후가 직접 황제 자리에 올랐을때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높이는 무려 35.5m이다.. 이런걸 굴안에 만들어 놓다니.. 부처의 얼굴도 측전무후를 좀 닮아서 그런지 밉게 생겼다.

 130번굴은 남대굴로서 개인의 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서화시대때 만들었으며 높이는 26미터 이다. 96번과 달리 온화한 부처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여러 굴을 관람하고 나서 난 일행과 함께 돈황으로 돌아갔다. 아까 만난 홍콩 남자애를 만날수 있었지만 아직 막고굴을 못 봤다면서 금방 헤어졌다.

 버스안에서 조선족 교수님과 친해졌다. 내가 합류한 단체는 실크로드를 답사중이고 총 13명이다. 교수님이 4분계시고 사업가 판사등 여행을 즐겨하는 이들이 모여서 간다고 한다. 특히 뗏목으로 유명한 동국대 사학과 교수님은 예전에 국토순례 지도자를 했을때 총대장으로 있던 강원규씨를 알고 있었다.

 버스안에서 조선족 교수님은 내가 혼자서 실크로드를 횡단하고 있는걸 대견해 하시며 손수 가지고 있던 자료를 주셨다. 그리고 많은 정보도 알려 주셨다. 특히 파키스탄 국경이 막힐경우 가게 될 서부티벳에 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돈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비싼 음식들을 먹었다. 여기서 실컷 영양보충을 하고 같이 우루무치까지 가자는 일행들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했다. 왜냐하면 돈황에서 유명한 명사산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혼자하는 여행의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미련은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실크로드 기행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명사산으로 향했다. 1위엔의 버스를 타고 명사산에 도착한 나는 다시 시위를 했다...50위엔인데 학생할인이 안된다고 한다. 한 10분정도 버티고 있으니까 마지못해 해준다. 25위엔이다. 아싸 또 돈 벌었다.

 명사산은 그야말로 사막의 모래를 맛볼수 있는 곳이다. 모래로 된 산을 올라가는데 보통길을 가는것 보다 더 힘들었다. 올라가는 도중에 중국인 3명이 같이 가자고 손짓하는 것이다. 중국인이 있는곳으로 가니 마시라며 시원한 물을 준다..
아싸.. 하도 목이 말라서 들어올때 물을 사지 않는 것을 후회하고 있었는데...^^

 중국인은 산동반도에서 왔고,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아서 한국축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대총하면서 갔다. 한국축구의 선전은 나의 여행에 있어서 중국인과 나를 연결 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 대표팀!! 정말 감사합니다.

 명사산을 오르니 정말 장관이었다. 또한 절대 마르지 않는 월아천으로 내려와서 사진도 찍었다. 내려오는 도중에 막고굴에서 만났던 홍콩 대학생과 또만났다. 오늘 들어서 3번 만난다.. 질긴 인연이다.

 명사산을 등정하고 나서 돈황에 남아서 쉴지 곧바로 투르판으로 갈지 선택을 해야 했다. 몸은 많이 피곤하지만 곧장 투르판으로 가기로 했다.

 돈황에서 출발해서 류위안 역까지 가는 버스는 15위엔 했다. 콜라 2병 사들고 탔다. 왜냐하면 사막의 건조함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버스는 사람이 다 찰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무려 1시간이나 버스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떼웠다.
버스안의 사람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보고 다 나만 쳐다본다.

 난 대한민국의 신용등급이 과감히 1등급이라고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누구든지 흥미를 갖고 친절하게 대해주며 특히 한국은 어느나라에도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딜가나 한국인은 지금처럼 환영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궂지 예외를 두자면 대만빼고)

 버스는 어제 온길을 다시 달려 류위안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바로 표를 사려고 줄을 섰다. 피곤해서 서안에서 출발할때처럼 종이에다가 적지도 않았다. 내 앞의 사람에게 권위적이던 매표원이 긴장한 목소리로 '류위안'이라고 하는 날 외국인이라고 안 순간 웃으면서 하나하나 또박또박 가르쳐 준다.

 역에서 기차올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무원이 오더니 웃으면서 외국인 특별실로 안내하는 것이다. 거기서 대기하고 있으니 기차올 시간이 왔다며 날 손수 안내해 준다.

 듣던것과 달리 외국인에게 정말 친절하다는걸 느꼈다.. 하긴 2008년이 북경에서 열리는 만큼 이제 외국인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야 되고 또한 국가 이미지를 이제는 중국이 생각할때가 된거 같기도 하다. 그러한 상황을 최전선에서 직접 겪었다.

 기차안에서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싯고 잤다. 중국인 보다 지저분한 옷차림이 된 나를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하긴 이기차는 '특괘'로써 좀 잘사는 사람들이 타는 기차지... 그들이 한국인임을 알게된 순간 다가와서 '한궈 짜요(한국최고)'라며 나한테 말을 건다.. 무리한 일정때문에 몸이 부서질 만큼 피곤했지만 그래도 국위선양은 하고 자야된다는 생각에 한 10분정도 이야기 하고 바로 침대에 골아 떨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석굴인 막고굴

 나를 따뜻하게 맞아준 한국인 분들.. 덕분에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전형적인 모래 사막을 볼 수 있는 명사산 꼭대기에서..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9 (투루판)

7월 9일(화)

 투르판 역에 거의 가까웠을때 기차 승무원이 깨워줘서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표를 승무원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목적지에 거의 다 다랐을때 알려준다. 그래서 안심하고 자도 된다.

