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이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실크로드 여행은 카스에서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된다. 비자가 없어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난 선택을 해야 했다.

 과감하게 티벳을 여행하기로 결정을 하고 신장 남로를 여행하게 된다. 그렇지만 신장남로는 정말로 고생길이었다. 한때 여행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며칠간 사막에 갇혀 지내면서도 여행을 계속 되야 된다는 마음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마주친 친절한 사람들.. 또한 수많은 경험들은 힘든 나를 극복하게 해 주었다. 결국 신장남로를 빠져 나왔지만 이번에는 비자 만료기간이 바짝 다가 오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러한 위기를 넘겨 겨우 꺼얼무까지 가게 되었다.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12(쿠처)

 7월 12일(금)

 이제 기차안에서 일어나는것도 익숙해 졌다. 기차에서 일어나서 차창밖의 경치를 보니까 역시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이다.
먼저 아무기차역이나 정차하기를 기다렸다. 중국에서는 정차하는 잠깐동안의 시간에 플래폼에 나와있는 잡상인에게 먹을것을 살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차안에 뜨거운물이 제공되므로 컵라면은 요긴한 먹을거리이다.

 기차에 타는 동안에 아커수 의과대학 교수랑 잠깐 이야기할수 있었다. 그는 이야기를 하는도중에 한국에서 선생님의 월급이 어느정도 인지 물어보았다. 선생님 월급이 보통 150만원은 넘어가므로 중국돈으로 10000위엔이 넘어간다고 했다.

 내가 실수한거 같다. 그는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 서먹서먹하게 대하는 것이다. 다음에 이런일이 있으면 모른다고 대답해야 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오후 2시에 쿠처에 도착을 했다. 먼저 도착하자마자 한일은 70킬로 떨어진 천불동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버스가 없다.. 겨우 택시를 교섭을 해서 60위엔에 갈수 있었다.

 택시기사와는 편도만 가기로 했는데 돌아올때 차가 없을거라고 하면서 자기택시를 이용하라고 한다. 난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1시간이 좀 넘어서 천불동에 도착을 했다.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이라고 한다. 25위엔으로 학생할인을 받아서 들어갔다.

 그런데 택시기사가 너무 끈질기다.. 차가 없다고 하면서 자기차를 이용하라고 하는거다. 난 히치라도 해서 갈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다. 택시기사인 미스터주는 투덜거리면서 돌아간다.

  쿠처의 제일의 관광지 천불동... 중국에서 가장오래된 석굴... 이러한 수식어를 믿고 갔지만 내가 본거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훔쳐가고 일본인 학생들이 낙서를 해놓고 부셔놓은 유적만 보았다.. 미치겠다.. 이거 볼려구 내가 여기까지 왔나. 그냥 곧바로 카스로 갈걸...

 파괴된 문화재 관람을 마치고 쿠처시로 돌아갈려고 하니 정말로 차가 없었다. 그쪽 직원들도 도와줄려고 했지만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때 행운이 찾아왔다. 주차장에 서있던 벤츠 한대가 나한테 오더니 타라고 하는게 아닌가.. 한 30대쯤보이는 부부였다.

 한국에서도 한번도 타지 못한 벤츠를 중국에서 타보다니.. 정말 쿠션도 좋았고 에어컨도 빠방하고 무엇보다도 흔들리지 않아서 좋았다.
 그들 부부는 정말로 친절해서 길을 가다가 유적이 있으면 세워져서 구경도 시켜 주었다. 물론 말이 안통해서 알아듣는데는 어느정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날 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여행을 잘 하라면서 겪려도 해주고 무엇보다도 나를 잘 데려다 주라고 공안한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알고보니 이 부부는 이 지역의 실력자인거 같다. 부탁받은 공안 1명이 자기 일은 제쳐두고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손수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고 버스표를 사줄려고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이미 19시가 넘어가서 떠나는 버스가 없었다. 공안은 계속 미얀해 하면서 정말로 죄송하다고 나한테 사과를 하는것이다. 공안이라면 중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인데 이들이 나한테 쩔쩔매다니.. 새삼 권력의 위력을 느꼈다.

 난 괜찮다고 하면서 나왔다. 잘못된 정보로 돈버리고 시간버리고 이날은 정말로 운이 없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2가지 행운이 찾아온다.

 여관을 잡았다. 가격은 15위엔이다. 원래 외국인은 20위안이상의 방에서만 자야 되는데 미남계를 써서 가격이 싼방을 잡았다.

 여관을 잡고 나서 시내구경을 나섰다. 20시이지만 날이 밝아 있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북경과 2시간 이상의 시차가 나기 때문이다. 시내 구경은 재미있었다. 저녁이 되니까 사람들은 시내중심에서 맥주도 마시고 산책들을 나온다. 그런데 대부분이 한족들이다.

 시내 중심을 벗어나 빈민가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전부 위구르 인들이다. 소수이면서도 주도세력인 한족은 시내중심에 살고 다수이면서 약자인 위구르인들은 시외의 빈민가에 사는 것이다.

 빈민가의 위구르인들도 날 경계하는 눈초리이다. 난 일부러 그들에게 말을 걸어 한국인임을 알려주었다. 그럴때마다 그들은 표정이 밝게 변한다.
새삼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빈민가 골목에서 바람이 빠진 공으로 축구를 하는 청년들을 볼수가 있었다. 그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처음에 경계하던 그들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월드컵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축구를 하자고 한다.

 나도 한 축구를 한다고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담없이 축구를 했다. 축구를 하면서 그들과의 우정이 쌓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축구를 하면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다. 하긴.. 갑자기 외국인이 찾아와서 같이 축구를 하니 그들에게도 별일이기는 하겠지..

 처음에는 아이들이 한국인이 왔다고 신기해 하면서 구경을 왔고 점점 마을주민들이 골목을 중심으로 모였다.

 축구는 밤 11시까지 했다. 축구가 끝날때쯤보니까 한 40~50명의 마을주민이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다. 축구가 끝나고 나니까 다들 내 주위에 모여든다. 그들중에 영어를 할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대화는 안되었지만 낯선 이방인을 환영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나한테 선물을 주었다. 많은 과일들을 얻어갈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중국인이었다면 절대 이런일이 없었겠지..
한참 그들과 함께 나름대로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재미있게 지냈다. 밤이라서 그들과 사진을 찍을 수 없는게 안타까웠다.

 그런데 한 40대쯤 되어보이는 아저씨가 전구에다 전기를 연결시키더니 사진을 찍자고 하는 것이다. 정말 고마웠다. 사진은 3장찍었는데 나중에 현상할때 제발 제대로 나왔으면 한다

 이 날 얼떨결에 나랑 결혼한 여자아이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장난으로 결혼식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것이다.
그들과의 일은 정말 즐거웠다. 내가 다시 갈려고 하니까 그들은 정말로 아쉬워 하면서 일일이 나랑 악수를 한다.

 동네 꼬마들은 계속 졸졸 따라오면서 나한테 매달린다. 그들을 떼어놓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정말로 쿠처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관에 돌아가니까 내 방앞에 쪽지가 붙어있었다. 이 여관에서 묵는 한국인인데 새벽 5시에 같이 카스로 가자고 한다. 이렇게 반가울수가..
와.. 2가지 행운이 쿠처에서 일어났다.

 기차는 새벽 5시30분에 출발을 한다. 때문에 잠들지 않고 밤을 샜다.

 쿠처에서는 대부분이 바위사막이다.

 비싼돈 들어서 관람온 천불동.. 하지만 거의 파괴되어 있다.

 한 위구르 빈민촌에서는 한국인이 왔다는 말에 마을주민이 다 모였다.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13(카스)

 7월 13일(토)

 새벽 4시에 짐을 챙기고 한국인 3명과 함께 기차역으로 향했다. 한국인 3명중 2명은 중국어를 할줄 알았다.

