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97.8.9~97.8.26)

 

 

  우리에게 있어서 도전의 시기는 바로 20대 이다. 20대 만큼 실패도 용서가 되고, 미지를 향해 달려 나가는 시기는 아마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생각으로 12년의 정규 교육을 마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20대를 맞았다. 그러한 나의 선택은 바로 여행이었다. 여행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인생수업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대학교를 다니며 교대생 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강요받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지만 과감히 그러한 것들을 떨치고 많은 경험으로 그걸 대처 할 수 있는 길을 선택을 했다. 두 번에 걸친 자전거 여행과 또 두 번에 걸친 국토 순례 그 외의 여러 여행은 그 순간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공부가 될 것이다.

 

  그럼 수 많은 경험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고 3때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때는 누구나 그랬듯이 공부에 찌들리는 시기이다. 그 시기에 난 전국일주에 목말라 있었다. 대학만 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생각이 새내기때 과감하게 혼자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그전에 전국일주에 큰 힘이 된 것은 바로 강원도 일주이다. 방학이 시작되자 언제나 절친하고 같이 다녔던 동기 형도와의 강원도 일주는 앞으로의 여행에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고 막연하게 환상으로 남아 있는 여행을 현실로 만들어준 여행이었다.

 

 강원도 일주를 할 때에는 날씨가 좋지 않았다. 바로 장마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열정만큼 최악의 조건은 아니었다. 강원도 일주는 춘천에서 출발하여 양구→인제→설악산(한계령)→양양→강릉→동해까지 도달하는데 4일이 걸렸다.

 

  어떠한 여행이 그렇듯이 고마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우리가 지쳐서 히치를 할 때 기꺼이 태워주신 분들을 비롯해서 몸보신을 시켜준 과선배 그리고 강릉에서 잘 곳이 없어서 헤메고 있을 때 기꺼이 재워준 아저씨, 또한 한계령의 빗길에서 미끄러져 형도 자전거가 망가졌을 때 어쩔수 없이 비 맞으며 걸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고생한다며 공짜로 닭죽을 주신 휴게소 아줌마...

 

  동해에서 부터는 동행자인 형도가 동해시에 있는 애인에 사랑에 눈이 멀어 떠나는 바람에 혼자서 여행을 해야 했다. 정선, 평창, 횡성, 홍천, 춘천 순으로 갔다. 혼자서 여행 할 때에는 고독감과 외로움이 잇지만 반면에 무한한 자유로움과 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여행이 그렇게 즐거운 것은 아닌 것 같아.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여행을 하게 되면 후회를 할 때가 무척 많다.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되는지 스스로 의문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건 어쩌면 돌아갈 집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다 마쳤을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물론 평생 남겨질 사진과 함께 ...

 

  이건 역마살이 끼어서 그런지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면 왠지 모르게 다시 몸이 근질거린다.

새내기 첫 여름방학때도 그랬다. 강원도 일주를 마치고 선배들의 권유로 그 힘들다는 통선대(이건 알만한 사람만 아는 활동이다) 활동을 했다. 그리고 통선대 활동을 끝내고 그 지친몸을 이끌고 전국일주를 과감하게 시작했다. 통선대를 마치고 난 시점에서 전국일주를 한다는 것은 학교 수업을 며칠 빼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이 되어서 과감하게 시작했다.

 

  전국일주를 준비 하는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 밑바탕에는 바로 강원도 일주라는 경험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한번 하기가 힘들지 하고 나면 어떠한 여행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는 것이다.

 

  1997년 8월 7일 나로서는 역사적으니 그리고 초등학교때부터 꿈꾸던 자전거 전국일주가 시작되었다. 혼자서 여행을 해야된다는 부담이 있긴 하지만. 그 만큼 더 좋은 경험이 되리라는 기대와 함께...

 

 

 

첫째날(97. 8. 9)

 

  여행의 시작은 바로 하자마자 힘든 난관에 부딧치면서 시작되었다. 원창고개 이다. 분지인 춘천에서 원주쪽으로 가는데 꼭 지나가야 되는 코스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가야하는 길이다. 모든 고개가 그렇지만 정말이지 오르막의 연속 이었다. 내려쬐는 태양 아래서 1시간 반동안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자전거를 여행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오르막길 이다. 왜냐하면 오르막에서는 무조건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즉 1시간 정도 죽어라 올라가면 5분이면 엄청난 속도로 내려오는 것이다. 내려오는 기분은 짜릿하기는 하지만 올라올 때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는 너무 약한 기분마저 든다.

  

  강렬한 태양 아래서 원창고개를 다 오르고 나서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바로 머릿속에 두가지 선택이 떠오른 것이다. 다시 춘천으로 내려가서 남은 방학을 평안하게 보낼 것인지? 아니면 고생스럽지만 평생의 추억을 만들 것인지.... 짧지만 정말 긴 선택의 시간 이었다.

 

  결국 나의 선택은 지금 와서도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였다. 바로 홍천쪽으로 과감히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 때의 선택을 여행도중에 후회한 적이 많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을 결정 지을수도 있는 선택이기도 했다.

 

드디어 자전거 전국일주 시작(학생회관)

하룻밤 87학번 선배님 부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고 다음 여행의 밑거름이 되었다. 정말로 절실히 느낀 것은 군대 시절이다. 군대에 와서 다른 이들에게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가 바로 사회에 있을 때 평범하게 지냈다는 것을 많이 후회들 한다. 그 점에 있어서는 정말이지 많은 자랑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원창고개를 넘자 그 다음부터는 비교적 수월하게 갈수 있었다. 특히 이 길은 강원도 일주를 하면서 지나왔던 길이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하게 내려쬐는 8월의 햇빛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반팔 옷을 입은 나의 팔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나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결국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따가운 낮을 피해 저녁때 강행군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길가 옆 농두렁에서 판자 하나 깔아 놓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3시간 동안 낮잠을 잤다. 여행은 여유롭게 해야한다는 맛을 알게 되었다.

 

저녁이 되자 다시 강행군을 시작 했고, 춘천이랑 20㎞ 떨어진 홍천에 도착하였다. 아는 사람도 없고, 날도 어둡지 않아서 곧바로 횡성으로 떠낫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힘든 것은 앞에도 말했지만 바로 고개이다. 고개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아무래도 경사가 완만하고 긴 고개가 제일 짜증난다. 그런 고개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홍천과 횡성 사이에 있는 세마치 고개이다. 처음에는 그냥 페달을 밟으면서 올라 갔지만 계속되는 완만한 오르막에 어쩔 수 없이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가야 했다. 정말이지 많은 시간을 허비 했다. 횡성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넘어가 있었다.

 

  잘 곳이 마땅치 않은 나로서는 가지고 다니던 전국 도로 지도에서 제일 가까운 초등학교를 찾았다. 내 스스로가 교대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초등학교에서 자는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성북 초등학교는 부근의 학교에 비해 큰 초등학교이다.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씨름장에 침낭을 깔았으나 아무래도 관사 아저씨의 허락을 받아야 오해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관사로 가게 되었다. 관사에는 의외로 선생님이 사셨는데 알고 보니 우리학교 87학번 선배 실과과의 김영철 선배님이었다. 비록 안면은 없었지만 학교 선배,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반가워 했다. 선배님은 유치원 교사인 부인과 같이 사셨는데 꽤 미인이고 참해 보였다. 그 날 선배님 내외와 근처의 설렁탕 집에 가서 저녁도 얻어먹고 현직 교사로서의 경험담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후배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사랑을 느끼며 여행 첫날은 관사에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둘째날(97. 8. 10)

 

  아침 일찍 일어나서 원주방향으로 출발을 했다. 선배님께서는 여행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해 주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자며 연락처를 적어 주셨다.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자전거를 끌고 시골 도로를 가는 즐거움.. 원주 방면으로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걱정인 것은 날씨가 무척 흐렸다는 것이다. 저번 강원도 일주때 이미 악천후에서 톡톡히 고생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날씨는 흐리다뿐이지 그뿐이었다. 비는 거의 안 내렸던 것이다. 앞으로 여행하는데 거의 흐린 날씨에서 하게 되지만 오히려 강한 햇빛을 막아 주었다. 여름 자전거 여행에서 가장 큰 적은 햇빛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여름에 여행을 하면 반팔보다는 긴 팔 여름 난방을 꼭 가져가라고 권하고 싶다.

     

고구려 시대에 세워진, 국토의 중앙을 나타내는 고구려 중원비

 원주로 가는 길은 일부러 서둘렀다. 왜냐하면 과 동기인 지혜가 점심을 사주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서둔 탓인가? 오히려 너무 일찍 왔던 것이다. 지혜에게 삐삐를 치니 2시간 정도만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급했던 나는 가만히 있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냥 충주방향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충주로 가는 길은 비교적 한산했다. 가면서 연세대 원주 캠퍼스를 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캠퍼스가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강원도를 완전히 벗어나 충청도에 들어섰다. 충주에 들어서는 길목에 국보 2개를 볼 수 있었는데 특히 교과서에서만 보던 고구려 중원비와 중앙탑을 보았다. 그리고 충주 시내에 들어서는 입구에 잇는 충주의 명소 탄금대를 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처음 출발한 횡성에서 충주까지는 꽤 먼거리이다. 거의 쉼 없이 달려왔다. 충주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 되어 있었다. 충주 시내를 우회해서 건대 충주 캠퍼스에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했으나 경비원에게 거절당했다. 여행을 하다가 다른이의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가 있는데 거절당한 경우가 있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 사람들은 날 의심하거나 거절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무안을 당하느니 차라리 다른 곳을 찾는게 현명하다. 서운하기는 해도 여행에서 모든 것이 잘되면 그 또한 재미없다는 생각도 문뜩 든다.