 투르판역에 나왔을때 아침 8시였다. 원래시간대로라면 아침이 시작할 시간이겠지만 이곳 신장지역은 북경보다 시차가 2시간이나 늦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실상 새벽 6시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투르판역은 투르판 시내보다 북쪽으로 45킬로정도 떨어져있다. 그래서 10위엔을 주고 개인 자동차를 이용해서 투르판 호텔로 향했다.

 투르판은 전형적인 사막이다.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공기에는 열기가 느껴지고 무어보다도 자동차 창문을 열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건조하기 때문이다.
투르판으로 가는 주위에는 풀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었고, 오직
일자로 만들어진 도로위의 자동차들 뿐이다.

 투르판 호텔에 도착하고 날 태워준 자동차 일행이 투르판 투어를 제안을 했다. 투르판은 시내보다는 시외에 볼게 많기 때문에 평소에 절대 투어를 이용을 안했던 나도 이번 만큼을 이용할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4명이서 타게 되고 처음에 7위안을 불렀던것을 55위엔으로 낮췄다.

 투르판 호텔은 30위엔이다. 샤워도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방마다 에어컨이 있는게 마음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서 오늘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동안 오늘 투어를 하게될 차와의 약속시간이 되었다.(이때가 9시)

 아까 나와 이야기를 했던 삐끼가 울쌍인채로 오더니 나보고 가격을 부르라고 하는것이다. 무슨소리지? 아까 분명히 55위엔이라고 했는데...

 원래 4명이서 타기로 했는데 나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이 다른곳으로 간다며 펑크를 냈다는 것이다.
처음에 200위엔을 부르길래 난 절대로 안한다고 하며 버스를 타고 투어를 할거라고 했다. 버스는 40위엔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마지막 희망인듯 이건 결코 비싼것이 아니며 내가 몇시간이고 혼자서 관람을 하더라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면서 100위엔을 불렀다.

 여기서 한번 사치를 해봐?... 가이드 북에는 자동차를 하루 빌리는데 1200위엔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난 혼자서 자동차를 하루 빌리며 게다가 운전사까지 딸린게 아닌가.. 오늘만큼은 여유롭게 관광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100위엔(16000원)에 합의를 했다.

 먼저 중국은행으로 가서 환전을 했다. 은행이 10시에 여는 바람에 좀 기다려야 했다. 환율은 저번에 시안에 있을때랑 거의 비슷했다
차창밖으로 바라본 투루판 시내의 모습은 정말 이국적이다. 많은 위구르인들이 당나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기는 당나귀 마차를 자가용으로 이용하나보다.

 먼저 서유기의 삼장법사 일행이 항상 불타오던 화엄산을 파초선을 구해서 껐다던 화엄산으로 향했다. 투르판 시내에서 4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 가는 도중에 많은 유전 시설들을 볼 수 있었다. 사막인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고 더군다나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웅장한 화엄산이 보였다. 겉을 보니 왜 화엄산이라고 불렀는지 알만하다. 산에는 나무는 물론 풀한포기 볼수 없었으며 표면 또한 불이 타오르듯이 구불구불해서 왜 사람들이 화엄산이라고 불렀는지 알만했다.
이동을 하면서도 너무나 건조하고 더워서 물을 거의 한통 비웠다. 차에서 내려서 잠시 기념사진을 찍고 위구르 사람들의 삶을 알수 있는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입장료는 20위엔이다.

 안에 들어가니 큰 부처상이 있었고 위구르 사람들의 삶과 생활방식을 잘 알수 있게 전시를 해놓았다. 나 혼자서 헤메고 있으니까 중국인 3명이 같이 다니자며 말을 걸었다.

 그들은 돈을 내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곳에서도 자신들의 돈을 내주며 나와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들과 방향이 달라지고 또 혼자가 되었을때 서안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20살 여자애가 내 사진기를 들어 주며 사진을 찍어 주었다. 박물관에서 정말 고마운 사람들을 만났다.

 박물관에서 얼마 안떨어져 천불동으로 갔다. 거기도 역시 20위엔이다. 이곳 천불동은 돈황과 같이 벽화와 불상들이 있었지만 이슬람 민족의 침입때 거의 다 파괴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종교를 위해 다른민족의 문화재를 파괴한 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바로 서안에서 대학을 다니는 한국인 유학생 4명이다. 첫눈에 한국인임을 알아 보았다. 그들은 말도 안통하는 내가 혼자서 여행하는거에 놀라면서 많이 부러워 했다. 그들에게 돈황 막고굴과 명사산에서 학생할인을 받으라는 정보를 선물로 주었다.

 혼자서 운전사가 딸린 개인차를 이용하니까 정말 편한 여행이 되었다. 다른사람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관광을 할수 있기 때문이다.
3번째 행선지는 '아스타나 고묘군'이다.

 예전 위구르 인들의 무덤으로서 3개의 무덤을 관람할 수 있었다. 표는 20위엔이다. 마지막묘의 미이라를 빼고는 별로 볼게 없었다. 여기서 홍콩에서 왔다는 2명의 학생들과 여행정보를 교환을 했다. 나와 같이 차를 탈려고 했지만 가격협상이 안되 그냥 나혼자 다시 출발했다.

 네번째 행선지로 고창고성을 갔다. 중국의 한나라 시대때의 고창국이 서있던 자리인데 한눈에도 볼게 없고 가이드북에도 폐허라는 글을 보았는데 요금이 20위엔이다. 입구에서 서성이다가 과감히 그냥 돌아섰다.