 기차역에 가니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도통 기차표를 팔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대만애들 4명이랑 호주인 2명이랑 이야기를 했다.
호주인 남녀중에 남자는 45살로 여행에 베테랑인듯 했고 젊어 보였다.

 5시 12분에 온다는 기차가 올 생각도 안하고 더군다나 표는 팔지도 않는 것이다. 6시 50분쯤 되자 기차가 도착을 했다. 역안에 있던 사람들은 기차표를 사지 않고 플래폽 입장권을 가지고 기차로 들어갔다. 중국에서는 표를 사지 못하면 기차안에서도 살수 있기 때문이다.

 기차안은 그야말로 꽉찼다. 빈자리는 커녕 앉을 자리도 없었다. 기차안을 헤메던 우리는 그나마 자리가 있던 식당칸에 앉았다. 기차여행중에 앉을 자리가 없으면 식당칸을 이용하라는 말이 생각이 나서 그랬다.

 식당칸에서 우리는 제일 싼 음식을 시키고 죽치고 앉아 있었다. 우리와 함께했던 호주인 2명은 내가 도와줘서 침대표 2개를 구해다 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침대표가 너무 비싸서 그냥 이렇게 있기로 했다.

 우리는 소개를 했다. 나를 포함한 남자 3명은 모두 78년생이다.. 이런 우연히 종우는 중국 상해에서 중국어 연수를 받고 있고, 준석이는 그냥 친구따라서 여행을 왔다고 한다. 나머지 1명의 여자는 우리보다 3살이 많은 누나였다. 중국에 유학을 왔다가 여행중이라고 한다.

 4시간정도 후에 아커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릴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많이 타는 것이다. 절망했다... 정녕 우리가 있을곳은 이곳 기차칸 안인가..

 누나랑 난 기차표를 사러 갔다. 기차표를 파는 기차칸에는 미쳐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표를 살려고 줄을 서 있었다.

 자세히 관찰을 하니까 아커수에서 탄 사람들은 입장권 없이 표를 사는게 아닌가... 혹시.. 난 누나에게 우리 쿠처에서 탄게 아니라 아커수에서 탔다고 말하자고 했다.

 중국어가 유창하지만 겁먹은 누나는 나보고 표를 사라고 한다. 결국 능청스럽게 연기를 해서 아커수에서 카스까지의 표를 살 수 있었다. 요금은 4명이 280위엔 무려 120위엔 가까이 절약한 것이다. 야호...

 이렇게 돈을 아낄때 여행의 묘미를 느낀다.

 아무래도 중국에서는 외국인에게 잘 해주라는 공문이 내려왔나 보다. 내가 기차를 탈때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어서 누가 보아도 중국인처럼 보였다. 기차칸을 돌아다닐때 중국인 승무원 한명이 화를 내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내가 외국인임을 알게 되었을때 웃는 표정으로 확 바뀌더니 친절한척 한다.

 식당칸에서 8시간정도 죽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참다못한 종업원들이 나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못알아 듣는 척하면서 죽치고 있었는데 그때 공안인듯한 사람이 기분나쁘게 욕을 하면서 나가라는 것이다. 중국어를 몰라도 그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면 알수 있다.

 그때 종우가 열받은 나머지 음식을 30위엔어치를 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도 안 먹었다. 일종의 시위인 셈이다. 그리고 공안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은척하고 명찰을 보고 이름을 적는 척했다.

 우리의 돌출행동으로 더 이상 아무도 우리를 건들지 않는다. 아까 그 공안은 우리가 역에 내려서 신고할까봐 겁이 나서 계속해서 우리눈치를 본다.(사실 그렇게 보이게 할려고 사진찍는척 했음)

 종착역에 도착하기 1시간 전에 식당칸을 나왔다. 식당칸에서 무려 10시간이나 시간을 떼운것이다.
우리가 다시 자리잡은 주위의 위구르인들과 금방 친해졌다. 그들은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고 친절하고 재미있게 대해주었다.

 난 2명의 위구르 남자에게 카드를 이용해서 중학교때나 했던 원카드 게임을 가르쳐 주었다. 원카드는 이제 나에겐 지겹고 별로 재미가 없어서 제발 재미없어 해라고 빌면서...
그런데 그들은 재미를 느끼는가 보다.. 주위의 2명이 더와서 5명이 원카드를 하고 몇명이 더와서 구경을 한다..

 카스에 도착하니 정말로 더웠다. 이곳은 위구르족들이 다수이며 한족은 보기가 힘들다. 정말로 이국적이다. 하긴 북경에서 5000킬로정도 떨어져 있으니..

 카스의 좋은 호텔에 들어갔다. 별3개짜리이고 최신 에어컨과 샤워시설 각종 부대시설이 있는데도 요금은 1인당 40위엔에서 30위엔을 깍을 수 있었다. 30위엔내고 들어가기 미얀할 정도이다.

 이날은 호텔을 잡고 카스시내의 바자르랑 문화재를 관람을 하고 난 피시바에서 글을 썼다.

 7월 14일(일)

 우리는 아침 10시에 일어나서 실크로드 박물관으로 갔다. 그리고 내일 파키스탄으로 떠날 버스를 예매를 하고 바자르로 갔다.

 바자르는 이곳 지역에서 가장 큰 곳인데 정말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흥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이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느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문화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이곳 카스는 천국같았다. 호텔요금도 싸고 음식도 무지 싸다. 배부르고 맛있게 먹은 국수 한그릇에 2위엔(300원), 메론보다 큰 과일이 3위엔(450원)..

 바자르를 관람하는 도중에 난 피곤이 쌓인 나머지 먼저와서 잤다. 여태까지 무리한 일정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의 마지막 밤이다. 파키스탄으로 넘어갈려고 하는데 원래 무비자였던 한국인이 이제는 비자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2달전에 비자 없이 넘었다는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무작정 여기까지 온 것이다.

 파키스탄에서는 모든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 중국에 적응을 많이 했는데.. 그렇지만 새로운 시작은 또 다른 경험과 즐거움을 줄 것이다.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과 추억들이 날 기다릴 것이다. 사진과 함께...

 왕의 묘가 있는 블루 모스크 아름답지만 입장료가 비싸서 안 들어갔다.

카스에서의 시장 풍경.. 각종 도구들이 즐비하다

 모스크 안의 광경.. 이슬람 도시라는걸 알 수 있다.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14(실크로드 신장남로 편)

 15편에서는 하루하루의 여행기가 짧은 내용의 글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여행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로서 정말로 많은 고생을 했던 시기이다.. 이 글을 쓴 시점이 신장남로를 벗어나기 직전이라 간단간단하게 썼다.

 7월 15일(월)

 오전에 파키스탄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사막을 질주해서 타슈쿠르간을 향해 달렸다.
처음 기대했던 산악지역은 나무가 무성한 모습을 기대했는데 나무는 거의 없고 황량한 민둥산 뿐이다.
그렇지만 바로앞에 만년설이 보이고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올라가는 버스의 기분은 잊을 수 없었다.
한국인 동료 3명과 헤어지고 대신 버스에서 파키스탄 7명과 친해졌다. 파키스탄인은 영어가 유창하기 때문에 대화하는데 별 무리는 없었다.
타슈카르간에서 숙박을 했다.(10위안)

 7월 16일(화)-이날부터 고생시작

 아침 8시에 버스가 출발을 했다. 바로 중국측 검역소로 갔는데 난 파키스탄 비자가 없어서 막혔다. 8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왔는데..

 할 수 없이 파키스탄 친구들이랑 헤어지고 돌아갈려는데 다시 돌아가는 버스는 다음날 7시에 있다고 한다.

 중국에와서 처음으로 히치에 도전을 했다. 히치는 한방에 걸려서 바로 카슈까지 직방으로 가게 되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도중 폭우가 내렸다. 여기는 나무가 없어서 그런지 내가 타고있던 트럭의 앞 뒤로 산이 무너졌다.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정말로 죽을 뻔했다. 만약에 트럭이 10미터 뒤에 있었거나 20미터 정도 앞에 있었으면 흙에 휩쓸려 절벽으로 떨어질 뻔했다.

