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금)
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는 키르키즈 에어라인이다. 어제 오후 9시 30분쯤에 인천공항에서 이륙을 했다.
국적 항공기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허술한데가 많다. 비행기가 낡은 것도 그렇고, 좌석표가 있지만 비행기 안으로 늦게 들어가면 남은 자리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무엇보다 승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거의 전무한 편이다.
창가에 안기는 했지만 밤이라 그런지 땅위의 풍경은 어둠일 뿐이다.
비행기가 이륙한지 3시간이 지났다. 지금 비행기가 지나가고 있는 지역은 3년전 여행했던 신장 위그루 지역이겠지?
창밖을 통해 하늘을 보니 별빛이 정말 밝았다. 며칠 전 친한 선생님들과 영월 별마로 천문대에서 별을 관찰했었는데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별들이 밝았다.
10Km 상공에서 별을 관찰하니 당연할 수밖에.. 자리를 옮기면서 별을 관찰 하였다. 페르세우스 사각형, 안드로메다, 좀생이별, 시리우스, 저 멀리 화성 등.. 별빛이 가장 화려하다는 겨울철에 비행기에서 별을 관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땅에는 간간히 불빛이 보이는데 별빛과 비슷했다. 때문에 우주선 위에서 사방의 별들을 관찰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6시간 30분을 날아간 비행기는 키르키즈스탄의 수도 비쉬켁에 도착했다.
키르키즈는 우리나라보다 3시간이 느리다. 때문에 지금은 이곳 시간 새벽 1시가 조금 넘었다.
비행기에서 나와 도착 비자를 신청하러 갔다. 도착 비자를 신청하는 한국인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배낭여행자는 나 하나뿐인 것 같다.
1시간을 넘게 기다려 도착비자(35$)를 받고 입국수속을 마쳤다. 시각은 새벽 2시..
‘도대체 뭘 해야 하지?’
이 새벽에 막막하기만 하였다. 공항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고, 30Km 떨어진 시내까지 가는 버스가 끊겨 10$가 넘는 택시를 타야하는 상황이다. 또한 환전을 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숙소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아무래도 시내에 가봤자 폭설과 추위에 시달리며 헤메게 될 가능성이 커보였다.
그냥 아침까지 공항에서 시간을 떼우기로 했다.(몇 번의 경험이 있음^^)
의자에서 배낭에 의지한 채 선잠을 자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가끔 택시 삐끼들이 다가와 톡톡 건드렸지만 그냥 무시했다.
오전 7시 30분..
일단 공항 환전소가 열었기에 시세를 보니 1$에 40솜(som)이다. 일단 20$를 환전했다. 세계 어느 곳이나 공항 환율이 최악인 것은 알만한 배낭 여행자들은 아는 사실이다.
아직 어둠이 깔리기는 했지만 미니버스가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일단 No 153번 미니버스(30솜)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이날 폭설 때문에 미니버스는 천천히 운전을 했다. 주변 풍경은 명화 ‘닥터 지바고’에서 눈에 덮힌 마을과 들판을 보는 듯 했다.
버스는 1시간이 넘게 걸려 비쉬켁에 도착했다. 도착 장소는 Osh 바자르..
비쉬켁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은 바로 카자흐스탄 대사관과 이란 대사관을 가야한다. 중앙아시아 여행을 힘들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비자 문제이다. 유일하게 키르키즈스탄은 도착 비자가 가능했기 때문에 첫 출발지로 이곳을 정한 것이다.
12월 초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카자흐스탄을 출발지로 정하려고 했지만 카자흐스탄 대통령 선거 때문에 모든 비자는 Loi(초청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한 모든 절차를 거치면 3주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카자흐비자는 키르키즈에서 받기로 했다.
우즈벡 비자는 인접국에서도 시간이 걸린다고 하기에 여행사(1달 유효 15만원)를 통해서 취득했다.
어제 그 여행사를 방문해서 알아보니 12월 19일부로 카작 비자가 Loi가 없이도 취득 가능하다고 했다.(아.. 열받어...)