 다섯번째는 포도구라는 곳이다. 화염산 서쪽에 있는 작은 계곡으로서 오아시스이다. 이곳은 전체가 포도 나무로 둘러쌓여 있으며 낙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요금이 20위엔이지만 이런 황량한 사막에 상큼한 오아시스를 보고 싶은 마음에 들어갔다.

 과연 사막 한가운데의 천국이라고 불릴만한다. 물이 콸콸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온 사방이 포도나무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포도의 맛이 어떤지 알아볼려구 하나를 따먹었다.

 그런데 저 쪽에서 놀던 청년들중에 한명이 뛰어오면서 나한테 돈을 내라는 것이다. 처음에 0.1위엔을 주었더니.. 10위엔을 내라고 한다. 몸짓을 보니까 무슨 벌금이라나..

 말이 안나왔다. 경고 피켓도 안세워져 있고, 막무가내로 화내는거 보니까 이런식으로 관광객들 많이 뜯어 먹었겠구나...하고 생각을 했다.

 오케이.. 난 그 청년의 손을 잡고 "워쏘우 와이구런(난 외국인), 공안(공안가자)'라고 했다. 내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청년은 나와 함께 입구로 갔다.

 입구 앞의 노인에게 공안(중국경찰)이 어디있는지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못 알아 듣다가 한문으로 쓰니까 공안의 방향을 가르쳐준다.
그때 청년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자기는 절대 공안에는 안 간다고 한다. 난 나랑 실랑이를 벌이던 도중 그 청년이 가운데 손가락을 드는 욕을 나한테 한걸 잊지 않고 있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난 공안으로 끌고 갈려구 하고 사람들이 나보고 벌금 안내도 되고 그냥 가도 된다고 한다.

 그때 영어를 조금하는 여자아이가 와서 나와 이야기를 했다. 그 여자아이는 잘 못했다면서 그냥 가도 괜찮다고 했다. 난 20위엔이나 들어서 구경하는 만큼 끝까지 포도원을 보고 간다고 했다. 여자아이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만약에 공안에 갔으면 어떻게 했을까? 뭐.. 나도 별 대책이 없었다. 난 너희들 말은 못알아 들으니까 한국 대사관을 대라고 말할려구 생각했을 뿐이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구경을 하는데 아까 영어를 조금 했던 여자아이가 따라오더니 나를 안내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말 미얀하다고 계속한다.

 18살이고 영어는 고등학교에서 배운다고 한다. 우리는 데이트를 하는 기분으로 포도원을 산책했고, 그 아이는 한 할아버지에게 나를 안내해 주었다.

 위구르 할아버지는 인상이 참으로 좋았고 나에게 수박을 대접해 주셨다. 그러면서 2줄로 된 민속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직접 불러주신다. 여자아이는 민속춤을 췄고, 같이 추자는 이야기에 나도 같이 춤을 췄다.

 이렇게 나 혼자를 위해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할아버지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한국은 정말 큰 나라라고 하면서 반가워 하신다.

 할아버지한테 100살이상 사세요(통역은 그녀가 해줌)라고 말한 다음에 우리가 간 곳은 바로 위구르 집안이었다. 그 여자아이가 사는 곳이기도 하고 관광객을 상대로 전통 음식을 판매하는 곳이다. 간단한 소개를 했다. 가족들과는 금방 친해질수 있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 여자애의 아빠와 청년들이 주위에 오더니 한국 축구 굿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그녀의 통역을 통해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였다. 이미 입구에서의 일은 다 잊었다. 과장된 몸짓으로 웃으면서 말하니 위구르 가족들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아버지가 이야기를 하고 여자애가 통역을 할려구 하는데 갑자기 여자애의 얼굴이 빨개진다. 여자애는 나한테 전 남자친구가 있어요.. 하더니 아버지가 딸을 줄테니까 우리집에 눌러 살으라고 했다고 한다.
머.. 처음본 내가 1등 사윗감으로 보였다니.. 과히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그 집에서 과일을 대접받았다. 특히 하미라는 과일이 있는데 이곳지방에서만 나는 참외 비슷한 과일이다.
처음에는 40위엔을 내고 점심을 먹고가라는 아줌마가 그냥 대접할테니 점심먹고 같이 이야기 하다가 가라고 한다.
물론 그러고 싶었지만 포도구 밖에서 날 기다릴 운전사를 생각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여자애랑 이야기를 하던 중에 소수민족의 애환을 발견할 가 있었다.

 '예전에는 많은 위구르인이 살았어요' '한국인과 일본인은 여기 중국인과 생긴건 비슷해도 우리를 대하는게 달라요'.. 공안의 전부가 중국인이고 대부분의 중국인이 시내 중심에 사는 것을 보아 중국인과 위구르인과의 차별을 읽을 수 있었다. 관광지를 돌아봤을때 관찰을 했지만 중국인들이 위구르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지 않는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 중국인과 비슷하게 생긴 한국인인 내가 웃으면서 먼저 말을 걸었으니 그들도 얼마나 반가웠으랴. 만약에 내가 중국인이었으면 그들도 나를 이렇게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으리라..
이들을 통해서 일제지배하에 차별받았던 우리민족의 애환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수 있었다.

 거의 포도원에서 1시간 가량 있었다. 입구로 나갈려고 하는데 건포도와 기념품을 파는 위구르인들이 말을 거는 것이다. 이미 그들과 동화된 나는 그들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중에 한 아줌마가 처음에는 10위엔에 팔려는 건포도를 그냥 준다. 다른 위구르인들도 이것도 먹어보라고 하지만 먹기만 하고 가져가라는것에는 거절 했다.