 산사태 때문에 꼼짝없이 불도저가 흙을 제거할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런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듯 미리 불도저가 준비되어 있었다.
불도저 운전자가 우리 트럭으로 오더니 바로 뒤를 가르키며 윙크를 한다.'만약에 조금만 뒤에 있었으면 못 살아났을것'이라는 표현이다.

 밤이 되서야 길이 뚫렸다. 그런데 내가 탄 트럭의 위구르 운전자는 성격이 정의파여서 다른차들이 무사히 통과할때까지 도와주었다. 나도 물론 거들었지만.. 그래서 카스에 도착한것은 다음날 새벽 4시가 되서야 도착했다.

 7월 17일(수)

 새벽 4시에 도착한 채로 호텔에 투숙하기가 아까워서 곧바로 우루무치로 떠나기 위해 역으로 갔다. 택시 운전자는 무려 20위안이나 내라고 했지만 5분동안 버텨서 10위안만 냈다.

 절박했던 상황에 있었던 난 이때 난 3가지를 고민하며 선택을 해야 했다.
 1. 북경으로 가서 파키스탄 비자를 받는다
 2. 우루무치로 가서 카자흐스탄 비자를 받고 카자흐스탄으로 간다.
 3. 티벳으로 가서 네팔로 넘어간다.

 처음에는 2번을 선택했다가 pc방에서 알아보니 카자흐스탄 비자는 비용이 우리나라 돈으로 20만원 이상 지출되고 2주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1번은 제일 안정적이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게 싫었다.

 결국 3번을 선택하고 다시 걸어서 버스터미널로 갔다.

 이에청으로 가면 서부티벳을 통해서 라싸로 갈수 있었다.

 5시간(25위안)정도 버스를 타서 이에청으로 갔다. 곧바로 티벳 여행 허가증을 얻기위해 공안으로 갔다.
오후 4시까지 기다려서 면담을 하게된 공안의 대답은 무조건 안된다는 것이다.

 허가증은 그냥 무시하고 트럭을 타고 티벳으로 들어갈려고 하는 찰나 3명의 한국인을 만났다. 이들은 모두 여행의 베테랑이다.

 택시를 타고 다니면서 우리 4명은 서부티벳 알리로 들어가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다.(중국 군부대까지 감,..)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난 터미널 옆의 교원빈관으로 들어가서 곧바로 잠이 들었다.

 7월 18일(목)

 아침에 일어나서 3명의 동료가 있는 초대소로 갔다. 그런데 모두 없다는 것이다... 10시까지 기다렸다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먼저 티벳으로 떠났나? 길이 엇갈린건가? 어째튼 이들에게 의지해서 마냥 기다릴수만 없는 현실이다. 일단 환전을 하기 위해서 카스로 돌아갔다.

 3시경 카스에 도착하고 곧바로 여행사를 찾아갔다. 가는길에 나한테 바가지 씌우려는 택시 운전사랑 실랑이가 벌어졌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난 바가지 쓰는게 절대 싫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공안을 찾아가서 해결을 했다.

 여행사에서 파키스탄 비자를 신청할려고 하는데.. 계속 안된다는 것이다. 그때 뒤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이종호라는 분인데 삼성에서 중국으로 파견나왔는데 대학은 89학번이라고 한다. 이 분은 여행사에서 파키스탄 비자를 얻을수 있게 통역을 해주시고 같이 저녁과 술을 마시면서 중국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학생이라는 이유로 이분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셨다. 오랫만에 형같은 한국인을 만나서 편안했고 무엇보다도 정을 느낄 수 있었다.

 7월 19일(금)

 종호형과 함께 여행사로 갔다. 결과는 NO.. 9.11테러 이후에 파키스탄 대사관이 완고해진 모양이다. 무조건 베이찡으로 오라 고 한다.

 난 곧바로 티벳행을 결심했다. 종호형은 혼자 먼길을 다시 떠나는 내가 안쓰러운지 근사한 식사를 대접해 주시고 터미널까지 배웅나와 주셨다. 고마운 분...

 다시 이에청으로 왔다. 이곳에서 서부티벳 알리로 갈려는 홍콩인 4명을 만났다. 그렇지만 한국인 3명은 찾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꺼얼무를 통해서 티벳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다.

 미니버스를 타고 허텐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35살의 중국인 대학생과 친해졌다. 그와의 대화는 심오한 문제에까지 들어갔다. 중국대학생으로서는 절대 안되는 천안문 사태 이야기를 시작해서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물론 이런곳에서 우리의 영어를 알아듣는 이가 없겠지만 대화를 하면서 솔직히 불안했다. 그렇지만 그는 태연했다. 나를 믿어주고 정치이야기를 하는 그가 정말 고마웠다.

 중국대학생은 1주일에 8시간을 사상교육을 받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의 학생들이 정부를 상대로 데모를 한다는 것에 정말 부러워 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수민족에 관한 이야기도 했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중국이 천안문 사태때 진보하지 못했던 이유는 민주화로 약해진 정부를 상대로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할려는 우려가 있어서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중국의 영토에 1/4을 차지하는 소수민족의 독립여부에 대해 그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난 소련의 예를 들어주면서 중국정부가 약해지면 언제든지 독립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실제로 800년동안 강점되고 완전히 영국의 문화권에 들었지만 결국에는 독립을 한 아일랜드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그 대학생이랑 허텐에서 같이 숙소를 잡았다. 둘이 합해서 25위엔.. 이곳의 외국인은 나밖에 없는 듯하다.
실크로드 신장남로는 외국인이 거의 오지 않는 듯하다.

 7월 20일(토)

 중국인 대학생과 헤어지고 민텐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거리는 300킬로정도 되었지만 하루종일 버스에서 지냈다.
버스밖의 풍경은 전형적인 사막이다. 가끔가다 들르는 오아시스는 그야말로 황량하고 모래투성이에 모래바람이다. 이런곳에서 사람이 사는게 정말 신기하다.

 민텐에는 저녁이 되서야 도착을 했다. 이곳에서 우연히 대만 여행가와 마주쳤다. 그는 이곳에서 우루무치로 간다고 한다.
이곳 초대소는 10위엔(1500원)이다. 정말로 싸다. 이곳 초대소에서 여장을 풀고 오아시스 도시의 밤거리를 살펴보았다.
사방이 사막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마음도 황량한거 같다. 위구르인들이 싸우는 장면을 볼수 있었다. 2위안가지고 싸우는거 같은데.. 우리나라 같으면 그냥 인정으로 넘어갈수 있는 것도 이곳에서는 삭막하게 싸움거리가 된다.

 7월 21일(일)

 민텐에서 히치를 통해 치엔모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처음부터 히치가 잘 되는 것이다. 봉고차인데 친절하게 태워주었다. 민텐에서 20킬로정도 지나서 나한테 돈을 요구하는것이다. 무려 50위엔이나 달라고 한다. '빌어먹을 위구르놈들'..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난 무조건 싫다고 했다. 그때 하루에 하나뿐인 치엔모행 버스가 도착했다. 그는 50위엔을 주지 않으면 버스에 못탄다고 했다. 그를 설득해서 30위엔에 해결하자고 했지만 그는 버스를 약점으로 50위엔을 주라고 한다.

 결국 버스를 포기했다. 하루에 한번있는 버스를 놓치자 입장이 바뀌었다. 아까 30위엔 준다고 했던 난 괘씸해서라도 10위엔이상 못준다고 했다. 그 녀석의 액수는 줄어든다. 40위엔.. 30위엔..
난 이왕 버스를 놓친이상 돈줄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1시간을 대치했다. 그래봤자 내가 유리하다. 왜냐하면 난 하루에 한번있는 버스를 놓쳐서 어짜피 히치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10위엔을 줬다. 난 그놈의 차 번호를 시간있을때 신고할려고 적었다.