 

  지도책을 펼쳐 놓고 보니까 수안보쪽에 초등학교가 몇 개 표시되어 있었다. 어두운 밤길을 홀로 달리기 시작했다. 밤길은 쓸쓸한 것도 그렇지만, 무법자 대형 트럭을 조심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상상도 못할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트럭이 한번 지나가면 자전거가 바람에 흔들릴 정도니.. 그래서 웬만하면 밤길 국도는 가는 것을 피해야 되는게 상책이가. 실제로 이번 여행중에 트럭으로 인한 대형 사고에 휩쓸릴 뻔한 적이 있다.

 

  수안보까지 가는데는 정말 피곤했다. 밤길을 달려 가까스로 제일 가까운 초등학교를 갔지만 이미 폐교가 되 있어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폐교가 된 학교는 귀신이 나올 것처럼 으스스해 보였다. 하나의 초등학교의 폐교는 바로 그 지역 사회의 위축됨을 의미하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근처의 온천을 제외하고 별 다른 비전이 없어 보이는 그 지역은 젊은이들이 다 빠져 나가서 그런지 쓸쓸해 보였다.

 

  밤길을 달리다 공사중인 국도를 통하여 세성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거기서 관사에 노크를 하니까 아주 정정해 보이는 60대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학교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한 후 할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편히 잘 수 있었다. 관연 내일은 어떤 경험을 할까 생각하면서....

 

 

 

셋째날(97. 8. 11)

 

  세성 초등학교의 아침이 밝았다. 한 여름이라서 그런지 6시에 일어나도 대낮처럼 밝은 느낌이다. 전날 밤의 강행군으로 피곤했기는 하지만 넘치는 의욕을 주체 할 수 없었는지 저절로 6시에 일어난 것이다. 이날은 목표를 길게 잡았다. 충청북도의 제 1도시인 청주까지 가기 위해서 이다. 청주를 목표로 정한 이유는 바로 청주교대 때문이다. 춘천교대를 다니는 나로서는 다른 교대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도 많이 있었고 무엇보다 같은 교대인 하면 잘 재워 주고 먹여줄 것 같아서 이다.

 

  전국일주는 이제 3일째였지만 엄청나게 오래 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여행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얻는 것이다. 자전거로 여행을 하게 되면 크게 두 가지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좁은 자전거 시트로 인해 엉덩이뼈가 아픈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하루종일 매어야 하는 배낭 때문에 오는 어깨의 고통은 것이다. 엉덩이뼈의 고통은 3일정도 지나면 자연스럽게 나아지지만 어깨뼈는 가면 갈수록 버거워진다.

 

  전국일주에 대한 부담감으로 여행 준비를 할 때 이것저것 많이 넣었던 것이 화근이다.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 무게만 차지했던 것들로 인해 어깨뼈는 부어오를 지경이었다. 엉덩이뼈와 달리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이 심해졌다.

 

  결국 오전 내내 고생하고 소형도시 괴산에 도착하자 중대한 결심을 해야만 했다. 바로 최소한의 짐만 남겨놓고 다 돌려보내는 것이다. 부르스타, 라디오, 테이프 등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싸그리 춘천의 자취집으로 보냈다. 덕분에 우체국에서 소포를 보내는 법을 배웠지만 거금 7200원을 날렸다.

 

  짐은 12㎏에서 6㎏으로 줄었다. 이제 비교적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카세트가 없어서 음악 없이 길을 가야 한다는게 아쉬웠고 이제 밥을 얻어 먹거나 사 먹어야 했다. 괴산에서는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목적지인 청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렸을까.. 저녁때가 되자 청원군이 보였고, 거기서부터 차들이 무척 많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청주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지나가는 차들이 무척 많은 편이다. 물론 이 때 자전거를 더욱 조심해서 몰아야 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청주는 충청북도 도청 소재지답게 무척 컸다. 우리에게 교육의 도시라고 불리는 청주는 나에게는 깨끗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청주교대는 남쪽 변두리에 있기 때문에 청주 도심을 관통해야 한다. 덕분에 청주 시내 중심을 구경할 수 있었다.

 

  청주교대에 도착하고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춘천에만 있었던 난 타 교대에는 처음 가보는 순간이다. 역시 어느 지방에서나 교대는 다 똑같다. 공부하는 분위기에 수수한 옷차림, 청주는 춘천보다 더 한 것 같다. 청주교대는 당시 총학이 존재하지 않아서 교편으로 갔다. 어떠한 교대를 가던지 총학이나 교편을 제일 먼저 들렸다. 물론 학교 다닐 때 그 쪽 사람들이랑 친했던 이유도 있지만 아무리 방학중이라도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금방 친해질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편에서는 편집장인 95학번 누나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학교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호프집에서 같이 술을 마시게 되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청주교대의 사정을 엿볼수 있었는데, 우리학교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 보였다.

 

  먼저 큰 차이는 신입생 340명중에서 남학생이 19명밖에 없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거의 여대 수준이나 다름없었고 학교에 활기가 없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교대와 달리 학부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1학년 때는 학부로 같이 공부하다가 2학년 때부터는 과를 선택하는 제도 이다. 자기 적성을 찾고 선택한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기는 하자먼 폐단도 많이 있었다.

 

  첫째가 동기들 간에 단합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학년이 되면 각자의 과를 찾아 헤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4년 동안 같이 지낼 동기랑은 다른 느낌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과대를 해봐서 알지만 단합이 안 되면 행사를 하는데 큰 차질이 생기고 학교 분위기 전체가 그렇다면 결코 신입생들의 활기찬 대학 생활에 제한이 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선배들이랑 친해지기도 힘들다. 비록 과별로 반을 맡고 있어서 선배들이 신경을 써주기도 하지만 다른 둥지에 갈 후배들에게 애정을 주기란 힘들 것이다. 때문에 신입생들의 일부는 그런 것을 동아리에서 찾기도 하지만 남자가 별로 없는 학교라 동아리도 활성화 되있지 않다고 한다.

 

  교대에서 치루는 큰 행사를 꼽으라면 단연 어린이날 큰 잔치이다. 이때는 주위의 어린이들을 학교에 다 불러 모아 대학들이 준비한 아기 자기한 재미들을 마끽하는 행사이고, 우리 학교는 500여명 정도 학교를 찾지만 호응이 좋은 광주교대는 1만명까지 몰린다고 한다. 모든 교대가 다 하고 있는 행사를 청주교대에서는 치우지 못했다고 신문에 날 정도였다.

  

  그게 궁굼해서 편집장 누나한테 물어 보았다. 그 이유는 총학이 서질 못해서 그랬다. 후보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고, 학생들의 대변인이 없는 상태에서 학교의 방침에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폐단이 청주교대에 많은게 사실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우연히 알게된 청주교대 학우 집에서 자게 되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이다. 그 사람도 술 마시고 잘 데가 없어서 그 방으로 온 것이었다. 통성명을 하고 나니까 그 사람은 어떻게 춘천에서 여기까지 왔냐고 한다. 알고 보니 작년 미술과 학회장이었고, 우리 작년 학회장인 남순이 누나와 연락이 되다가 끊겼다고 하면서 춘천으로 돌아가면 자기 연락처를 꼭 전해 달라고 했다. 참 재미있는 우연 이었다. 실제로 돌아와서 4학년인 남순이 누나에게 연락처를 전해 주었고 그 후로 쭉 연락한다고 한다.

 

 

네째날(97. 8. 12)

 

 청주교대에서 아침을 얻어먹고 공주쪽으로 갔다. 출발 할때는 어제 친해졌던 편집장 누나가 바래다 주었는데 철면피인 나도 문뜩 갑자기 찾아와서 얻어 먹은게 미안해 졌다. 그래서 누나한테 신세져서 정말 미안하다고 하니까 춘천에 꼭 찾아 갈테니 그때 대접이나 잘 해 달라고 자상하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애인이 없으므로 나중에 서로 괜찮은 사람을 소개 시켜 주기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참고로 이번 여행에 각 교대를 돌아다니면서 이런 약속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그 누나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건 장성에서 모든 연락처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97년 당시 공주교대 정문

 청주는 교통의 요지이다. 근처에 고속도로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혼잡했는데 차들이 많이 달리고 빠른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다.

 

 일단 옆에 고속도로를 끼고 대전 쪽으로 한없이 달렸다. 가다가 재미있는 것은 주유소 이다. 각 주유소마다 가격표가 있는데 가장 싼 기름값을 재보면서 가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주유소는 차가 많이 달려서 그런지 꽤 있었다.