 이들 위구르인들을 비롯해서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친해진 사람에게 내가 베풀수 있는 것은 바로 사진 밖에 없었다. 같이 사진을 찍음으로서 '당신을 평생 잊지 않겠어요'라는 메세지가 나와 같이 사진을 찍는 이들에게 전달 되었으면 한다.

 입구에서 귀여운 소녀와 헤어졌다. 1시간 반동안이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했고, 재미있게 데이트를 했던 것이다(어쩌면 사위가 될수도...)

 이건 순전히 나와 싸운 청년덕분이다. 나오면서 그 청년한테 감사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거기서 포도를 따먹으면 10위안을 벌금으로 내야한단다...

 다음에 간곳은 바로 칸얼징 낙원이다. 역시 오아시스인데 이곳은 순전히 인위적으로 만들었다.
처음 투르판 시근처를 다닐때 이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궁굼했다. 일년에 비가 16mm 밖에 오지 않는데 이곳에서 어떻게 물을 구할까?

 답은 여기서 구할수 있었다. 20위엔을 내고 들어간 이곳에서 내가 본것은 만리장성보다 더 대단한 인간의 업적이다.
그들은 물을 저 멀리 텐산산맥에서 부터 굴을 파서 물을 끌어왔던 것이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서 굴을 파서 멀리 물을 끌어들이게 했으며 이것은 몇백년에 걸쳐서 이곳 지역에 섰던 왕조들이 만들었던 대 사업이라고 한다.

 상상해 보라.. 무려 5000Km의 수로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할지.. 그것도 중장비가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사람의 손으로 3미터깊이의 굴을 파고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투르판에 사람이 살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그러한 노력들이 후손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대공사가 중국의 지배하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 있고, 또한 관광지로 개발된 이곳 입장료 20위엔도 중국사람들에게 들어간다는 것이 씁씁하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소공탑이다. 높이 44M의 탑이 있다는데 입장료도 30위엔이고 그리고 아까 천포동을 파괴한 이슬람 왕조의 탑이라는 생각에 그냥 돌아섰다.

 9시부터 6시간동안의 투어가 끝났다. 호텔에 가기전에 운전사가 차를 멈추더니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와서 나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다. 얼마 안되지만 좀 정들었다.

 호텔에 들어서서 요금을 지불하는데 100위엔주기가 워서 120위엔을 주었다. 운전사는 웃으면서 즐거운 여행을 하라고 한다. 혼자서 느긋하게 여행을 하고 더군다나 위구르 인들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는데 전혀 아깝지 않은 돈이었다.

 호텔에서 샤워를 한다음 피시방으로 갔다. 서안에서 끊겨진 일기를 쓰기 위해서 이다.

 저녁이 되서 투르판시내로 나오니 정말로 사람이 많이 있었다. 낮에 다 어디에 숨어있었나 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투르판시내 곳곳에 많은 포장마차들이 있었다.

 저녁을 먹을려고 포장마차에 앉은 순간 3명이 모여앉은 의자에서 갑자기 '고니찌와'라고 한다. 알고보니 일본인이다. 일본인 2명과 위구르인 1명이 있었고 옆에는 위구르 여자애 2명이 있었다.

 일본인 1명과는 영어로 이야기 하고 위구르 여자애 1명과 영어로 이야기 할수 있고, 나머지는 일본어로 대화를 하는 복잡한 상황이다.(여자애한명은 아무말도 안했음)

 일본애에게 내일 우루무치의 하일라이트 천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위구르 남자애 1명은 일본어를 배우는데 대단한 자부심이 있나 보다. 내가 일본어에 대한 농담을 하니까 일본애들은 같이 웃는데 이 남자는 삐져서 말도 안한다. 위구르 여자애는 우루무치 대학을 다닌다고 한다. 영어를 잘하는지 나의 모자란 영어에 꼬투리를 잡는다..

 대충 정보교환을 하고 자리를 떴다. 아침일찍 일어나 우루무치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많은 경험을 했다.

 

 손오공이 파초선을 이용해서 불으 껐다던 화엄산.. 정말이지 풀 한포기도 안 보인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부처상 앞에서..

천불동에서 만난 한국인들과 함께..

 포도원에서 사귀게된 18살 위구르 여고생과 함께..^^ (귀엽지?)

 투루판만의 삶의 방식을 알 수 있는 칸얼징낙원 내부.. 이러한 수로가 무려 5000키로나 된다.

투루판에서는 밤이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있다.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10 (우루무치)

 7월 10일(수)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매우 더웠다. 역시 사막의 날씨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꼈다.
투르판빈관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곧장 투루판 박물관으로 갔다. 투르판 박물관은 20위안으로써 투루판에 있었던 국가들의 유적과 공룡화석들을 직접 볼수 있었다.

 11시 30분쯤에 곧장 우루무치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투루판과 우루무치는 189킬로미터인데 버스요금은 26위엔 밖에 안했다. 버스또한 에어컨이 시원하게 작동되고 쾌적한 분위기이다. 단 도저히 해석할수 없는 이슬람 가요가 흘러 나와서 어쩔수 없이 CD플레이어로 우리나라 음악을 들었다.

 투루판과 우루무치로 가는 고속도로는 완전히 일직선이다. 아마 사막지역이라서 그런것이리라... 고속도로라고 하지만 도로는 2차선이다. 그렇지만 완전히 일직선이기 때문에 저 멀리 떨어진 반대차선의 차가 얼핏 보인다.