 차가 지나가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다.. 와.. 드디어 내가 영화에서만 보던 로멘스를 경험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차한대가 지나간다. 그 승용차는 꽉 차 있어서 나에게 물 2병을 주고 떠났다.

 계속 걸었다. 사막에서의 걸음은 정말 힘들다. 영화에서 보면 3일동안도 물없이 잘 버티던데.. 3시간이 지나자 물이 다 떨어졌다.
이곳은 차도 안 지나간다...

 걸어가는 도중에 내가 걱정스러운지 저 멀리서 말을 타고 위구르인 2명이 나에게 온다. 그들은 나한테 말을 타라고 하면서 옆에 붙어준다. 잠시동안 말을 탔지만 그들도 그들의 일이 있는 만큼 나혼자 간다고 인사를 하고 다시 혼자갔다.

 태양이 뜨겁다.. 이곳은 사막이다.. 물은 다떨어졌다... 계속 걸어가도 모래와 말라버린 풀들뿐...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처럼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한테 가까이 온적이 있는가?

 길을 걸어가는 도중 죽은 말 시체를 보았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될까? 훗날 이 느낌을 잊지 않도록 말 시체 사진을 찍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하긴.. 뜨거운 태양속에서 걸었으니 아마 일사병 징조라는 생각이 스쳤다.

 일단 다시 돌아갔다. 더 이상 전진하다가는 정말로 큰일날거라는 무의식중의 판단때문이다. 정말로 이렇게 차가 안지나가는 동네가 있다니..

 가는도중 아까 만났던 위구르인 2명이랑 마주쳤다. 그들은 나를 목장으로 데려가 계속해서 나한테 말을 걸었다.(어짜피 통하지 않지만) 아마 내가 정신을 잃지 않게 할려고 하는것 같다.

 이곳에서는 차가 더이상 지나가지 않고 내일 버스한대 지나가니까 그걸 타라고 하면서 오늘은 여기 있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여기있는 동안 내 이름을 '오스만'이라고 지어주었다.

 그들과 필담을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곳 목장은 중국인 지주가 여러 위구르인들을 부리는 모양이다. 위구르인 2명의 이름은 애재즈, 토디인데 애재즈가 특히 많은걸 물어 보았다. 한국에서 하루 막노동을 하면 얼마받느냐고 물었다. 난 300위엔(45000원)은 받을거라고 했다.

 그러니 그들은 놀란다. 여기서는 하루종일 일해도 25위엔(3750원)이라고 한다. 옆에서 지켜보니 그들은 밤 10시까지 일하는걸 볼 수 있었다.

 밤이 되어서 민텐에서 버스한대가 도착하고 많은 위구르인들이 목장으로 들어왔다. 아마 여기는 집단 숙소인가 보다. 그들은 저 멀리 한국에서 온 나를 진심으로 환영했다. 이슬람의 교리에따라 술은 못하고 아껴둔 콜라를 대접해 준다.
특히 빈라덴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진다. 난 한국젊은이들은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그 한마디에 꽤 반가워 한다. 사람이 많은 관계로 야외에서 이불을 깔고 잤다.
모기에 시달렸지만 위구르인들은 소똥을 태워서 모기를 쫏아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7월 22일(월)

 버스가 올때까지 위구르인들과 함께 노가다를 했다. 이들은 야외에서 일을 하면 태도가 달라진다. 한 10분 일하고 40분 쉰다.. 아무리 일하다 놀아도 머라 그러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마치 군대시절 생각이 났다. 영내에서 상관눈치보며 일하다 밖으로 나오면 놀면서 일하는 장면..

 20세 위구르 여자아이가 내손을 만지며 신기해한다. 그녀는 내 손이 굳은살이 베기지 않는 것을 신기해하며 자기손을 보여준다.
굳은살이 엄청나다.. 20살 꽃다운 나이에 이렇게 하루하루 일하며 근근히 먹고사는 모습이 애처로왔다.

 버스가 12시쯤에 도착을 했다.
하루에 한대가 있는 버스라 그런지 정말로 사람이 꽉찼다.

 이 버스를 10시간동안 탔다...

 한마디로 지옥이다....
평소에 털털한 나도 버스안 냄새에 적응하는데 오랜시간이 걸렸다.
모래사막이라서 정신없이 더웠다...
무엇보다도 삶의 희망보다도 삶의 고통이 가득한 위구르인들의 표정이 싫었다. 다른민족의 지배를 받는 이들의 현실이리라...

 특히 마지막 3시간은 정말 지옥이다.. 바로 황사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곳의 황사는 우리나라와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차창을 다 닫았음에도 버스안은 모래먼지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 버스안의 모든 구성원들은 가만히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드디어 치엔모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도시는 황사로 가득찼다. 모래알갱이가 마구 눈으로 들어올 정도이다.

 버스터미널 근처의 빈관은 꽉차서 난 계속 빈관을 찾아 걸었다.

 이곳은 마치 유령의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심한 황사때문에 사람들은 아무로 없었고.. 오직 정신나간듯한 위구루 삐끼한명이 나한테 알수 없는 말로 '짱쩌민... 주룽지... 리붕...'외치며 15분동안 날 따라왔다. 또한 가끔만나는 사람도 내가 말을 걸면 갑자기 악수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을 엉뚱하게 가르쳐주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시 외곽의 호텔을 찾았다.. 이곳은 천국이다. 32위엔의 저렴한 가격으로 샤워가능하고 TV시청 가능한 쾌적한 방을 얻었기 때문이다. 외국인 명부를 작성하면서 외국인 명부를 보았다. 2002년에 방문한 외국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고생스러운 나날이지만 2006년으로 계획하고 있는 세계일주의 귀중한 초석이 되리라.

 7월 23일(화)

 아침이 되니 황사가 그쳤다. 이곳도시는 계획 도시이다. 도시는 깨끗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에는 활기가 없다. 바로 주변 환경이 모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나의 마음까지도 황량해 지는거 같다..

 문뜩 한국으로 돌아갈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래도 모든것이 나에게는 값진 경험이다.

 버스터미널로 갔다. 이곳에서 류위창까지는 2일에 한번 버스가 출발한다. 내일 24일 9시30분에 있다고 한다.

 하루종일 호텔에서 쉬었다. 누워서 과일을 먹으며 오랫만에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 무리하게 여행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크로드 북로(카스~우루무치~류위창)로 서두르면 3일이면 도착한 류위창까지 남로도 북로랑 비슷할거라는 착각속에 출발한지 5일이 되도록 죽을 고비를 넘긴채 아직 도착을 못하고 있다.

 저녁때 피시방에 가서 밀린일지랑 티벳에 관한 정보를 찾았다.

 티벳에 대한 새로운 흥미가 다시 밀려온다.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카라코람 하이웨이.. 저멀리 설산이 보인다

중국의 마지막 국경도시 타클라마칸.. 산악지역에서의 오아시스이다.

산사태 장면..앞의 차는 내가 히치했던 차이다. 하마터면 휩쓸려 갈 뻔했다.

 목숨걸고 걸었던 반사막길.. 이곳에서 거의 일사병에 걸릴뻔 했다.

나를 구해주고 하룻밤 같이 지낸 위구르 인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버스로 사막을 달리다 보면 가끔 마을이 보인다. 어떻게 이런 모래속에서 사는지?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15(신장남로~우루무치~돈황)

 7월 25일(목)

외국인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이곳 치엔모에서 3일씩이나 기달렸다. 바로 루위창으로 떠나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이다. 버스는 4일에 한번 가는거 같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음날 버스표를 예매하러 갔는데 버스 터미널의 직원 이야기는 '밍티엔 메이요(내일 없어요..)'
... 순간 내 뇌리에 번개가 스쳤다. 꽈과쾅...(마음의 천정무너지는 소리)
황당해서 한참 이야기를 하다보니 알고보니 얼마전에 내린 비로 인해서 길이 끊겼다고 한다. 참나.. 미리 이런사실을 알았더라면 진작에 떠났을텐데..