 

 대전의 관문인 신탄진에 도착했다. 거기서 대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공주쪽으로 꺽었다. 근처에 남이 톨게이트가 있기 때문에 가는 길에 차들이 많았다. 날씨는 엄청 더워서 더위로 고생을 많이 해야 했다. 계룡산을 잠깐 비켜서 공주쪽으로 달려갔다. 강변을 따라 가니 조그맣게 멀리서 공주시내 끝자락이 아담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공주시내를 쭉 가로질러서 가다 보니 낡은 건물의 교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방학중이라 그런지 총학, 교편에도 아무도 없었다. 할수 없이 극회사람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아쉽지만 저녁때 논산쪽으로 떠났다. 공주교대와는 이렇게 인연이 없었지만 훗날 찾아가서 거기 누나들이랑 더 친해졌다. 이유는 난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소문을 통해서 이렇게 허탕치고 간 사실을 듣고 미안해 했기 때문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슬슬 잠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계속해서 논산쪽으로 가다가 소사초등학교에 신세를 지려고 했지만 관사 아저씨의 거부로 거절당하고 다시 논산으로 달려갔다. 한참 달리고 있을 때 잠시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 이러한 밤길을 유유히 달려가는 나와 자전거.. 밤중을 헤메기는 했지만 충주에서처럼 당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낭만적이고 즐거웠다. 이곳 지형은 완전히 평지이다. 5㎞ 이상 되는 집들의 불빛이 보이는 아무도 안지나 가는 국도를 달리고 하늘의 별을 벗삼으면서 논산에 도착했다. 결국 논산 시내에 있는 동성초등학교에 신세를 지게 된다.

 

 

닷새째(97. 8. 13)

 

 동성초등학교의 관사 아저씨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관사 아저씨들과의 대화는 주로 인생이야기 이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새벽부터 출발하게 된다. 관사 아저씨가 아쉬운 마음으로 환송까지 해줬다. 이 아저씨는 6개월 뒤 어린이들을 데리고 국토순례를 할 때 다시 찾아가게 된다.

 

 이 날은 아마 자전거 여행 중에서 가장 멀리 간 날일 것이다. 전날부터 난 일부러 지방도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를 따라 가는 국도가 목적지 까지 가는데 제일 빠른 길이기는 했지만 차가 별로 지나가지 않는 지방도가 오히려 시골의 낭만을 즐기는 부수입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탄압에도 학생운동의 자부심을 지켜가는 전주교대 총학생회..

 

 논산에서 2시간 정도 가다가 햇빛이 따갑게 비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잠시 그늘에서 쉬게 되었다. 그런데 등에 묵직한 배낭을 메고 자전거로 여행하는 2사람을 만났다. 반가워서 얼른 짐 싸들고 그들을 따라갔다. 가까이서 보니 한명은 여자였다. 그들과는 멈추지 않고 자전거 페달을 밟은채로 이야기를 했는데 춘천에서 왔다고 하니까 매우 놀라는 눈치이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춘천에서 자전거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의 경외하는 눈빛이 더욱 짙어 지는 것이 느껴진다. 특히 식당에서 아줌마에게 여행 경험담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황송할 정도로 밥의 양을 많이 준다. 이것이 아마 자전거 여행의 또 다른 재미임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시골 인정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기도 했다.

 

 2인조 자전거 여행자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거의 소풍가는 수준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서로 목적지가 달라서 얼마 안가 헤어졌다.

 

 전주에 도착한 다음 곧바로 전주교대로 향했다. 시내의 변두리에 있는 전주교대는 활기차 보였다, 아마 개강이 가까이 다가와서 그랬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교편실에 가서 사람들을 보기로 했지만 아무도 없어서 그냥 기다리기만 했다.

 

 교편실에 가서는 주로 춘천교대 편집의원인척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교대의 공통점이기도 한데 춘천에서 왔다고 하면 무척 반가워한다. 이상하게 이곳 남도 지방 사람은 춘천이 멀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덕을 본적도 의외로 많이 있다.

 

 하지만 내가 전주교대를 갔을 때의 시점은 별로 좋지가 않았다 그것은 전국교대에서 전주교대만이 유일하게 한총련을 탈퇴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는 김영삼 정권 말기로서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이 무척이나 심했던 시기이다. 그래서 총학생회 간부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학교에 나오지를 못했다, 썰렁한 총학생회실에서 나오려고 할 때 그 곳 사회과 학회장이랑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임시 학생회장 대행을 맡게 되었는데 모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전주교대는 청주와는 달리 학생회의 권한이 막강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총련을 많은 탄압을 감수하면서까지 탈퇴하지 않는 이유가 무척 궁굼했다. 나랑 이야기 했던 그 형의 대답은 어쩌면 학생운동에 관한 심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대답은 한총련을 탈퇴하는 것은 여태까지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한 학생운동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뜻하며 탈퇴는 할 수도 있지만 그 시점에서 최소한의 학우들의 의견을 묻고자 개강 후 한총련 탈퇴 여부는 투표로 묻기 위해서 탈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전북총련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북총련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지지도가 높은 편이다. 왜냐하면 3년 동안 시위를 한번도 하지 않았고 대신 사회 봉사활동으로서 대체해 왔기 때문에다. 앞으로 학생운동의 좋은 방향을 제시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총학실을 나와서 전주교대 농구 동아리 방으로 가보았다. 아무도 없어서 춘교대 농구 동아리 ACE의 대표인척 하면서 몇자 적어 놓았다. 그것은 그냥 춘교대를 소개하며 언제한번 모여서 농구 시합이나 하자고 했고 연락처를 적어 놓았다. 여행이 끝나고 한달정도 지나서 그쪽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다. 하지만 결국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신경을 써준 전주교대 농구 동아리 사람들이 고마웠다.

 

  이때 뿌려놓은 씨앗 때문일까? 실제로 2년 뒤인 군바리 시절에 전국교대 농구 동아리인들이 전주교대에 모여서 최초로 교대 대항 농구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어수선한 전주교대를 한바퀴 돌아 보았다. 각 지방의 교대를 둘러 보면서 한가지 느낀 것은 제주교대를 제외한 모든 교대가 자신들의 교대가 전국에서 제일 크다는 선입견을 다들 가지고 있다. 나도 춘천에서 우리학교가 가장 크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우리학교 사람이 있다면 꿈 깨시길.. 최소한 전주교대가 더 크다. 거기에는 전국 교대에서 유일한 엘리베이터가 달린 건물도 있다.

 

 어수선한 전주교대를 나와서 정읍쪽으로 향했다. 가는길에 전주 시립 박물관을 관람하고 기사 식당에서 순두부를 먹었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건데 싸고 맛있는 식당을 찾고 싶으면 바로 기사식당을 권한다. 택시 기사들을 단골로 두어서 그런지 비교적 저렴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나오니까 날은 이미 어두워 졌다.

 

  1번 국도를 타고 정읍으로 가는데 바로 옆에 고속도로가 있어서 그런지 별로 어둡지 않아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힘들지는 않았다. 언덕을 몇 차례 넘고 으스스한 공동묘지를 지나오자 정읍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 있었다. 그리고 정읍시내를 헤메고 다니면서 모든 초등학교를 가봤지만 공교롭게도 모두 관사가 없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이 시간에 아무집이나 찾아가서 재워 달라기도 그렇구.. 기차역에도 가봤지만 거기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냥 강둑을 지나가고 있는데 커다란 다리 밑에 노인들 장기 두는 쉼터가 보였다.

 

  침낭 깔고 자기에는 참으로 안성맞춤인 곳이다. 얼른 내려가서 자전거를 세워두고 침낭을 깔고 자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툭툭 치는 것이다. 3사람이었는데 행세로 보아서 거지인 것 같았다. 자기들 자리인데 왜 차지 하냐면서 따지길래 처음에는 기가 막혔지만 좋은 경험이다 싶어 내가 술 한잔이나 하면서 이야기나 하자고 했다.

 

  그 사람들도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얼른 슈퍼로 가서 소주 3병이랑 안성탕면 한봉지를 사고 뛰어갔다. 어떻게 보면 여행을 하면서 내가 한턱을 낸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들과의 경험은 어떤 값비싼 돈을 주고도 얻기 힘든 경험이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첫잔을 했다. 모든 이들의 공통점일까? 이들도 자신들도 옛날에는 잘나가는 사람이었고 여자들도 많이 꼬시고 다녔다고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술의 마법 같은 힘이었을까? 딱 3잔만 들어가니까 술자리는 신세 한탄장으로 변했다. 현실에 대한 불신 그리고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절망감을 볼 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이가 있었다. 나이는 갓 30살 정도 되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갑자기 내 두 손을 꽉 잡더니 나중에 선생님이 되면 공부 못한다고 애들을 때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그러한 편견으로 모든 것을 떨치고 뛰쳐나갔고 그러한 일탈이 결국 불행이라는 결과를 가저 온 것이었다. 내가 여행하면서 특히 감명 깊게 들은 말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편견과 편애 그리고 무책임한 교육의 결과를 이 사람에게서부터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사로서의 책임감을 이때 처음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한번 물어보았다. 폐인으로 살아오고 방탕하게 살던 그 사람의 소원은 보일러공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보일러공이 되어서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 공짜로 설치해 주고 싶다는 소박한 꿈도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한번 설득해 보았다. 아직 젊은 나이라고.. 또한 그 나이에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깝지 않나구..

 

  그렇게 말하자 나를 뚫어지게 보면서 의외라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평생에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준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의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꿨으면 좋겠지만 지금 와서는 확인해볼 길이 없다.