 중국에 와서 느낀거지만 운전을 할때 아무리 상대편 차가 개념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클랙션만 울리지 절대 욕을 하는 법이 없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 다는 것인가...? 아무튼 조금만 자신의 의도와 빗나가면 욕을 해되는 우리나라 운전자들이 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드넓은 사막 사이로 3시간정도 달린 후에 저 멀리 우루무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상상을 했었는데 의외로 고층빌딩도 많고 발전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도시의 분위기는 점점 다민족들의 숫자가 늘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위관에서 처음 보았던 무슬림들이 이제는 거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할 정도이다. 중국이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아무래도 다른 나라에 온 기분이다.

 먼저 홍산공원으로 향했다. 요금은 10위엔.. 버스에서 홍산공원을 찾아가는데 카라라는 카자흐스탄 대학생이 영어로 친절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혹시 내가 길을 잃을까봐 자신의 목적지도 아닌곳에서 나와 함께 내려 홍산공원까지 데려다 주었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홍산공원(10위엔)은 우루무치에서 유명한 공원인데 일종의 놀이공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많은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할수 있었다.(부러운....)

 홍산공원의 가장 꼭대기인 탑으로 올라가는 순간 친숙한 한국말로 누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바로 YTN에서 한중수교 10주년 기념으로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들고 있는 가이드북의 한글을 보고 한국사람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촬영팀중에 내가 학교를 다니는 춘천사람도 있어서 반갑게 이야기 하고 사진을 찍었다.

 홍산공원을 관람하고 나서 우루무치 시내에서90킬로 떨어진 우루무치의 제1의 관광지 천지로 찾아갈려고 나섰다. 그런데 우루무치 시내 한가운데서 도저히 천지까지 가는 버스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1시간정도 헤메고 있는데 한 여행사직원이 중국어로 종이에 적어서 나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을 들고 아래쪽으로 가라고 가르켰다.

아래쪽에 가서 한 아줌마에게 길을 물으니까 또다시 종이에 적더니 7번 버스에 타라는 것이다.

 버스기사는 종이에 적힌걸 보고 나를 목적지에서 무사히 내릴수 있도록 도와주고 버스에 내리는 순간 갑자기 옆에 있던 여자가 쪽지를 뺏아 가더니 다시 101번 버스를 타도록 안내해 주는 것이다.

 101번 버스에서 쪽지를 본 한 아줌마가 다시 목적지에서 날 안내해 주고 결국에는 한 할아버지가 천지 입구까지 가는 버스에 안내해 주었다.

 난 쪽지에 적힌게 무엇인지 결코 모르지만 중국인들만의 네크워크로 무사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천지입구까지 8.5 위엔의 싼가격에 2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다. 천지입구에서 천지까지 16위엔이다. 천지까지 가는 버스를 탈때 안내원 아줌마가 천지의 입장료가 60위엔 한다면서 자기한테 사라는 것이다. 당연히 단호히 거절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그 아줌마가 너무 친절했기 때문이다.(화장실까지 손수 안내해줬음)

 버스는 천지를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천지는 보그다봉 밑에 있는 해발 1600미터의 호수로서 그 절경이 뛰어나다고 한다. 또한 많은 카자흐 족들이 살고 있어서 직접 그들의 생활을 체험할수 있다고 한다.

 버스가 올라가는 동안 절경이 펼쳐졌다. 소들과 양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으며 여태까지 보던 사막들과 달리 푸르른 녹음이 짙었기 때문이다.

 천지 입구 매표소가 나오고 난 싸워서 학생할인을 받을 요량으로 내릴려고 했다. 그런데 버스는 공안이랑 몇마디를 하더니 그냥 통과하는 것이다.

난 무슨일인가 지켜보았다.

 천지에 다다를쯤에 '무표'라고 하면서 나한테 버스기사와 아줌마가 뭐라고 하는 것이다. 대충 보니까 60위엔의 표를 안사고 통과했으니 자기한테 40위엔을 달라는 것이다. 이럴때는 못알아 듣는 척했다. 그쪽에서는 답답하던지 열심히 적으면서 설명을 한다. 물론 이때 나의 표정은 태연 그 자체였다.

 상황을 파악할수 있었다. 그들은 공안에게 무슨 거짓말을 해서 날 통과시킨 것이다. 고맙기는 하지만 40위엔을 주기는 아까웠다.

 난 이곳에서는 결코 통하지 않는 국제학생증을 꺼내서 이증만 있으면 20위엔에 들어갈수 있다고 하면서 당신들의 노력으로 들어왔으니 15위엔을 주겠다고 했다. 싫으면 다시 돌아가서 표를 사겠다고 했다.

 그들은 잠시 나의 표정을 보더니 좋다고 했다. 아싸... 이렇게 해서 45위엔(7000원가량)을 벌었다.

 와... 천지는 완전히 별천지였다. 만년설이 쌓인 보그다봉 아래의 천지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한 카자흐족과 협상을 해서 그들의 숙소인 게르에서 2일 체험 요금 협상을 했다. 처음에 100위엔을 부른다... 오 저런저런... 이미 어재 투르판에서 일본애들과 정보교환을 하면서 40위엔까지 깍인다는것을 간파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에는 40위엔에 합의를 보았다.

 카자흐족의 게르에서 혼자서 자게 되었다. 그들의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의 생활을 체험하는 좋은 계기였다.