 다행히 쿠얼러로 가는 차는 하루에 몇번 있었다. 난 비자연장(비자만기 28일)도 걱정이 되서 쿠얼로러 오후 5:00에 떠나기로 결정을 하고 표를 샀다. 침대차 가격이 무려 145위안.. 마음이 침통했다. 물론 비싼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비쌀수록 거리가 엄청 멀어지고 지옥같은 버스를 타는 시간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피시방에서 시간을 떼우다가 오후5:00에 버스를 타고 떠났다. 의미가 없는 치엔모에서의 3일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지친 여행의 재충전의 시간이기도 했다.

 치엔모에서 쿠얼러까지는 지도상의 길은 없지만 사막공로가 있다. 바로 석유를 수송하기 위한 길인데 정말로 잘 포장되어 있다.

 차창밖으로 본 사막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여행중 거의 처음으로 오리지날 모래로된 사막을 볼수 있었다. 특히 저녁때 해가 지는 시간에 따라 모래색깔이 오색으로 변하는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와.. 이곳이 진정한 실크로드구나.. 몇백년전의 상인들은 이곳을 낙타를 타고 건넜으리..
어쩌면 이런 사막을 보게 되것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막 곳곳의 석유시추불빛이 아득히 보였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사막공로를 가다가 갑자기 버스가 멈췄다. 바로 저녁을 먹기위해 섰는데 식당의 가격이 비싸다. 3위엔이면 먹을수 있는 라미엔이 8위안이다. 처음에는 비싸서 안먹을려고 했는데 한가족이 합심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곳까지 와서 열심히 돈벌려는 모습이 아름다워보여서 사먹었다.
식당안의 중국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있고, 바로옆의 위구르여인은 온몸을 차도르로 가리고 있다.(심지어 얼굴까지) 두 문화가 이렇게 가까이서 교차하는 모습에 싱긋 웃었다. 그러자 위구르 여인의 옆에 있던 꼬마 여자아이가 날 보면서 웃는다.(무슨의미인지 궁굼..)

 버스안은 한국에서는 상상할수 없는 냄새들로 가득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가장 힘들면서도 서민적인 정서를 잘 알수 있는곳이 장거리 버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 사막에서는 따로 화장실이 없다. 버스는 때때로 멈춰서 용변을 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는 이슬람정신도 실종된듯한다. 얼굴까지 가리는 이슬람 여인들도 조금 멀리 가서 하얀엉덩이를 내놓고 일을 보고, 남자들은 당연한다는듯 보이는데서 노상방뇨를 한다.

 나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요즘에는 주저않고 노상방뇨를 한다. 어짜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의 몸속을 빠져나간 액체들이 모래속으로 그대로 흡수되는 모습이 마치 스폰지가 흡수하는거 같다. 일을 보면서 한민족의 얼을 이곳에 뿌린다는 자부심을 약간 느끼기도 했다.

 이곳 실크로드 사막에서 난 자연스럽게 버스안에서 잠이 들었다.

 7월 26일(금)

 치엔모에서 쿠얼러까지는 700킬로가 넘는 거리이다. 그런데 버스가 생각보다 빨리도착을 했다. 새벽 5시에 날 쿠얼러로 떨어트린것이다. 와.. 12시간 밖에 안걸리다니..

 일단 할게 없으므로 근처의 피시방에 가서 대충 시간을 떼웠다.

 아침 9시가 되자 곧장 비자를 연장받으러 공안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는말(언어는 모르지만)..
'여기는 안되고 카스나 우루무치로 가세요'....

 진짜 지지리도 운이 없다. 파키스탄 국경 통과를 못한 이후 자꾸 불운이 나한테 온다는 느낌이 팍 들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게 만약에 오늘 루허창에 가는 버스를 타서 내일 거기에 도착해서 이런 결론을 얻었다면 나의 혼란이 더 가중되었으리라..

 곧장 우루무치로 가는 버스를 탔다. 10:00버스에 50위엔.. 적당한 가격이다. 버스는 무려 8시간이나 달렸다. 가는도중에는 사막과 반사막, 산악지역이 교차를 했다. 버스에서 내리고 비자연장 받으로 공안으로 갈려고 했지만 이미 문을 닫았다고 한다.

 우루무치에 도착하자마자 한 작업은 바로 숙소를 잡는것이다. 그런데 이곳숙소는 모두 100위엔이 넘는것이다. 심지어 싸다고 생각이 되서 찾아간 버스정류장근처의 여관들도 100위엔을 달라는 것이다. 뭐 믿고 이렇게 비싼걸까?

 할수 없이 돈을 아낄겸.. 그냥 피시방에서 밤새기로 했다. 이럴때를 대비를 해서 한국에서 이미 몇번 피시방에 밤샌 경험이 있지 않은가(사실은 오락에 빠져서^^)

 인터넷서핑중 내가 주로 이용하는 다음카페 '중여동(중국여행동아리)'가 생각이 났다.. '맞다 이런바보.. 거기서 찾으면 될거를' 난 싼숙소를 찾기위해서 찾아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우루무치 숙소에 대한 정보가 없다. 하지만 궁하면 통하는법.. 중여동 가장 밑부분인 '중국여행기'라는 게시판에서 몇달전에 여행한 여행자가 올려놓은 글을 보고 신장삔관이라는 곳이 싸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려 30위엔이면 떡을 친다는 사실..

 곧장택시를 타고 갔다. '신장삔관'이라고 하니까 곧장 알아듣고 간다. 그렇지만 무지 먼 거리였다. 무려 택시요금이 13위엔이나 나왔다. 좀 아깝긴 해도 100위안넘는 숙소보다는 낳을 것이리라.
신장빈관은 2성급 호텔이다. 그런데 4인방 게스트 하우스가 16위엔이다. 택시요금이랑 삐까한 금액이다. 샤워도 가능하고 쾌적한 8층에 있다. 정말이지 흙속에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중에 우루무치를 가게 되면 꼭 기차역 근처의 신장삔관으로 가도록..

 방으로 들어가니 잉글랜드 남자1명이랑 벨기에 여자 2명이 있었다. 오랫만에 대화라는것을 해봐서 기쁘기는 했지만 영어가 내가 제일 딸렸다. 잉글랜드 남자는 카스로 간다고 하고 벨기에 여자 2명은 21살이고 대학생인데 투루판으로 간다고 한다.

 그들에게 그 지역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글구 치엔모에서 이곳까지 20시간이나 버스를 탄 피곤한 몸을 잠으로 달래 주었다.

 7월 27일(토)

 아침에 중국은행으로 가서 환전을 했다. 이번에는 티벳으로 들어갈걸 대비해서 200달러를 환전했다. 아 참.. 여기 토요일은 은행이 11:00에서 3:30까지만 여니까 꼭 주의해서 가도록.

 곧장 비자 연장을 받으로 공안국으로 갔다. 이번에는 받을수 있겠지.. 그런데 공안국바로 옆의 외사과의 문이 열지 않는것이다. 자초지정을 알아보니 토,일요일에는 외사과가 문을 안열고 월요일에 오라는 것이다. 외사과를 찾고 자초지정을 알게된데에는 한 중국 여자가 1시간동안 날 도와줘서 알게된것이다. 정말로 자기 일을 제쳐두고 나때문에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닌 그녀가 정말 천사같았다.

 여기서 2가지중에 한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우루무치에서 월요일까지 기다려서 안전하게 비자연장을 받을까.. 아니면 돈황으로 가서 여행을 진행하면서 연장받을까..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곧장 체크아웃을 하고 삔관 근처에 있는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줄서 있었다. 아마 토요일이라서 그런가 보다.