 술의 힘이었을까? 야외지만 무척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엿새째(97. 8. 14)

 

 눈을 뜨자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마 할 일 없는 늙은이들이 시간을 떼우려고 모인 것 같았다. 그들은 내가 거지인줄 알고 처음에는 미친놈 취급하다가 자전거 여행 중이고 교대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하니까 다들 젊은 놈이 장하다고 칭찬들이다. 또는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어르신도 있었다.

 

 그 중에 관리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더니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해서 가서 배불리 먹었다. 그 할아버지는 장하다면서 돈이라도 쥐어 주고 싶지만 형편이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서 미안해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가 정말이지 고마웠고 앞으로 여행하는데 무척 힘이 되었다.

 

 아침 9시경 광주를 향해 출발했다. 여행은 너무나 순조로웠다. 일부러 자동차가 별로 안 다니는 길을 선택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말로 자전거 여행하는 맛이 낫다. 광주 바로 위에 잇는 장성군에 들어서자 장성호라는 큰 호수를 지나게 되었다. 생태계 파괴의 주범인 황소 개구리를 봤는데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점심때가 되자 시원한 다리밑에서 잠시 쉬었는데 거기에는 막바지 여름을 즐기는 행락객들도 꽤 많이 있었다. 특히 인천의 한 교회에서 단체로 온 아이들이 귀엽게 느껴 졌다.

 

  12시쯤에 다시 출발 했는데 햇빛이 너무나 강렬하고 졸음도 몰려와서 그냥 길 바닥에 잤다. 2시쯤 일어나서 20㎞떨어진 장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방을 뒤져보니 수첩이 보이지 않았다. 전날에 술 마시면서 잃어 버린 모양이다. 이때부터 나랑 연락이 되는 사람은 극히 일부로 한정된다.

 

 장성 시내에서 출출한 배를 채우러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키고 맛있게 먹었다. 다 먹고나서 지불 할려고 하니까 이게 왠 일인가? 지갑이 없는 것이다. 아마 아까 길에서 자고 있을 때 바닥에 지갑을 흘린 모양이다. 무척이나 당황되서 식당 아줌마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이해를 구했다. 아줌마는 학생이니까 음식값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부터이다. 지갑에 있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직불 카드가 없다는 것이 큰 타격 이었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전라도에서 돈 한푼 없이 놓이게 된 것이었다. 별 생각을 다했다. 당시에는 두가지 선택을 해야 했는데 하나는 온 길로 다시 춘천으로 가는 것이고 하나는 장성에서 친척들이 모여 있는 부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중국집 밖으로 나오니까 세상이 달라 보였다. 그처럼 막연한 기분인적이 드믈기는 했지만 어쩌면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고민하고 있을 때 중국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2만원을 거리낌 없이 주시면서 나를 보니 지금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아들 생각이 나서 주시는 거라고 하셨다. 정말 여행하면서 제일 감격적인 순간중에 하나이다. 얼굴한번 보지 않았으면서 그토록 날 생각할 줄이야.. 식당 아줌마면 받는 일당도 적을텐데.. 거절을 해도 아줌마는 한사코 돈을 나한테 쥐어 주셨다.

 

 일단 자전거는 중국집에 맡기도 일단 여행은 중지해야 했다. 아줌마에게 표현할수 있는 한 최대한 감사를 표시하고 광주행 버스를 탔다.

 

 광주에서는 정말 운이 좋았다. 1분 차이로 춘천으로 가는 막차를 탄 것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서 자저거로 온 거리를 불과 6시간 만에 버스로 가니 허무하기도 했다. 자취집에 도착해서 목욕을 하고 오랜만에 정비도 했다.

 

 

 

칠일째(97. 8. 15)

 

 아침에 일어나니 전날까지 여행을 했던게 꿈만 같았다. 오랜만에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에서 교회일을 하시는 분이 내 지갑을 주웠다는 것이다.

 

 그 순간 어제 장성호에세 쉴 때 인천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던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전율이 온몸을 강타했다. 이렇게 하늘이 도와 주다니!! 아는 사람한테 만원을 빌리고 나서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은 태어나서 한번도 안 가봤는데 이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인천에 도착해서 곧장 그분의 교회로 달려갔다. 내용물은 물론 그대로 다 있었다.

 

 감사의 표시를 하고나서 곧바로 서울역으로 달려가 장성행 열차를 탔다. 입석이라서 괴롭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여행으로 입석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장성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조금 넘었다. 곧바로 중국집에 달려가니 문이 반쯤 닫혀 있었다.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자 어제 보았던 주인 아줌마가 나오셨다. 아줌마는 내가 하루만에 돌아오자 놀라신 모양이다. 영업 시간이 끝난후에 와서 어제 돈을 주셨던 아줌마를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자전거는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벌고 먹고사는 아줌마라고 생각하니 어제 주신 2만원을 주인 아줌마에게 전해달라고 맡겼다.

 

 어제 지연된 거리를 채우기 위해서 밤 새도록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장성을 벗어나자 곧바로 광주이다. 광주라는 도시는 생각보다 크다. 변두리를 통과 하는데만도 1시간이 걸렸다. 목포는 1번 국도로 곧바로 가면 된다는 정보를 얻고 하염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목포까지는 70㎞ 정도 걸린다고 했다. 밤하늘의 별이 정말 창창했다.

 

 

 

팔일째(97. 8. 16)

 

 이 날은 자전거로 달리면서 시작했다. 광주에서 목포로 가는 길은 포도원이 많이 잇었다. 아마 이 고장 특산물인 것 같았다. 힘들게 자전거를 끌고 가니 나주가 나타났다. 광주에서 20㎞를 온 것 이었다. 졸음이 오고 있는걸 느껴서 잘 곳을 찾았다. 먼저 기차역으로 가봤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한동안 나주 시내를 방황하니 빈집이 하나 보였다. 거기에 들어가서 눈을 붙이니 모기들이 극성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괴로운 점중에 하나가 바로 모기들이다. 침낭안에 들어가서 자도 모기들이 틈새로 들어와 물어 뜯곤한다. 그 때문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잠잠하게 다시 생각해본 후 그냥 출발하기로 했다.

 

 목포를 향해서 가고 향하는 도중 목포가 40㎞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았다. 반 정도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주유소에서 송아지만한 개가 달려왔다. 아마 줄을 묶어 놓지 않을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래도 그 미친개는 침을 흘리면서 계속 쫏아왔다. 얼마나 갔을까? 뒤를 보니 아무것도 없엇따. 생각해보니 정말 신기 했다.

 목포 해양박물관에서..

 

 오르막길을 이렇게 빨리 올라 오다니! 역시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사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순간이다. 그리고 다음에 이길을 지나 갈 때 그 미친개한테 복수 할거라는 생각도 잊지 않았다.

 

 목포쪽으로 한없이 달려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크게 지치지 않았다. 아마 아까의 사건이 자극제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날은 서서히 밝아 오고 이미 나주시를 지나 무안군으로 가고 있었다. 아침 8시가 되자 목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새 70㎞를 달려온 것이다. 목포시에 들어서자 곧바로 식당으로 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밤새 달려와서 그런지 배고픔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까스를 시켜먹고 쉬엄쉬엄 여객선 터미널로 갔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제주도를 향하는 배가 출발하고 있었다. 제주도를 가는 9시 배였던 것이다. 정말 간만의 차였던 것이다. 아쉬웠지만 제주도로 가는 배가 하루에 2편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다음배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매표소로 간 나는 경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토요일이라서 제주행 여객선은 아까 떠난 한편밖에 없다는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하루 기다릴 수 박에 없었다.

 

 일단 가까운 목욕탕으로 가서 목욕 한판 땡겼다. 더위가 절정인 8월의 여름이고 자전거로 밤새 달려 왔기 때문에 땀이 장난이 아니게 나왔다. 목욕을 하고나서 목포시 관광을 하였다. 도시는 작은데 그런대로 관광객이 오게 꾸며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목포에서 제일 큰산은 400m가 조금 넘지만 광광지로 잘 꾸며놨다. 아마 기울어져가는 목포시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옛날 전성기때의 목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해양 박물관이다. 여기에는 해양 자료를 비롯하여 신안 해저 보물의 유물들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해양박물관에서 나와서 바로옆의 민속 박물관에 갈려고 하니까 시간이 지나서 못 들어 갔다.

 

 대신 목포 가요제를 관람 할 수 있었다. 목포 가요제는 매주 토요일 마다 하는데 마침 날자를 잘 맞춘 것이다. 비록 지역 행사에 불과 하지만 수준은 꽤 높았다. 가요제를 다 보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목포 해변을 돌아 다녔는데 솔직히 볼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많았다. 웬만큼 돌아다니고 와서 여객선 터미널에서 하루밤 잤다. 터미널에서는 나 같이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기의 극성에 시달리면서 잠을 청했다.

 

목포해양박물관에 전시된 한국식 옛 범선

 황해바다의 잠든 뱃사람을 그리워하며 제를 올리는 가족들

 

 

 구일째(97. 8. 17)

 

 어제 일찍 자는 바람에 할일 없이 일찍 얼어났다. 모기가 극성을 부렸지만 침낭을 덥고 자는 덕분에 옆에 여행자들보다는 많이 물리지는 않았다. 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모기에게 많이 시달린 모양이다. 역시 침낭하나만 있으면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놓쳤던 9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제주도를 간다는 생각에 설레이기 시작했다. 요금은 1만 3천원 정도하고 자전거를 실어서 3천원을 더 내야 했다. 배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건물 3층만한 배가 움직이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배밑을 내려다 보니 바닷물 색깔이 똥색이다. 역시 해양 오염이 심각하다는 것을 한눈에 느낄 수가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형배를 타보는 나..