 근처에서 숙박을 하는 중국인들과 이야기를 시도했지만 그들이 전혀 영어를 모른다. 그냥 들어왔다.

 별빛은 정말 밝았고 달빛에 반짝이는 호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저 멀리서 누군가 한국노래를 틀어놓은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투루판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고속도로.. 비교적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홍산공원 탑에서 내려본 우루무치 시내.. 도저히 사막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우루무치의 제일의 전경 천산.. 호수가 정말 아름답다.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11 (천지, 우루무치)

 7월 11일(목)

 아침에 빗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이곳 천지의 아침은 정말로 상쾌하고 비는 오지만 오히려 구름과 함께 어우러진 자연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일단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산책을 한후 또다시 잤다.
오전 11시에 일어나서 점심을 먹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하나 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 바로 말타기 이다.

 말타기는 30위엔이면 1시간반정도 탈수 있었다. 난 15살정도 되어보이는 아이가 가지고 있는 말을 선택을 했다. 말을 처음 타보지만 정말로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마부가 조정을 해주었는데 나중에는 내가 말을 직접 조정할수 있었다.

 말에서 본 천지와 보그다봉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초록빛 산록이 환상적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방목되어서 풀을 뜯고 있는 소와 양들의 모습이 정말로 평화로워 보였다. 정말로 이곳이 환상의 세계라는 생각을 했다.

 말을 조정하는것은 쉽다. 가고싶은 방향으로 고삐를 당기면 그쪽방향으로 가고 발을 한꺼번에 차면 앞으로 빨리 가는 것이다. 난 말로 달리고 싶어서 채칙을 달라고 했지만 처음 타는 사람은 위험해서 안된다고 했다.

 말을 타고 언덕위로 올라갔다. 천지가 보이는 가장 좋은 위치인데 안타깝게도 안개가 껴서 볼수가 없었다.

 말을 타고 나서 값을 치루었다. 30위엔인줄 뻔히 아는데도 소년은 50위엔을 부른다.,, 난 그 소년의 표정을 보았다. 뭔가 기대에찬 천진난만한.. 아마도 어린나이에 생업에 나서는 그가 측은해 보였다. 아마 부모님이 아프셔서 그랬을 거야.. 여행의 재미는 바로 내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난 알면서도 50위엔에 속아주었다. 그 소년은 세상을 다 얻은듯한 기분으로 인사를 하며 말을 타고 사라졌다.

 하룻밤을 묵었던 카자흐인에게 인사를 하고 하산을 했다. 다른이들은 리프트나 차를 이용하지만 자연을 직접 느껴보기 위해서 이다.

 보그다봉 입구에 내려가니까 바로 어제 날 무사통과 시켜준 버스기사 내외와 마주쳤다. 아마 어제 알면서도 속아 줬으리라... 기꺼히 그들의 버스를 탔고 그들은 어제보다 6위엔이 내린 10위엔에 날 태워주었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자위관에서 잠시 만났던 프랑스인 2명을 다시 만날수 있었다. 우리는 정말로 반가워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다시 어제의 과정을 거쳐서 우루무치 시내로 들어왔다. 결과적으로 여행사를 통해서 갔을때보다 입장료를 포함해서 70위엔은 아낀것 같다.

 우루무치에서는 곧바로 신장박물관으로 갔다. 이곳에서 볼것은 바로 미이라 이다. 사막의 건조한 기후에 있어서 거의 부패가 되지 않았는데 그중에는 어제 죽은듯한 미이라도 있었다. 입장료를 25위엔이다. 정말로 볼만한 미이라가 많다...(남녀노소 종류별로 다 있음)

 박물관을 관람하고 곧바로 우루무치 역으로 갔다. 가는 도중 버스에서 짐이 너무 많아서 고생하고 있는 모슬림 부부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고마워 하면서 내가 표를 사는것을 도와주었다.

 원래는 곧바로 카스로 갈려고 했는데 저번에 기차안에서 카스로 가는 도중 '쿠쳐'라는 도시에 들려서 천불동을 꼭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쿠쳐로 가기로 했다.

 시간이 4시간정도 여유가 있어서 왕빠(pc방)에 가서 실크로드 이야기 9편을 썼다. 쓰는 도중에 글이 전송이 안되는 것이다. 2시간동안 쓴 글을 날리게 생겼는데 주인은 말이 안통해서 그런지 모른척한다.
결국에는 MSN을 이용해서 아는 동생을 통해 글을 전송할 수 있었다.

 우루무치역에서 밤 11시에 기차는 출발 하였다. 기차비는 일반 기차침대차이고 요금은 165위엔이다. 이제 파키스탄을 향해 가는 것이다.

 기차안의 나의 침대는 주위의 대부분이 중국군인들이 탔다. 정말로 우울했다. 그래도 젊은 22살 군인과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서로 무기 이야기를 하면서 재미있게 이야기 했다. 그도 적들이 쓰는 것인 m16을 쏴본 사람을 봐서 신기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군인의 부자연스러움은 이내 지겹게 했다. 그래서 기차 승무원에게 이야기를 해서 자리를 바꿨다. 중국에서는 자리가 남으면 언제든지 자리를 바꿀 수 있다.

 새로 바꾼 자리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있었다..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었다.

천지에서 말을 타는 모습.. 정말이지 환상이었다.

 여기에서는 모든 동물들이 방목으로 길러진다. 정말 평화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지를 떠날려고 할 때쯤의 모습. 날씨의 기복이 정말 심했다.

 

 

 

 인천에서 배타기 직전의 모습.. 이때까지는 정말 막막했다.