 기차표를 살때에는 줄을 잘 서야한다. 처음에 줄을 서서 내앞에 5~6명밖에 없었던 시점 1시30분이 되자 창구에 있던 직원이 떠난다. 바로 옆 창구가 열린다. 바로 창구마다 시간이 있는 것이다. 내가 있던 창구는 09:00에서 13:30분까지 이고 15:30분에 다시 여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암표상들이 설친다.. 하긴 이곳에서 몇탕만 잘 치르면 저번에 보았던 위구르인들 하루 임금 25위엔은 편하게 벌겠지..

 처음부터 다시줄을 섰다. 한 30분 기다리니 이제 내차례가 돌아왔다. 이곳 매표원들은 여자들인데 거의 손님에 대한 친절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다. 막 신경질을 낸다.

 그렇지만 내가 외국인임을 아는 순간 태도가 달라진다. 웃으면서 대하고 바로 뒤와 옆에 있던 사람 심지어 새치기 할려고 옆에서 기회를 노리던 사람들도 나를 도와준다.

 돈황까지의 표가 375위엔... 머가 이렇게 비싸?라고 생각을 하며 일단샀다. 그런데 목적지가 다르게 나왔다. 어쩐지..
바로 표를 바꿀려고 하니까 내가 외국인임을 이미 알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도와준다. 한꺼번에 여러사람이 '둔화앙'하면서 말을 한다. 매표원은 황급히 표정이 바뀌더니 표를 바꿔주고 잔액을 돌려준다. 그러면서 웃는다. 그러더니 옆에 사람들도 함께 웃는다. 전쟁터와 같던 매표소에 잠시 웃음꽃이 피었다. 돈황까지의 침대 기차는 175위엔..

 그때 시간 오후 1시 30분 기차시간 오후 9시.. 웃음의 장본인이 된 난 곧장 피시방으로 갔다. 저번에 메일이 보내지지 않았던 최악의 피시방을 피해..

 오후 9시에 기차를 탔다. 또 낯선사람과의 만남이 시작되는군.. 그런데 내가 탄 침대옆에 바로 한국인 가족이 있었다. 이런 행운이...

 전주대학교에서 중국사를 가르치는 김종윤 교수님이었다. 그리고 부인은 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15살 아들.. 이렇게 3가족이 중국인 4명과 함께 패키지를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나에게 그동안 먹고 싶어했던 햄버거와 먹을것을 주시면서(그러고보니 이미 아침 점심 굶은 상태) 중국어를 모르고 혼자여행한 나를 칭찬하시면서 나의 여행 이야기를 경청해 주셨다. 3명의 가족이 나의 여행기를 들으면서 같이 즐거워했다.

 불이 꺼지고 교수님과 난 중국에 대해서 토론을 하였다. 교수님은 중국을 앞으로 함께할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논조와 현재 중국정부로는 경계를 해야 한다는 나의 논조가 맞섰다. 하지만 교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결론은 같은 것이다.
또한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이란 어떤나라인가? 1달을 여행하면서 느낀 중국은 일단 거대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거대한게 큰힘이 될수도 있지만 변화에는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작은 배이고 중국은 항공모함이다. 작은 배는 한번 부서지면 타격이 크지만 금방 고칠수 있고, 방향전환도 금방된다. 바로 우리나라가 IMF사태때 일시적으로 타격이 컸지만 금방 회복을 하고 변화의 바람도 빠르게 진행된다.
그렇지만 항공모함은 크게 부서지지않는다. 서서히 가라 않을 뿐이다. 또한 방향전환도 신중하고 빠른 전환이 힘들다.. 어쩌면 중국이 이와 같지 않을까? 아직은 부서지지 않았지만 만약에 한번 잘못된 정책이 항공모함에 적용이 되면 중국은 수렁에 빠지기 쉽다.

 바로 60년대 문화혁명과 70년대 대약진 운동이라는 엉성한 경제정책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그에 따른 회복을 하는데 몇십년이 걸렸다는것이 그걸 증명하지 않는가..

 중국이 잘살기 위해서는 몇가지를 해결해야 한다. 이건 중국을 여행하면서 느낀거고 또한 많은 사람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것이다.

 1. 소수민족문제 해결이다.
 현재 중국은 티벳과 위그루지역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티벳과 같은 경우는 아직도 독립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문화와 인종이 완전히 다른이상 독립을 시켜줘야 하지 않을까? 중국정부가 천안문사태때 강력진압을 했던것도 소련처럼 되지 않을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정부가 약해지면 소수민족들의 독립운동이 활발해 질거는 당연한 사실이다.

 2. 중국의 민주화.
 이건 1번과 연계되는 문제이다. 세계사에서 정부가 가장 약했을때가 체제를 변화시킬때이다. 왕정~민주주의, 공산주의~민주주의 모두 한시적인 대혼란을 모든국가가 겪었다.
중국정부가 약해지고 통제력이 약해질때 바로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이 일어날수도 있다. 한 중국대학생은 중국정부는 강해서 그런일은 없을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난 그 강하던 소련도 한순간에 분열되지 않았는가.. 하고 대답을 한다.
중국이 민주화를 이룰수 있는 전제조건은 1번의 해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3. 농촌 도시간 빈부격차
 이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만약에 자유가 생기면 모두 도시로 이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느낀 농촌 도시간의 빈부격차는 심하다. 물가도 그렇지만 북경과 이곳 신장을 비교해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이 문제는 1,2번이 해결이 되면 중국의 당면한 최대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4. 환경문제
 이것역시 심각하다. 왜 심각하면 중국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땅이 넓으니까 환경이 오염이 되는걸 잘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중국사람들이 열차나 버스를 타면서 밖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를 버리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그렇지만 그 큰땅에서 환경문제가 이슈화 되었을때 그때의 중국은 얼마나 쓰레기와 오염물질로 더럽혀져 있을까.. 오염을 인지하는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회복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들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으로 난 2007년이 중국이 크게 변화하고 변화를 선택당하는 시기가 될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8년의 베이찡 올림픽으로 그시기에는 온세계의 이목이 집중될것이며 그에 따른 각계각층의 불만도 표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에 민주화된것도 좋은 예이다.

 난 중국을 여행하면서 하나 느낀 것은 우리나라가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원래 300개의 소수민족이 있었다. 우리도 이들 민족중에 하나였고 소수민족은 한족이라는 이름하에 하나하나 동화되어 갔다. 한족은 고유의 민족이라기 보다는 여러민족이 융합된 민족이다.

 지금은 56개의 민족이 남아있다. 그렇지만 이들 민족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언어보다는 중국어가 친숙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중심부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고유의 문화를 지켜냈다. 그것은 섬나라로 고립이 되서 민족성을 지켜낸 일본과 중국의 중심과 멀리 떨어져 있는 베트남, 중국인들에게는 쓸모없는 땅으로 인식된 몽고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이 가능한것은 바로 우리 고유의 문자 한글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런 쓸데없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면서 기차안에서 잠이 들었다.

 7월 28일(일)

 류위안역에 오전 09:00에 도착을 했다. 난 류위안역에서 한구가족 3인을 포함한 7인의 여행자들에 묻혀서 공짜로 아침도 먹고 버스로 이동할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행사직원을 통해서 돈황에서의 비자연장 가능여부를 빨리 알수 있었다.. 결과는 no..큰일났다 오늘이 마지막날인데.. 월요일도 안되고 난주로 가보라고 한다.

 결국 난주로 가기로 하고, 떠날려고 했다. 그런데 나랑 동행했던 여행자들이 같이 식사를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점심을 함께했다.