이란 비자를 취득하는 이유는 바로 투르크메니스탄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비자 얻기가 불가능함을 물론 인접국인 우즈벡에서도 관광 비자를 받으려면 많은 시일과 비용이 든다. 때문에 대부분의 서양 배낭 여행족은 트랜짓(통과)비자를 우즈벡 주재 투르크맨 대사관에서 받아서 잠깐 투르크맨을 여행을 하는데 그럴려면 이란 비자가 있어야 가능하다.
중앙아시아 여행을 계획하는데 비자 문제는 정말이지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론니플래닛에 그려진 비쉬켁 지도에 의지하고 현지인들에게 물어물어 오쉬바자르에서 2킬로 정도 떨어진 카자흐스탄 대사관으로 걸었다.
비쉬켁 시내는 온통 눈 때문에 빙판으로 변해 있었다. 춥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표정이 없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카자흐스탄 대사관에 가니 얼마 전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휴.. 처음부터 어긋나는군..
근처의 이란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신청했다. 이란 비자는 초청장이 필요한데 인터넷을 통해서 초청장을 신청했다.
초청장은 신청서를 작성하고 여권을 스캔한 사진을 첨부해서 신청하면 다음날 메일을 통해 Paypal을 통해 비용(30유로)을 지불하라고 연락이 온다.
신용카드를 통해 결재를 하면 1주일 뒤에 다시 메일이 오는데 거기에는 승인 번호가 있다. 이 메일을 그대로 인쇄해서 이란 대사관으로 가져가면 1일~3일내에 관광비자가 나온다. 인터넷으로 신청하면서 비슈켁에 주재한 이란 대사관에서 받는다고 신청을 하면 된다.
나처럼 시간이 촉박하거나 장기간 여행 중 이란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여행자에게는 아주 편리한 방법이다.(우리나라에서는 이 방법을 통해서도 최소 15일 정도 걸림)
이란 대사관에 초청장 메일을 인쇄해 가져가니 영사가 신청서를 2장주면서 작성하라고 한다. 빠짐없이 작성을 하고 난 후 여권 사진 3장과 함께 제출했다.
영사는 내일 오후 4시에 오라고 한다. 내일? 내일은 토요일인데 대사관이 문을 여나?
그러면서 비자피 38달러는 파키스탄 은행을 통해서 납부하라고 한다.
파키스탄 은행의 위치를 물어보니 대충 방향만 가르쳐준다. 벽에 약도가 그려져 있는 쪽지가 있기는 하지만 알아보기 힘들다.
파키스탄 은행을 찾아 근처를 헤맸다. 추운 날씨에 눈은 이미 얼어서 빙판이 되었다. 덕분에 은행을 찾으면서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30분을 헤맸지만 결국 파키스탄 은행을 찾지 못했다. 다시 이란 대사관으로 돌아와 대사관 직원에게 현지어로 적어달라고 부탁을 하니 쪽지에 적어준다.
결국 이란 대사관에서 곧장 Soviet 거리로 간 후 길을 건너 조금 떨어진 곳에 파키스탄 은행이 있었다. 은행에서 환전을 했는데 100$를 4150솜에 바꿀 수 있었다. 공항에서 환전하는 것 보다 150솜(3750원)을 더 받을 수 있었다.
비자피를 납부하고 영수증을 받은 후 카자흐스탄 대사관을 찾아 나섰다.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찾았지만 사람들의 대답도 가지가지.. 1시간을 걸어 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럼 카작 비자는 어떻게 얻지?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다른 배낭 여행자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란 대사관에서 가까운 거리에 Sabyrbek's B&B를 찾아갔다.
주인아저씨는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숙박비는 론니에는 6~10$라고 나와 있지만 비수기라서 그런지 5$밖에 안한다.
마침 서양 여행자에게 카작 비자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은 1달 전에 비쉬켁 시내 남쪽으로 이사를 했으며 Manas 거리에서 남쪽 방향으로 가는 266, 298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카자흐스탄 버스가 나온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헤맸으니.. 진작에 이곳에 왔으면 고생을 덜 했을 텐데..