배가 처음에 움직일때는 재미있더니 2시간 jd도 지나자 지켜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풍이 북상한다는 소식과 함게! 배를 처음 타보지만 장난아니게 흔들린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흔들릴때마다 사람들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기 시작했다.

 

  아마 기상 악화에도 출항을 감행한 모양이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경험이어서 일부러 배꼭대기에 올라가서 구경을 했다. 그리고 배가 뒤집히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쓰레기통 하나를 찜해 두었다.(쓰레기통 바로 옆에 있었음)

 

 결과적으로 그 배가 마지막 배였다. 그 이후로 태풍 때문에 5일정도를 배가 출항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행운이 겹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주항에 내리고 나자 제일 먼저 커다란 언덕이 보였다. 거기에 길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바로 올라가니 제주시가 보였다. 일단 은행을 찾아가서 돈을 찾은 뒤 제일 가까운 자연사 박물관으로 바로 갔다. 박물관의 규모는 정말 컸고 볼 것도 많았다. 그리고 곧바로 제주교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제주교대는 우리학교처럼 변두리에 있었는데 내가 들른 교대들은 거의 대부분 변두리에 있었다. 제주교대에 들러서 교편실을 찾았다. 거기에는 제주대학교 교지 편집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제주교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의아해 할 때 오늘이 취선대가 끝나는날이라서 모두들 뒷풀이를 준비중이라고 한다. 취선대가 뭔지 물어보니, 내가 갔던 통선대와 비슷하고 제주에 있는 대학 교지 사람들이 모여서 제주도를 한바퀴 돌면서 행진하는건데 올해는 그게 자원 봉사로 바뀐 것이다.

 

 얼마전 제주도에는 수해가 크게 났는데 피해가 크다고 했다. 그래서 행진 대신에 수해 복구 봉사로 전환 한 것이다. 전주에서 이론으로 들었던 학생운동을 제주도에서 직접 본 것이다. 주민들의 호응은 좋았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을 보니 제주일보에도 나왔다.

 

 뒷풀이가 시작되서 난 택시를 타고 행사장으로 갔다. 탑동이라는 곳인데 여기는 약간 신기한 장소이다. 경찰들이 다른곳에서는 시위 진압을 해도 이곳에서 하는 시위는 방치 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바로 앞에 둑이 있어서 가끔 파도가 넘치기도 해서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장소를 설명하는 누나가 제주도의 자랑거리라고 설명할 때 고개를 끄덕였다. 탑동에서 제주교대 사람들을 만났다. 난 제주교대 사람들이랑 합류해서 같이 행사에 참가했다. 자격도 없는데 끼워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문뜩 내가 유일하게 있는 육지 사람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마치 내가 육지 대표 같았다. 그리고 어제 아깝게 배를 놓친게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도...

 

 이곳의 행사는 참으로 아기자기 하다. 육지에서는 살벌하게 들려질 율동과 구호들이 여기서는 어린애들이 하는 것처럼 재미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행사가 다 끝나자 모두 호프집에 가서 한잔 했다. 난 호프집에서 제총협 의장을 비롯한 거물급이랑 인사를 하는 기회를 가졌다.

 

  참.. 여행을 와서 별 경험을 다하는군! 제주교대 교지 편집장은 한상희라는 귀엽게 생긴 누나이다. 그 누나는 정말로 나에게 잘해주었다. 그러나 역시 아직 애인은 없는 모양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춘천교대 사람은 내가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봄에 이미 총학의 우현이 형이 졸업여행을 하면서 들른 모양이다.

 

 내가 궁굼한 것중에 하나가 통선대에 잇을때 제주도에서 한명도 참가 안한 것이 궁굼했다. 그걸 상희 누나는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제주도에서 배나 비행기를 이용하면 주민등록 번호를 기제하는게 의무화 되어 있기 때문에 금방 신분이 들통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제주도 안에서 자기 주장을 펼치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여기 교편에는 남자애가 한명 밖에 없다. 바로 97학번인데 경찬이라는 애다. 경찬이랑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경찬이도 나처럼 학교에서 가장 알려진 애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주교대는 3과가 한 학급을 이루어 수업을 같이 듣는다. 왜냐하면 한학년 정원이 120명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찬이네 자취방은 해안가에 있었다. 초가 지붕에 돌이 언쳐져 있었는데 그런집에서 자다니.. 색다른 경험이었다.

 

 

 십일째(97. 8. 18)

 

 이날은 제주교대가 개강하는 날이다. 우리학교보다 일주일 일찍하는 모양이다. 일단 경찬이는 수업에 들어가고 난 교편실에 남았다. 거기서 총학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상희 누나는 어제 과음을 해서 못 나오는 모양이다.

 

  교지 사람들에게 상희 누나에 에게서 들으니 정말 대단한 누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년 교편은 편집장이 중간에 그만 두어서 교지를 못낼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상희 누나가 팔을 걷어 붙이고 만든게 그때 교지이다. 거의 혼자서 만들었는데 그 당시 교지를 보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두꺼운걸 거의 혼자 만들다니... 어떻게 그 조그만 체격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 상희누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상희누나가 나오지 않자 그냥 경찬이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물론 밥값은 경찬이가 냈다. 여기는 밥값이 1800원이다. 1300원인 우리 학교와 비교하면 터무니 없이 비쌌고 자율 배식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근처에 식당이 전무하다시피해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고 한다.

 이 곳 학교는 작은편이다. 그러나 주위의 경치만큼은 좋다. 기념사진 한방 찍은 다음에 성산을 향해 출발했다.

 

  제주도에 가면 유난히 자전거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배타고 와서 제주도에서 자전거를 대여한 다음에 일주도로로 여행을 한다고 한다. 제주도는 크게 네 등분을 할 수 있다. 제주, 성산, 서귀포, 고산이다. 이런 코스로 제주도를 한바퀴 다 도는데 4일이 걸린다고 한다.

 

제주시에서 성산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절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본 바다

 

 날씨는 좋았다. 그런데 태풍이 중국쪽에서 올라오고 있어서 걱정이 되었다. 일단 지도에 나와 있는대로 민속 박물관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박물관 치고는 너무 허름했다. 그리고 관람객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냥 갈까 생각하다가 들어가니 웬 할아버지가 천원을 내라고 하는 것이다. 어쩔수 없이 수없이 돈을 내고 구경을 하니 이건 볼 것도 없었다.

 

 민속 유물이라는 것들도 그렇게 귀중한 것이 보이지 않아싿. 괜히 들어 왔다는 생각과 함께 천원의 아까움을 한탄하고 있을때 아까 그 할아버지가 나를 붙잡더니 책을 사라고 조른다. 조그마한 책인데 무려 3000원씩이나 하는 것이다.  

 

 

 학과 공부에 필요없어서 안사려고 하니 무슨 이상한 논리로 사라고 한다. 어쩔수 없이 귀찮아서 한권을 샀다. 박물관을 나와서 생각해보니 엄청난 손해를 본 것이다. 어제 자연사 박물관에 비해서 하나도 볼 것도 없는데 쓸데없이 4000원을 낭비한 셈이다. 이런데서 이런 재수없는 일이 생기다니! 책의 내용도 아까 그 할아범의 인생 자랑이나 하는 것이다.

 

 어쨌든 잊어버리고 다시 출발 했다. 일주도로는 해안을 따라 이어져 잇어서 그런지 바닷 바람이 상쾌하게 불었다. 금녕해수욕장에서 잠시 쉰 다음에 성산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역시 40㎞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짬밥을 이용해서 성산에 도착했다. 밤 11시에 도착해서 성산 일출봉 주위를 맴돌았다. 비가 오기 시작해서 할 수 없이 민박을 이용했다.

 

  제주도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민박이 15000원으로 정해져 있어서 비교적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민박 아줌마끼리 경쟁을 붙여 13000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내 여행중에 제주도에서만은 돈주고 숙박을 했는데 그 이유는 제주도의 가정환경을 보고 싶어서이다. 목욕을 하고 편하게 잠을 잤다

 

 

십일일째(97. 8. 19) 

 

 새벽에 일어나 성산일출봉을 올라갔다. 역시 예상대로 여기는 입장료를 받는다. 힘겹게 다 올라가서 일출을 기다리니 이게 웬일인가? 해는 전혀 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역시 날씨가 흐려서 그런 것 같다. 열 받지만 내려 올 수밖에..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본 성산의 해변은 정말 장관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서귀포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제와 달리 한라산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좀 힘들지만 제주도의 목장들을 보고 싶어서이다. 큰 오르막일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가파르지는 않았다. 지리시간에 배웠던 오름들을 직접 볼 수 있었고,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방목된 말들을 실컷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성읍 민속촌으로 갔다. 이곳은 의외로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음식점들은 전부 전통적인 가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마 입장료 대신 음식들을 비싸게 판다는 것을 난 간파했다 대신 이곳의 기념품들은 정말로 저렴했다. 열쇠고리 하나에 200원 밖에 안했다. 동기들에게 나눠줄려고 30개정도 샀다. 당연히 난 3000원짜리 비싼 열쇠고리 하나를 샀다.