 중국인 소녀중에 18살인 여자애가 있는데 베이찡에서 대학을 다니게된 엘리트이다. 이 소녀는 영어를 나보다도 잘한다. 그래서 나랑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같은 테이블에 식사를 하면서 중국아줌마들이 나한테 질문을 한다. 통역은 교수님 부인께서 해주셨다.
중국인 아줌마들은 내가 키도 크고 앳되게 생기고 잘생겼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서로 자기 딸을 소개 시켜준다고 하셨다.
나도 중국여자들이 너무 예뻐서 사귀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한 아줌마가 아까 18살 여자애를 가르키면서 어떠나고 물어보았다. 난 좋다고 했다. 여자애는 얼굴이 빨개졌다.ㅋㅋㅋ

 그 여자애의 엄마인듯한 분이 자신은 서로 좋아하면 누굴 사귀든지 상관안한다고 했다. 어라? 벌써 일이 이렇게 진척된거야.

 통역을 해주시는 교수님이 중국여자들은 우유부단한 중국남자보다는 화끈한 한국남자에 매력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아.. 그래서 한국남자들이 인기가 많구나..

 아줌마들께서 한국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사람들이 많은 식당에서 중국남자 같은 경우는 못했으리.. 그치만 난 한국남자이다. 수십명이 있는 식당에서 당당히 한국어로 공일오비의 '이젠안녕'을 불렀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 소녀 엄마께서는 마치 사위를 보듯이 흡족한 웃음을 지으신다. 어라? 이러다 정말 장가가겠는데..(그것도 6살 어린 귀여운 소녀와)

 그 소녀는 나한테 자기보다 이쁜애를 소개시켜준다고 하며 이메일 주소를 물어본다. 그러면서 다음에 북경에 들르면 꼭 연락하라고 한다.

 그 소녀는 자기 이름을 종이에 적어주었다. 그런데 이름이 '손청맹'.. 중국어로도 "쑨칭멍".. 씩 웃으니까 손청맹은 이름의 뜻이 자라나는 푸른 새싹이라고 설명해준다.

 여행자들이랑 헤어지고 다시 미니버스를 타고 류위안역으로 왔다. 버스는 15위안밖에 안한다. 오면서 홍콩의 대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왔다.

 오후 4시에 티켓을 끊었는데 기차는 오후 9시였다. 시간이 남아서 류위안 시내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땅이 검은 편인데 그게 다 광물자원이라고 한다. 몇십미터를 파들어가야 겨우나올까말까한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 볼때 그냥 걷어내기만 하면 되는 중국의 자원이 부러웠다.

 7월 28일 여행기는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 16편에서 계속...

 이때는 찍은 사진이 없어서 류위안 주변 풍경 사진 2개를 올려 놓겠다.. 80%가 철도 직원의 가족인 류위안 시 일대.

 류위안 근처의 산들은 그야말로 광물로 이루어진 산이다.그냥 퍼기만 하면 다 자원이 되는 것이다.

 

찬수의 실크로드 여행기16 (난주~꺼얼무)

 7월 28일(일)

 류위안 역에서 우연히 한국 유학생을 만났다. 처음에 둘다 한국사람인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과감하게 그녀가 '한국 사람이세요?'라고 말을 걸었던 것이다.

 난 먼저 입석으로 되어있는 기차표를 침대표(차액만 내면 언제든지 기차안에서도 가능)로 바꾸고 그녀가 있는 칸으로 놀러갔다.

 그녀는 덕성여대 중문과에 재학하다가 시안으로 유학을 온 99학번이다. 같이 이야기 하면서 여자 혼자서 여행하는게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한 난 격동의 70년대생이고 그녀는 풍요의 80년대생 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알고보니 내가 아는사람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우리학교 국어교육과 99학번 여학우..)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굶주려 있던 나에게 많은 먹을것을 제공해준게 정말로 고마웠다.(이게 핵심임)  밤 늦게 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 옆자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는 것이다. 거의 다 죽어가는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계속 간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환자는 나이가 50세가 조금 넘어보이고 거의 살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응급환자라서 그나마 발전된 자위관으로 기차를 통해서 후송을 하고 있는것 같은데, 링겔은 상상할수도 없고 가래로 막힌 환자의 기도를 나무젓가락을 이용을 해서 열어주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숨이 넘어갈때 마다 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강력한 안마를 통해 위기를 넘기곤 했다.

 더욱 실망스러운것은 주위의 중국인의 태도였다. 그들은 환자를 도울려고 하는것 보다는 '저사람 언제 죽나?'하며 구경을 하는 분위기였다.

 난 여행중에 정이 들었던 수건을 꺼내서 찬물로 적셔준다음 환자의 머리에 올려주었다. 가족들이 진심으로 감사를 한다.
언제 숨이 넘어갈지는 모르지만 그 환자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외국인 한명이그 주위를 지켜주었다는 임종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환자의 동공이 아주 작아졌다. 이제 이 동공이 완전히 풀리면 이 사람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것이다. 가족들이 울기 시작한다.

 가만 앉아서 환자를 지켜보았다. 여태까지 중국 여행을 하면서 인구가 13억이라는 점만 생각을 했지, 그 많은 인구 하나하나속에서도 삶과 죽음이 있다는것을 무심코 생각하지 못했다.
이 환자의 인생은 어땠을까? 격동의 중국의 역사와 함께 했던 한 인간이 이제는 죽음을 맞고 있는 순간을 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가장 기뻤을때는 언제였을까? 만약에 이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면..?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나를 비롯해서 기차 여승무원 몇명이 간호를 해주었다. 여승무원들은 마치 자신의 일인것처럼 도와주고 간호를 해주었다.

  드디어 자위관 역에 도착을 했다. 미리 앰블런스가 대기해 있었고 다행히 그때까지 환자의 숨은 넘어가지 않았지만 지금 이글을 쓰는 시점에서 살아있다고 가정할수는 없다.

 내 침대에 누워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28일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된 날로 기억이 될것이다. 성과가 있다면 내가 기차칸의 사람들에게 '코리아'를 조금 높인 정도?

기차 기적 소리와 함께 여행은 계속 되고 있다.

7월 29일(월)

 이날은 법적으로 난 불법 체류자이다. 왜냐하면 어제 이미 비자기간을 넘겼기 때문이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어제 일요일이라서 공안국이 안열었다는 정도.

 먼저 기차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탔다. 미터기를 꺽지 않는 택시 기사왈 '20콰이(20위엔)' 당연히 과감히 내렸다. 20위엔을 부르는걸 보니 그렇게 먼 곳이라는 생각은 안들었다.

 다음은 오토바이를 잡아서 물어보았다. '15콰이'.... 이 아저씨가 누구를 물로 보나? 뒤돌아서는 순간 12콰이..10콰이..8콰이로 낮아지지만 가격보다도 관광객을 뜯어 먹겠다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결국 물어 물어서 버스를 타고 1콰이에 공안국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공안국을 찾을때까지 버스에서 만난 한 아줌마가 끝까지 날 따라와서 안내해 주셨다. 정말로 고마웠다. 같은 땅에도 여러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공안국에 가니까 외사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길을 안내해 주는데 정말로 막막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비자를 연장 못받나,.. 이미 4군데에서 발을 돌려야 했던 난 머리가 아플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공안국에서 100미터정도 걸어서 겨우 외사과를 찾았다. 외사과의 공안중에 스트레이트 파마를 한 여자공안이 있는데 정말로 이뻤다. 영어는 그녀의 말대로 Little 하지만 정말로 친절하고 웃는게 인상적이었다.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나서 난 시험결과를 기다리는 수험생의 기분으로 기다렸다. 제발.. 벌금 500위엔은 내지 말아야 될텐데..

 한 할머니가 나오더니 나에게 다시 여권을 돌려주면서 수수료를 받는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200위엔으로 알고 있는 수수료를 85위엔 밖에 안 받는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불행의 연속에서 행운의 서광이 비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왕 난주시내를 온 김에 관광까지 하기로 했다. 먼저 찾아간곳은 감숙성 박물관.. 원래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난 문닫을 시간(4:30)에 와서 못들어가게한 걸 각종 애교를 다 떨어서 10분안에 보고 나온다는 조건으로 공짜로 구경할 수 있었다.
다음에 본것은 '백마사' 이다. 학생할인을 받을려고 했지만 입장료가 5위엔이라 그냥 그대로 내고 들어왔다.
백마사는 거의 산 하나를 절로 만들었는데 꼭대기에 올라가니까 난주시내가 한눈에 다 보인다.