버스를 타고 새로 지어진 카자흐스탄 대사관을 가니 오늘은 비자 업무가 끝났다고 하며 다음주 화요일 9:00~12:00에 오라고 한다.
다음주 화요일?(1월 3일) 다음주 월요일은 신정 연휴라서 쉬는 모양이다. 휴.. 일정이 완전히 틀어졌네.
이번 여행을 40일로 잡았는데 이란까지 가기에는 벅찬 시간이다. 때문에 일정을 빠듯하게 잡았는데..
일정이 틀어지기는 했어도 일단 여행은 즐겨야지..
곧장 키르키즈에서 가장 큰 시장인 오쉬바자르로 향했다.
바자르는 수많은 인파들로 빽빽했다. 과일, 정육점, 공산품, 곡물등 종류별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저곳에서 흥정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카레이스키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키르키즈인과 고려인이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몽골민족의 피가 섞여서 그런가? 덕분에 키르키즈에 사는 고려인은 인종 차별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한다.
곳곳에서는 이슬람 음악이 흐르고 사진에서만 보던 우리나라의 70년대 시장을 보는 듯한 풍경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이곳 서역 땅에 내가 있다니.. 실크로드 시대는 물론 구소련 시절인 15년전만 해도 감히 누가 와볼 생각도 못했던 이곳에 내가 지금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숙소에서 20살 된 카메룬 여행자를 만났다. 이름은 캐빈이고 축구 선수라고 한다. 캐빈은 어렸을 때 즐겨본 드라마(캐빈은 12살) 주인공인데..
축구선수이긴 하지만 러시아에 1년째 유학중이며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숙하고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조금 구사 할 줄 안다고 한다. 도대체 몇개국어야?
캐빈은 짐을 가지러 숙소를 나섰다. 친절이 몸에 베어 있는 난 ‘짐이 많이 무거우면 도와줄까?’라고 하니 캐빈은 ‘나와 같이 가기를 원하는거야?’라고 한다.
휴.. 어떻게 아니라고 하나. 사실 날도 추워서 그냥 숙소에 있고 싶지만... 캐빈과 함께 집을 나섰다.
난 캐빈에게 ‘너 축구선수보다는 에이전트가 되고 싶은 거지?’ 라고 물어봤다. 캐빈은 수긍한다. 난 캐빈에게 ‘넌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어린나이에도 넓은 견문이 있어서 아마 FIFA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야.’라고 하니 캐빈은 그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한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골잡이 사무엘 에투하고도 절친한 친구라고 한다.
혹시 지금 내가 미래의 FIFA 회장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숙소 주인인 사비벡 아저씨는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다. 내가 이 집에 묵게 된 몇 번째 한국인인지 물어보니 3번째라고 한다. 3년 전에 재일교포인 듯한 여자 여행자가 묵었고, 두 번째는 나이든 아저씨가 묵었다. 카메룬인인 캐빈은 첫 번째라고 한다.
반면 일본인 여행자(나의 경쟁자들)는 꽤 많이 들른다고 한다. 이미 일본인들은 중국, 인도, 파키스탄, 터키를 넘어 이곳 중앙아시아를 배낭여행의 무대로 삼고 있다.
사비벡 아저씨는 일본인들에 대해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온통 새빨간 긴 머리를 한 가수와 아름다운 이식쿨 호수에서 예쁜 여자가 있어서 악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루도 안 되서 돌아온 일본인.. 그 외에도 많은 일본인을 기억하고 있다.
일본 여행자 중에 싸이코들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기는 하다. 숙소에는 일본인 여행자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고 한다. 나도 아직 한마디도 못했다.
식사가 끝나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다음 침대에 누웠다. 공항에서 밤을 새고 하루 종일 비쉬켁 시내를 헤메서 그런지 무척 피곤했다. 오늘 걸은 거리만 해도 10킬로는 넘는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