 

 배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찍은 모습

 

 월드컵의 열기는 배 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월드컵 3,4위전에서 이을룡이 꼴을 넣었을 때의 모습

 

 천진항에 도착했을 때 저 뒤에 천진시가 보인다.

 

 처음 본 북경 시장의 모습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한약재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인당'. 이곳은 5층으로 된 걸물로 이루어져 있고, 각종 휘귀한 약재들을 볼 수 있다. (옆에 사람들은 어제 나와 함께한 최초의 여행 동행자들)

 

 천안문 근처에 있는 혁명 기념탑 앞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찾고 있다

 

혁명 기념탑앞에 꼼짝없이 서있는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는 영광스럽겠지만 난 좀 불쌍해 보였다.

 

 중국 공산당 박물관.. 다른 곳과는 달리 외국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 공산혁명에 관심있는 사람은 한번 쯤 들러봄직 하다.

 

 공산당 박물관에 있는 중국어린이들의 공산당 찬양 그림.. 초등학교부터 사상교육이 주입되는걸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북경 지하철의 모습... 생각보다 지하철은 깨끗했다. 요금은 2위엔(300원)

 

 서안으로 떠나기 직전의 모습.. 손에는 각종 먹을 것들이 있다.

 

 서안역에서의 모습.. 세계에서 가장 큰 역 답게 정말로 웅장했다.

 

 중국에서도 축구열풍이.. 중국의 월드컵에 올려다 놓은 밀루타노비치가 모델로 등장하는 광고판의 모습.

 

 서안의 대표적인 유물 병마용은 뒤에 건물 같이 최신시설로 보호되고 있다

 

 병마용 마차.. 정말이지 흠잡을 때는 보이지 않을 만큼 정교했다.

 

 진시황의 모습..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위엄이 보인다.

 

 원래 여기서 절대 사진을 찍으면 안되지만 배째고 그냥 찍었다.

 

 나에게 정말로 친절했던 황씨 아저씨. 비록 언어는 거의 통하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에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진시황릉 정상에서 바라본 주변 모습.. 진시황릉이 정말 크다는걸 느꼈다.

 

 13세의 광동 소녀랑 찍은 사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해 보였다.

 

 당태종과 양귀비의 사랑으로 유명한 화청지..

 

 화청지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에서 찰칵...

 

 화청지는 아름다운 연못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공내전때 중요한 반전이 되었던 '시안사태'의 현장.. 이곳은 국민당의 총통이었던 장제쓰가 머물렀던 방이다.

 

 화청지라는 글이 써있는 비석위에서..

 

 서안 중심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지금도 함락시키기 힘들만큼 정교하고 두꺼웠다. 그곳을 생활터전으로 삼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아침의 서안 성벽주위에는 체조나 산책을 하러 나온 노인들로 붐볐다.

 

 서안성벽의 아침풍경.. 마치 축제를 여는 것 같았다.

 

 서안에서 운행되는 시내버스의 모습.. 뒤에 승객들의 상태를 볼 수 있는 CCTV가 이채롭다.

 

 산시성박물관 입구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유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학생할인 가능)

 

 그 유명한 북경원인.. 인류의 오래된 조상이기도 하다

 

 엄청난 높이의 '대안탑' 이런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게 우리나라 현실이 비추어서 부러웠다.

 

 서안 시내의 일부.. 이런 쓰러질 듯한 건물들도 서안시내에 많이 보였다.

 

 서안역 앞에서.. 교통의 중심지 답게 많은 사람들이 역을 이용하고 있었다.

 

 기차에서 알게된 중국청년..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하룻만에 좋은 친구가 되었다.

  30살 늦깍이 대학생 '리홍셍' 그나마 영어가 통하는 상대중에 하나였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갈수록 황량한 사막이 조금씩 펼쳐지고 있었다.

 

 같이 동행을 했던 네덜란드 초등학교 선생님..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키가 무려 193센치인 네덜란드 초등학교 여 선생님.. 정말로 친절한 사람이었다. 나이는 26세

 

 계획된 도시답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자위관 시내 전경

 

 이곳에서는 위와 같이 삼륜 오토바이가 많이 있었다. 값도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자위관 안에 있는 수백년된 벽화들.. 세월이 지나도 색깔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건조한 이곳 기후에도 원인이 있다.

 

 자위관안에서... 중국의 요새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의 제일 서쪽에 위치한 요새 답게 성벽은 비교적 견고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자위관 입구.. 아침이지만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었다.

 

 돈을 주고 밑의 밀랍인형을 향해 활을 쏘고 있는 모습.. 이런 것도 관광자원으로 쓰는 지혜에 놀라웠다.

 

 자위관 성벽 밖으로의 풍경..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끝이 없는 사막이다.

 

 전형적인 만리장성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현벽 장성.

 

 현벽장성의 꼭대기까지 올라갈려면 약 30분의 시간이 걸린다.

 

 현벽장성 밖의 모습.. 반대쪽의 이민족 영역은 바위투성이인 산인데 반해. 중국민족의 영역은 끝없는 평지이다.

 

 현벽장성 바로 밑에 있는 오아시스의 모습.. 흙속에 묻힌 보석 같이 아름다웠다.

 

현벽장성의 정상에서 기념 촬영..밖에 보이는 산들이 이민족들의 영역이다.

 

 현벽장성 전경.. 동쪽과 비교해서 작은 규모이고 폭도 좁은 편이다.