 난주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느낀것은 정말로 거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 이유중에 하나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난주만이 1년정도 자유롭게 이주할수 있도록 오픈했었는데 그때 부랑자와 거지들이 많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만약에 베이찡과 상해가 자유롭게 개방이 되면 어떻게 될지 간접적으로 알수 있었다. 아직까지 중국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공산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낄수 있었다.

 원래 이날 시닝으로 갈려고 했지만 기차표가 없었다. 결국에는 일단 내일 꺼얼무까지 다이렉트로 가고 여기서 하루 자기로 했다. 여기서 하루 쉬는 대신 꺼얼무까지는 잉쮜(딱딱한 의자)표를 샀다. '오늘 푹쉬고 내일 기차에서 죽자'라는 생각을 했다.

 난주역 바로 앞의 호텔은 도미토리가 20위안밖에 안한다. 난 대만애랑 캐나다애랑 같이 방을 썼는데, 대만에서 영어교사를 한다는 캐나다애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국어가 유창해서 내가 한국어는 배울 생각 없냐고 물어보니 '한국어는 어딜가도 써먹을데가 없다'라고 대답한다. 맞는 이야기긴 하지만 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7월 30일(화)

 대만애가 깨워져서 같이 아침을 먹으러 갔다.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이상하게 중국계 여행자들이 나한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느낄수 있었다. '왜그럴까?' 내가 무슨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마 아는것도 하나도 없으면서 괜히 자신감있는 표정으로 다녀서 그런가 보다.. 하고 분석을 하기는 했다.

날 깨워준 대만여행자가 아침을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지도상에서 잘 모르는 중국 발음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오후 5시까지 난주의 한 피시방에 있다가 6시에 기차를 탔다.

 잉쮜는 역시 열악했다. 순간 침대차로 탈걸.. 하고 후회는 했지만 그래도 도착해서 내리는 순간 뿌듯한 기분을 느낄거 같아서 그냥 탔다.

 잉쮜는 좀 무질서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가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틈만 나면 다른사람자리를 차지를 해서 잠을 자곤 한다.
특히 내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의 자리를 어떤 한 남자가 빼앗더니 태연하게 있는 것이다. 그의 뿌듯한 모습을 보며 한국인의 매너를 보여줘야 겠다고 생각을 했다.

 자리를 빼앗긴 여자에게 필담을 통해서 한국에서는 여자가 첫번째이고 남자가 두번째라고 하면서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당연히 자리를 빼앗은 남자의 표정은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어떻게 보면 자기 때문에 외국인의 자리를 빼앗을 거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으리라.

 일부러 그 사람의 정면쪽에서 종이를 깔고 앉았다. 그 남자는 계속해서 나의 눈치를 살펴본다.

 그렇게 쭈그린 채로 잠이 들었다. 여름이기는 하지만 밤의 기차는 정말로 추웠다. 추위에 깨어서 다시 자리로 가보니까 아까 그남자는 사라지고 자리를 양보해 주었던 여자애가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녀는 무척 추워보였다. 다시 한번 한국 남자의 매너를 알리기 위해서 윗잠바를 벗어주었다.
우리는 금방 친해져서 필담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중국 한자는 우리한자랑 틀리지만 간혹가다 아는 글자가 있어서 끊기지 않고 이야기 할수 있었다.

 그녀는 이름이 마주이매이 이고 22살이며 난주에 산다고 한다. 꺼얼무로는 여행을 간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다가 의자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바싹 붙는 것이다.
이런.. 나의 호의가 자신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그런걸로 생각한 모양이다. 주위의 중국 사람들이 신기한듯 우리는 쳐다본다. 이건 완전히 한국인의 호의를 보여준게 아니라 한국인의 작업을 내가 있는 기차칸에 알려준 모양이다.
때문에 밤새 그녀를 외면하기 위해 거의 잠을 설쳤다.

 7월 31일(수)

 기차에서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딱딱한 의자에 무려 17시간이 지나서야 꺼얼무에 도착할수 있었다. 하긴 부산에서 신의주 거리보다 긴 거리를 달렸으니..
어제 그녀가 나한테 묻는다. 오늘 어디로 갈거냐고.. 난 당연히 오늘 즉시 티벳으로 갈거라고 대답을 했다. 아침 내내 서먹한 기분이다.

아침 11시에 꺼얼무에 도착을 했다..

 

 백마사 정상에서 바라본 난주 시내 모습. 황하를 중심으로 건물이 펼쳐졌다.

 난주역의 전경..

 나와 함께지낸 대만, 캐나다 여행자

 

 

 쿠처에서 천불동으로 가는 길.. 온통 바위 사막이다.

 사막을 가로 질러 저 멀리 설산이 보인다.

 쿠쳐역에서 1시간정도 택시를 타고 도착한 천불동입구

 실크로드 지역은 어디서나 당나귀 마차를 볼 수 있다.

 쿠처에서 위구르 아이들이 날 정말 좋아했다.(빨간모자 어린이가 내가 오웬이라고 별명을 지어준 아이)

 기념사진이라도 찍으라고 해서 전등 불 켜놓고 찍었는데 의외로 사진이 잘 나왔다.

 카스의 중앙탑에서 본 카스시내의 모습

 이 모스크에서 왼쪽으로 가면 번화한 시장이다.

 모스크 안의 장식들.. 휘양 찬란하다.

 실크로드 박물관에 그려져 있는 신장우월자치구 지도

 카스의 바자르에서는 이런 모피들을 값사게 살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으로의 반입은 금지되어 있다.

 열심히 장사에 열중인 상인의 모습.. 이곳 남자는 제임스딘 모자를 즐겨 쓴다.

 쿠처에서부터 나와 함께한 한국인 여행자 종호, 준섭, 수진이 누나

 국제 버스.. 매일 아침 7시 카스에서 출발하여 파키스탄 서스트까지 운행한다.

 티비가 부족한 위구르 마을에는 사진처럼 티비를 방영하는 식당이 즐비하다.. 우리나라의 60년대 모습과 흡사하다.

 처음 파키스탄으로 가는길은 역시 끝없는 사막이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에 들어서기 전의 검문소

 버스위에는 파키스탄으로 가져갈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버스를 타다 보면 사방이 눈으로 덮힌 산이다.

 그 동안 정들었던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이 곳 정상에는 넓은 호수가 자리잡고 있다.

 설산을 배경으로 구름들이 아름답게 지나다니고 있다.

 타클라마칸의 한 식당에서는 매일같이 춤을 추는 콘서트를 갖는다. 마치 우리나라의 나이트 같다. 위구르 음악을 실컷 들을 기회이다.

 사진으로는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끝없이 이어진 도로를 찍은 사진이다.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가다 보면 이렇게 운전자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마을을 볼 수 있다. 한끼식사에 5위엔

 산사태가 나서 막힌 길을 불도저가 치우고 있다.

 허텐에서 나와 함께했던 대학생 장(초록색옷)과 한족 아저씨

 사진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이 여자애는 가수 박지윤과 매우 닮았다.

 민텐에서 하루 묵었던 초대소(숙소).. 매우 저렴하다

 사막에 한참 헤메고 있을 때 죽은 말 시체를 보았다. 혹시 나도 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찰칵..

 사막에서 나를 구해준 위구르인들.. 정말 친절한 사람이다.

 하룻밤 신세진 집에서 친해진 위구르 청년과 함께..

 위구르 사람들은 한국인인 나에게 흥미를 갖고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난주시내를 관통하는 황하

 백마사 정상에 있는 탑앞에서..

 궤도차량 선로가 얽혀 있는 난주 시내.. 많은 전선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