 자.. 이제 외국에서도 유명한 제주 민속촌을 향해 출발!!

 

 

 제주 민속촌에서 어색하게 방아를 돌리는 모습

제주 민속촌을 해안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갈 수 있었다. 그래서 흐믓한 마음으로 들어가니 입장료를 4000원씩이나 받는 것이다. 열받지만 울며겨자 먹기식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대신 여기서 엄청나게 사진을 찍어댔다. 옛날 제주도 민가를 잘 꾸며놓아 볼거리는 많이 있었다. 그러니 입장료 생각에 열받기만 했다. 아마 다시는 여기 안 올 것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몸보신을 할겸 여기서 돼지 갈비를 사먹었다.

 

 이 날은 날씨가 매우 좋았다. 그런데 육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태풍은 주국에서 이동중인데 다행히 제주도는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친구들한테 전화해보니 춘천은 비가 장난 아니게 많이 오는 모양이다. 3일째 폭우가 쏟아진다는데 여기는 비 한 방울 내리고 있지 않았다. 난 여기서 정말 운이 좋았음을 느꼈다.

 태풍의 영향으로 파도가 엄청 높게 친다. 정말 장관이었다. 한 5~6m 정도 되는것 같은데 이런 파도에 휩쓸리면 살아남지도 못하겠지만 난 낚시꾼 아저씨의 경고를 받을때까지 가까이서 보았다. 맑은 날씨에 이런 파도를 보니 흡족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내가 제주도에 올 때 탄 배를 마지막으로 3일동안 결항이 되었다. 서귀포에 도착해서 유명한 폭포들을 봤다. 모두 3개를 보았는데 좀 열 받게 1100원에서 1400원의 입장료를 받는 것이다. 난 정말 제주도의 상술에 혀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천지연 폭포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천연 기념물이 있어서 볼만했다. 중문 관광단지를 거쳐 거침없이 달렸다. 이쪽 지역의 도로는 4차선인데 자전거 지나가기에 좋은 도로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제주도에는 차가 많이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었는데 난 제주도에서 차가 막힌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이곳은 아까 말한대로 자전거로 여행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과 마주칠때면 서로 인사하면서 지나 치는것도 하나의 매력이다. 그렇지만 내가 만난이들 중에서 나보다 멀리온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역시 잘 곳이 없었다. 그래서 수월봉이라는 곳에서 1박을 했다. 여기서 어떤 해녀 할머니가 갈데가 없으면 자고 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전체가 민박집이었다. 그래서 예의상 할머니에게 1만원 드렸다.

  

  서귀포에 위치한 정방폭포 모습.

 여기서 제주도 사투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얼마나 의사소통이 안되면 할머니가 나에게 필기도구를 주시더니 글로 의사소통을 하자고 했을까? 그 할머니가 이웃집 할머니와 대화를 할때는 거짓말 안하고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이상한건 할머니가 TV코메디 프로를 보시면서 웃으시는 것이었다. 약간 의아해하긴 했지만 신경 안 쓰기로 했다.(어짜피 어떻게 알아듣냐고 물어봤자 말이 안통할 테니...)

 

 할머니께서는 푸짐하게 밥도 주시고 잠자리도 편하게 마련해 주셨다. 밖에 나가서 슈퍼에 가니 거기 아저씨가 내가 춘천에서 자전거를 끌고 왔다고 하길래 존경의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특히 성산에서 왔다는 말에 다른 사람들은 2일 걸려서 오는 거리를 하룻만에 왔다며 놀라워 하셨다.

 

 밖에 나가니 파도가 높게 치고 있었다. 아마 이런 기회는 드물것이다. 파도가 치는 가운데 난 나의 학교생활, 인생, 연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한 3시간쯤 명사엥 잠긴후에 들어가서 달콤하게 잠을 잤다

 

 

십이일째(97. 8. 20)

 

 아침에 일어나니 이미 할머니가 안 계셨다. 아마 아침 일찍부터 해녀일을 하러 가신 모양이다. 조용히 방청소를 하고 자전거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오전이 지나고 오후가 될 무렵 애월에서 다시 산길을 가기 시작했다. 항몽유적지를 보고 싶어서이다. 해안 도로보다는 힘들었지만 몽고에 저항했던 삼별초의 유적을 보고 싶어서 갔다.

 

 가는 도주엥 너무나 더워서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쪽길에는 정말로 매미가 많았다. 한 나무마다 매미가 수십 마리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 바닥에는 죽은 매미들이 쌓여 있었다. 매미를 잡는게 취미인 사람은 이 곳에 오면 1시간안에 수백마리 잡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자전거로 유유히 가고 있는데 웬 미친 매미 한 마리가 나에게 육탄돌격을 하는 것이다. 머리에 맞았는데 자전거까지 휘청거렸다. 주먹으로 한마 맞은 느낌이었다. 참 여행하다 별 재수없는 일도 나타난다니까...

한림공원에 안에 있는 거대한 하루방

  항몽 유적지에 있는 추모비

 고생해서 올라가서 항몽유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이곳도 입장로를 받지만 익숙해져 있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입장료가 싼게 이상했다. 역시 들어가니 js시실에는 그림과 함께 딸랑 기와 몇 장이 전부였다. 아 정말로 열 받았다. 이걸 보려고 그렇게 고생해서 여기까지 오다니! 그것도 입장료를 내면서...

 

 도청이 있는 신제주를 거쳐서 제주항 방면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바위가 용모양인 용두암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주항에 도착하자 부산으로 떠나는 배가 6시와 7시반 배가 있었다. 7시반 배를 택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만장굴을 관람하기 위해서이다. 만장굴은 곧 보존을 위해서 수장시키는 것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시외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만장굴로 향했다. 만장굴 입구에서 내렸는데 40분정도 걸어 가야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냥 택시를 탔다. 만장굴은 정말 길엇다. 다 구경하고나서 다시 택시를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시외버스를 타고 제주항으로 향했다. 제주항 근처에서 내린 후 다시 택시를 탈 수 밖에 없었다. 제주항에 도착하자 이미 개표가 진행중이었다.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놓쳤으면 배도 놓치고, 표값 16000원도 놓치고,.. 그러나 만장굴을 관람하는데 든 댓가는 비쌌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후회는 되지 않았다.

 

 부산까지는 11시간 40분이나 걸린다고 한다. 뉴스에서 태풍을 피해 제주항으로 피난간 어선 때문에 부산에서 온 여객선이 항구에 정박하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보도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인데 거기에는 그 배를 탄 승객들의 불평을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탄 배가 뉴스에 나온 그 배였다. 참 별 희얀한 유연도 다 있다. 거기서 친해진 아줌마와 아저씨와 함께 술한잔을 했다. 물론 난 돈 한푼도 안 들었다.

 

 그건 그렇구 배안은 너무 추웠다. 아마 에어콘을 크게 틀어서 그러는 모양인데 여름에 그렇게 추위에 떨기는 처음이다. 너무 추워서 침낭을 덥고 잤다.

 

 제주항 근처에 있는 용두암

 

 

 십삼일째(97. 8. 21)

 

 배안에서 일어나니 내 침낭을 옆의 아줌마가 덥고 자고 있었다. 어제 술을 사주셔서 다시 뺏기도 모호했다. 할 수없이 추위에 떨며 지냈다. 부산항에는 새벽 6시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고 보니까 어제 6시에 출발한 배가 우리보다 늦게 도착해서 우리가 다 내릴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참 신기한게 우리보다 1시간 반이나 일찍 출발했는데 더 늦게 도착하다니 아마 그 배에 탄 사람들은 좀 약올랐을 것이다.

 

 부산항에서 외가 친척이 있는 당리로 향했다. 부산은 분명히 항구도시이다. 그러나 달동네 같이 가파른 산에 이루어진 동네들이 대부분이다. 친척집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산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그 산은 온통 주택들로 개발되어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가파라서 웬만한 고개 하나 넘는 것 보다 힘들었다.

  친척집에 가자 놀라는 눈치로 사촌들이 날 봤다. 하긴 한달전에 왔을때보다 시커멓게 타고 완전 거지꼴로 왔으니까... 이모집에서 편하게 쉰 후 샃ㄴ들을 끌고 태종대를 갔다. 그런데 사촌들을 끌고 온게 화근이었다. 서로 싸우느라 거의 구경도 못했으니! 외삼춘이 몸보신 시켜준다고 뷔폐로 가서 실컷 먹게 했다. 아마 서울에서 엄마가 압력을 넣었나 보다. 아무튼 편하게 그날 하루는 지낼 수 있었다.

 

 

 

십사일째(97. 8. 22)

 

 외가집에서 포식을 하고 점심때 출발을 했다. 외할머니와 외숙모, 이모가 경비에 쓰라며 돈을 주셨다. 그리고 외숙모는 집에서 직접말ㄹ니 오징어 10마리를 주셨다. 정말 고마웠다. 부산을 출발해서 경주방향으로 갔다. 경주는 부산에서 차 타고 1시간 반 거리라고 한다.

 

 양산을 거쳐서 울산을 지나쳤다. 울산은 바로 전날에 광역시로 승격이 되었는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표지판이 울산광역시로 바뀌었다. 정말 발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주에서 8㎞떨어진 지점에서 밤이 깊어가고 몸도 지쳐서 잘데를 찾았다. 가게에 들어가서 물어보니 바로 옆집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 집에는 젊은 아줌마가 살고 있었는데 기꺼이 건너방에서 자게 해주셨다. 정말 고마웠다. 처음보는 사람한테 이렇게 인심을 쓰다니...