 

 만리장성이 처음 시작되는 지점.. 나와 같이한 삼륜 오토바이 운전사와 같이 찰칵..

 

 만리장성의 끝이 사진과 같이 낭떨어지였다. 사진으로는 표현이 안되지만 깊이가 50미터는 되는거 같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바위.. 조금 파괴되어 있었다.

 

 만리장성 제일돈에서 만난 사람들.. 왼쪽의 친절한 조선족 아저씨이고 오른쪽 둘은 홍콩 친구들이다.

 

 돈황역에 있는 대형 그림.. 실크로드의 모습을 잘 표현해 주었다.

 

 류위안에서 돈황으로 가는길.. 끝없는 사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막고굴 입구에서 만난 홍콩 여행자.. 50일 넘게 여행하는 그와 이날 하루 3번이나 마주쳤다.

 사막을 배경으로 미모의 가이드와 함께.. 그치만 애가 2명이나 있다고 한다.

 명사산 올라가는 길목에서.. 물을 가져오지 않아서 무척 후회했지만 인심좋은 중국사람이 갈증을 해결 시켜 주었다.

 명사산 정상에서 바라본 돈황시내 전경..

 명사산 아래에 있는 오아시스 월아천.. 주변의 모래언덕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한 낙타.. 50위엔(7500원)이면 낙타를 타고 명사산을 한 바퀴 돌 수 있었다.

 류위안 주변의 검은 땅들은 모두 광물이라고 한다. 수백미터를 파들어가야 겨우 광물이 나오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정말 부러웠따.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파초선을 빌려 불을 끄는 화엄산.. 이곳은 매우 건조하고 식물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화엄산 바로 밑에 있는 박물관.. 이곳은 위구르 사람들의 삶을 잘 표현했다.

 서 있는 곳은 대형 석불이 있는곳

 위구르민족의 전통악기를 들고.. 이 사진을 찍은후 2위안(300원)을 내라고 했지만.. 인심좋은 중국관광객이 대신 내줬다.

  이 곳에서 부터는 위구르어가 눈에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무슨말인지 모르겠다.. 파란색 간판이 위구르 어

 호랑이 입에 들어갈 듯한 장면.. (오바다-.-::)

 기괴한 탑이다. 각각의 구멍마다 불쌍이 있다.

 박물관에서는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 이유는 한 중국 여대생이 내 사진기를 가져가서 사진을 찍어준다며 이리저리 같이 돌아다니면서 찍었기 때문이다.(여대생은 정말 이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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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종에 비해 밑부분이 펼쳐져 있는게 특징이다.

 서안에서 대학을 다니는 여대생이 찍어준 사진

 사진이 잘 안나왔을까봐 한번 더 찍으란다.(너무 친절)

 역쉬 여대생이.. 많은 불상들이 있다.

 특이한 사막 집앞에서.. (역시 여대생).. 배나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배 부분에는 나의 모든 귀중품이 있는 지갑이 들어 있었다.

 이곳의 태양은 평소에 느끼던 태양보다 2배이상 강렬했다. 화엄산을 배경으로..

 박물관에서 나와 함께한 여대생.. 서안에서 대학을 다니는 19살이며.. 몸매도 끝내주고 얼굴도 정말 이뻤다.

 사진찍을 때 내가 어깨에 손을 올리자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위구르 왕족의 무덤이다. 비싼돈 내고 (15위엔) 들어갔지만 딸랑 무덤 3개가 전부였다.

 그나마 무덤에서 볼 만한 장면.. 바로 미이라다. 하지만 우루무치 박물관에 가면 각종 미이라들이 쌓여있다.

 포도원에서 나와 함께한 위구르 소녀.. 18살이라고 한다

 많은 위구르 음악들을 들려준 할아버지와 함께.. 소녀와 내가 오자마자 수박 반토막을 썰어서 대접해 주는 인심좋은 할아버지이다.

 소녀의 가족과 함께.. 의자에 앉은 아이가 여동생이고 소녀의 엄마, 아빠 순.. 잘못하면 장인, 장모사이가 될뻔했다.

 위구르 인들의 집이다. 비교적 잘 사는 위구르인들이라느것을 느꼈다.

 포도원 입구에 있는 수로이다. 정말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포도원을 나가기전에 친해진 위구르 상인들과 함께.. 쾌활한 위구르 인들과는 처음 만나도 친해진다.

 무려 5000킬로나 되는 수로를 볼 수 있는 칸얼징 낙원.

 투르판~우루무치 구간 고속도로에 있는 휴게소에서..

 홍산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YTN 촬영팀과 함께.. 한중 수교 10주년을 맞아 한창 취재중이었다.

 정상에 있는 탑 위에서 우루무치시를 배경으로..

 우루무치의 제일의 관광지 천지의 모습

 하룻밤 잠을 잤던 파오에서..

 잠시 산책을 하다가 갓 태어난 새끼양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40위엔이면 하루 잠자리와 2끼의 식사를 대접 받을 수 있다.

 말위에서 찍은 마부의 모습.. 그는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고 때문에 서비스비를 후하게 주었다.

 말을 타고 다니면서 본 이곳의 모습은 문명의 때는 보이지 않는 천국의 모습이었다.

 말을 타고 오는 모습.. 단 1시간 반만에 말을 몰 수 있을 정도로 말 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천지의 날씨는 흐렸다 맑았다를 반복하는 변덕적인 날씨이다.

 

 걸어서 밑으로 내려가다 보니까 작은 천지가 보였다. 정말 아름다운 연못이 었다.(물이 정말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