 

 내가 있을 방에는 이 집딸이 똥을 싸서 방치되어 있었다. 아줌마가 성급히 치워 주셨다. 그 분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한 5살 정도 되는 것 같다. 그 애하고 잘 놀아주었다. 역시 교대에서 배운것들이 이렇게 써 먹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런데 난감한 문제가 생겼다. 그 애가 나한테 안 떨어지려는 것이다. 주인 아줌마 말로는 나와 자기 삼촌과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난 그애를 떨어뜨리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 애는 울면서 나를 찾았고 난 괴롭지만 할 수 없이 외면해야 했다. 방에는 친절하게 TV가 있어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새벽 5시 드디어 부산 앞바다가 보인다.

  부산 영도에 위치한 태종대에서

 

 

십오일째(97. 8.23)

 

 아침에 일어나 주인 아줌마에게 인사를 드리고 감사의 표시로 오징어 한 마리를 드렸다. 그리고 곧장 경주로 향하기 시작했다. 경주에서 처음으로 날 맞이한건 경애왕릉이었다. 경주는 정말로 관광하기 좋은점이 입장료도 저렴했고, 유적이이 많이 몰려 있어서 관광하기에 좋았다. 여기는 자전거로 경주를 구경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관광하고 있었다.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많은 유물들을 볼 수가 있었는데 입장료는 200원 밖에 안했다. 제주도의 항몽유적지 보다도 절반 이상 싼 가격이다. 정말로 제주도의 상술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경주의 유적들을 거의 다 보았는데 그 중에서 천마총이 인상적이었다. 경주에서 점심을 먹은 후 영천 방향으로 출발했다. 경주에서 문화재를 관람하는 바람에 일정이 늦어진 것이다. 대구에 들려서 대구교대를 가고 싶었지만 개강이 25일인 관계로 서둘러야 했다.

 

 일단 대구 위쪽에 잇는 영천을 향해서 가기 시작했다. 가던 도중에 한 안이가 자전거로 나를 앞지른다. 난 여행중에 가끔 이런 도전을 받게 되는데 무조건 내가 이긴다. 역시 짬밥의 힘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만만치가 않다. 중학생 같은데 떨어지지 않는다. 좀 떨어트려 놓으면 지름길로 다시 앞지를려고 하고 난 다시 속력을 냈다. 이렇게 시합을 하면서 영천시에 도착하고 나서 고민을 해야만 했다.  

세계 최초의 천문관측소인 첨성대

 

 구미방향으로 가서 경부선을 따라 올라 갈 것인가, 아니면 안동 방향으로 갈 것인가? 결국에는 차도 그리 많은편이 아니고 처음 여행 경로와 그리 많이 겹치지 않는 안동방향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안동으로 가는 국도를 타고 쪼르르 올라갈 때 내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갑자기 트럭 한대가 내 앞을 과속으로 달리는 것이다. 바로 앞에는 커브길이 이었는데 커브길을 지나갈 때쯤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럭 2대가 정면으로 부딧친 것이다. 특히 정면에서 오던 양파를 가득 실은 트럭에는 사람이 눈뜨고 찌그러진채 가만히 있었다.

 

 난 자전거를 내던지고 가까이 가 보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그 사람은 죽어 있었다. 사고 순간에 비명을 질렀는지 입을 벌리고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다행히 상대편 운전자는 가벼운 부상만 입은 모양이다. 차는 완전히 찌그러졌고 연기가 나왔다. 그리고 시체 바로 밑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태어나서 직접 시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완전히 공포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찌그러진 모습을..

 

  그런데 이상하게 난 그 순간에는 침착했었다. 그 사고로 도로는 완전히 막혀서 차들이 지나가지 못했다. 일단 밀려잇는 차들에게 가서 어린애들은 절대로 접근 시키지 말라고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우회도로를 알아낸 다음 운전자들에게 그리로 가라고 지시했다. 운전자들은 나한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 보았다.

 

 조금 있으니까 경찰차가 왔다. 경찰에게 도울일이 없냐고 묻고, 없다고 하니까 그 자리를 떠났다. 하긴 나도 5초정도 일찍 그 길을 갔으면 같이 봉변을 당했을 것이다. 아마 내 인생에서 아슬아슬한 순간중에 하나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 끔찍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봉변을 당한 그 사람이 불쌍했다. 가족들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일 것이다. 더 이상 자전거 속도를 낼 수가 없엇다. 마음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별 경험을 다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내 눈으로 그런 사고를 목격하다니..

 

 날이 어두워지자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아까의 사고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절대 귀신을 믿지 않았던 나도 그 순간에는 믿었다. 정읍에서 공동묘지를 지나갈때도 이렇게 무섭지 않았는데....

 

 조금 더 가자 기차길을 관리하는 철도 관리소가 나타났다. 일단 일찍 자기로 하고 재워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그쪽의 대답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여행중에 깨달ㅇㄴ 사실이지만 일단 이런일은 한번 거절당하면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쪽 사람들이 계속가면 민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되 돌아가기 싫어서 그대로 쭉 진행을 했다.

 

  조금 큰 고개가 나왔는데 정말로 집이 없었다. 차들도 거의 없어서 불빛은 내가 가지고 있는 후래쉬와 달 빛 뿐이었다. 여태까지 만만하게 잤던데가 초등학교 관사였는데 부산에서 부터는 개학을 해서 신세를 질 수가 없었다.

 

 1시간정도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자 불빛이 하나 보였다. 무슨 공장같았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그 쪽으로 접근을 하니까 윗통을 다 벗은 꼬마 2명이 나를 쳐다본다. 꼬마애들한테 여행중인데 하룻밤 재워 줄 수 없냐고 물어 보니까 꼬마애들이 갑자기 집안으로 달려간다. 조금 있으니까 아저씨가 나오셔서 자초짖정을 이야기 하고 신분증을 보여주니까 흔쾌히 수락하셨다.

 

 그 곳은 비료 공장인데 공장장 아저씨가 2층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사는 모양이다. 꼬마애들이랑은 물론 금방 친해졌다. 난 아마 교대 체질인가 보다. 샤워도 하고 밥도 맛있게 먹었다. 아저씨는 정말로 자상했다. 일부러 10분 거리에 있는 휴게소까지 데려가서 술한잔을 했다. 술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분은 학교에서 학부모 대표를 지내고 계셨는데 학부모 입장에서 학교운영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난 학교에 다니면서 항상 선배들로부터 전교조 선생님들의 활약만을 들어왔는데, 부정적인 시각의 생각도 듣게 되었다.

 

 사모님은 나한테 초등학교 4학년애가 아직도 구구단도 못 외워서 걱정인데 어떻게 하면 좋냐고 나한테 상의를 했다. 아직 새내기인 내가 뭘 알겠느냐만은 작은 학교에서 배웠던 이론을 여기서 써먹을 수 있었다.

 

 불쑥 찾아온 외부인을 아무런 의심없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인정이 너무 고마웠고, 그 덕분에 악몽 가은 사고를 잊고 편하게 잘 수 있었다.(왜냐하면 애들방에서 자는 바람에 무섭지 않았기 때문)

천마총을 배경으로 일본인 관광객한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었는데.. 결과는 역시

  신라시대의 왕들이 술잔을 띄우면서 유흥을 즐겼다는 포석정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는 설도 있음)

 

 

십육일째(97. 8.24)

 

 전날 지체를 많이 하는 바람에 이 나른 먼거리를 가야 했다. 아침을 푸짐하게 먹고 작별 인사를 한 다음 출발하려고 하니 앞 타이어에 바람이 없었다. 아마 전날 밤에 끌고 오면서 빵꾸가 난 모양이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끌고 올라가야 했다. 그 고개의 정상까지 올라 갔지만 내려갈 길이 막막했다.

 

  원래 자전거로는 엄청 빨리 내려갈텐데 그냥 끌고 내려가기는 막막한 거리였다. 할 수 없이 여기서 눈물 머금고 이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히치를 했다. 히치를 시도하자마자 섰는데 사정을 이야기 하고 읍내까지만 태워 달라고 했다. 차창을 통해 나를 쳐다보는 어린이가 순수해보여 사진한장 찍었다. 한 2㎞정도 가니까 더 이상은 검문 때문에 곤란하다고 했다.

 

 이번 여행에서의 유일한 히치.. 꼬마아이가 신기한 듯 날 쳐다보길래 찰칵

 할 수 없이 다시 끌고 가야 햇다. 햇살은 따갑게 내리쬐고 있고 엄청 더웠다. 맨 날 자전거만 타다가 걸으니 답답했다. 그리고 걷는 속도가 이렇게 느린줄은 몰랐다. 한 30분 걸으니까 읍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조금 가니까 큰 나무 아래에서 노인들이 모여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난 rdths하게 다가가 읍내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 보아싿. 그런데 읍내는 멀지 않았는데 자전거포가 없다는 절망적인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할 수 없이 여기서 20㎞정도 떨어진 의성까지 걸어가게 생겼다.

 

그러나 사람은 꼭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거기 계신 20명의 어르신들이 나 때문에 모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의논하는 것이다. 참 송구스럽기도 하고 그렇게 신경  써 주시는 어르신들이 너무 고마웠다. 한 어르신께서 자기 친구중에 자전거 빵꾸 떼우는 장비가 있는 친구가 있다고 하셨다. 그 순간 난 서광이 비침을 느꼈다.

 

  그 어르신은 몸소 친구집까지 안내해 주셨다. 자초지정을 들은 친구분은 내 자전거를 보더니 이런 자전거는 한번도 고쳐본적이 없다고 하셨다. 내 자전거는 산악용 자전거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빵꾸 떼우는 기구들은 있어서 둘이서 같이 연구 하면서 고치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노력한 덕분에 자전거를 고칠 수 있었고, 내 개인적으로는 자전거 빵꾸 떼우는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정말로 뭐라고 고마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르신은 사례는 절대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 그냥 가라고 하셨다. 그냥 갈 수 없어서 부산 외숙모가 준 반건조 오징어 한 마리를 드렸다. 오징어는 여행중에 요긴하게 쓰였다. 거의 외숙모가 떠밀다 시피해서 가져 갔는데, 신세를 지는 사람에게 한두마리씩 드리는데 사용을 했다.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을 표현하고는 했다.

 

 다시 아까 어르신들이 모여 계신곳을 찾아서 인사를 드렸다. 어르신들은 진심으로 조심하라며 겪려해 주셨다. 정말 시골의 인정이 좋다는걸 그동안 여러번 확인했지만 이때처럼 와 닿은적은 없었다.

 

 다시 쌩쌩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팥빙수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의성에 도착하자마자 팥빙수를 먹고 중국집에서 막국수를 시켜 먹었다. 중국집 여종업원은 아르바이트 대학생인가 본데 내가 여행을 한다니 놀라워 하는 눈치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꽤 예쁘게 생겼다. 그 여자애도 나한테 호감이 갔는지 내 주위를 맴돌았다.(내 생각에는) 내 모습은 꽤죄지한데도...(하긴 기본적인 인물은 받쳐주니까) 그런데 난 막국수를 먹자마자 나와싿. 나오는 순간 후회를 했다. 정말 괜찮은 여자 같았는데 그냥 시간내서 이야기라도 할걸.. 그러나 이미 지나간일 인연이 있으면 만나겠지(아마 그런일은 절대 없을거다)라고 생각하며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은 의외로 대학들이 많다. 그리고 생각보다 큰 도시이다. 개강이 바로 다음날이어서 민속촌을 가지 못한게 아쉽기는 했다. 안동을 지나쳐서 영주시쪽으로 가다보니 날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결국에는 아무집이나 찾아가서 재워 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노인 부부가 사는 집인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시골의 인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 집에는 원래 손자 한명이 살았다. 그런데 고3이라면서 시험공부하러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난 그애방에서 잤는데 할머니가 방에 들어오시더니 공고생인 송ㄴ자가 전문대라도 갔으면 소원이 없겠다면서 나한테 상의를 하시는 것이다. 난 수능시험 볼때 작전을 잘 세워서 성공한 케이스이다. 수능 한달전에 작전을 세웠는데 작전명은 ‘배째! 등따’ 이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평소 모의고사때 보다 20점이상 올릴 수 있었다. 그 노하우를 공책 4장에 빽빽이 적었다. 물론 처음보는 나를 재워주신 할머니가 너무 고마워서이다. 그러고나서 오랜만에 만화책을 보며 편히 잤다.

 

 

 십칠일째(97. 8.25)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밥을 먹고 가려고 하니까 할머니께서 세탁기 호수 좀 연결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연결할려고 하니 호수가 말을 안 듣는다. 한 시간의 노력에도 안 돼서 끙끙 거리자 할머니가 할 수 없다며 그냥 가라고 하셨다. 내 여행중에 부끄러운 부분중에 하나이다.

 

 날씨는 맑았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이런날은 싫다. 차라리 비가 오는게 더 낮다. 왜냐하면 햇빛이 비치지 않고 시원하기 때문이다. 영주시에 도착해서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먹은 후 경상북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죽령을 넘기 시작했다. 소백산국립공원을 통과하는데 과연 경치가 좋았다. 그렇지만 죽령은 이제까지 전국일주를 하면서 제일 높았다. 그렇지만 난 이미 강원도 일주때 한계령을 통과해본 경험이 있어 별로 힘들지는 않았다.

 

 죽령을 넘어 가니까 예상대로 내려가는 길이 매우 험했다. 그런데 반정도 내려오다 보니 트럭이 한대 뒤집혀 있는 것이다. 아마 한 30톤 정도 되는 트럭인데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는 것 같다. 그 트럭을 지나가기 직전에 사고를 당할 뻔 했다. 커브길에서 트럭이랑 부딧칠뻔 했는데, 큰 트럭이라서 고개에서 방향을 꺽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내가 가던 차선에서 정면으로 덤벼든 것이다. 정말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고, 교통사고의 무서움을 다시한번 체험하는 순간이다.

 

 죽령을 넘어가자 단양이었다. 이때 이미 학교는 개강을 했다. 그래서 강행군을 하기로 했다. 단양을 지나가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꽤 많은 비가 오는데 어쩔 수 없이 맞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밤이 깊어지고 제천 시내를 지나가자, 매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도를 가려고 하니 아무래도 자살행위 같았다. 그래서 만만해 보이는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려다가 오히려 거지 취급을 받으면서 쫏겨났다. 어쩔 수 없이 우회도로를 통해서 원주방면으로 갔다. 자정이 되자 졸음도 오고 피곤해서 버스 정류장에서 그냥 침낭을 깔고 잤다. 힘든 하루 였다.  

 자 죽령을 너어서 제천으로~

  버스정류장에서 그냥 침낭을 깔고 잤다.

 

 

마지막날(97. 8.26)

 

 새벽 5시에 일어나 원주방ㅁㄴ으로 출발했다. 여름의 막바지라 그런지 새벼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원주에 도착하고 좀 쉰 다음 횡성으로 출발했다. 춘천이 가까워질수록 속도를 내고 달리기 시작했다. 횡성을 통과하고 악명높은 새마치 고개를 지난 다음 홍천에 도착했다. 이때가 1시쯤 됐으니까 거의 8시간만에 엄청난 거리를 온 셈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글의 내용이 없어서 짧게 느껴지겠지만 정말 장난 아니다. 하긴 이때 내 머릿속에는 온통 춘천 생각뿐이었으니까!)

 

 홍천에서 춘천으로 가는 길은 정말 낯익은 길이다. 강원도일주와 처음 출발할 때 이길을 거쳤다. 여기서 인심좋은 음식점을 만나 원가의 거의 2배에 가까운 막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어느덧 원창고개를 앞두고 할렐루야 주유소에서 쉬게 되었다. 정말 벅찼다.

 

 18일간의 고생끝에 드디어 도착

18일의 전국일주를 해낸 기쁨이 몰려오고, 어릴때부터의 꿈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몰려 왔다. 휴계소에서 상룡이 한테 삐삐를 치고 원창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고개는 무척 가파랐지만 장도의 목표를 앞에 둔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창고개의 꼭대기에 오르자 춘천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바로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 시작할지 말지 고민했던 장소이다.

 

 거기서부터 자전거 폐달을 한번 안 밟고 학교까지 갈 수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완전히 시꺼매지고, 거지꼴이 된 나를 보고 놀라는 눈치이다. 그러나 신경쓰지는 않았다. 보통이들은 하기 어려운 전국일주를 난 해냈으니까!

 아마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갈 교두보를 마련 했다는 점에서 너무 기뻤다. 학교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에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의 다음 목표를 음미해 가면서...(나의 다음 목표는 대학시절에 실크로드를 횡단하는 일이다.)

 

 

 

 제주도에 있는 성읍 민속촌에서

 이 돼지가 말로만 듣던 제주산 똥 돼지 이다.

제주 민속촌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

 입장료 4000원이 아까워서 사진을 막 찍었다.

 해녀들의 방인 듯.. 그물이 눈에 띈다.

  대장간의 전경인듯...

 각종 어구들이 전시 되어 있다.

 제주도의 전통 방아간

  혼례식을 올리는 장소

  제주에서 사용되었던 여러 가지 도구들

 전형적인 제주전통민가 지붕마다 밧줄로 묶어 놓았다.

 제주도에서 조상들이 살던 모습을 재현

 서당의 모습인듯..

 성읍 민속촌은 무료이지만 음식값이 비싸다

 태풍이 몰아치는 파도를 배경으로

 뒤의 돌이 무슨 유명한 돌인거 같은데 기억안남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상에 기대어

 천지연 폭포 상부에 있는 아름다운 못

 서귀포 3대 폭포중에 하나인 전지연 폭포

역시 천지연 폭포

 삼별초의 항쟁을 그린 그림

 제주도가 형성 되었을 때부터 존재한 만장굴에서의 모습

 귀여운 사촌 동생들

그 중에서 제일 까부는 성욱이와 함께

 경주박물관 앞에 있는 에밀레 종

 경주에 있는 대형 고분군

 경주박물관 앞에 있는 거북이 상

 죽령을 넘다가 마주친 장승들

 단양 8경중에 하나인 도담 삼봉

 여행도 이제 막바지 이다. 제천에서..

 제천시에 세워져 있는 탑(멀 상징하는지는 잘 모른다.)

 안개끼는 새벽.. 산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