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일(일)
소말리아 통과 비자를 받는 것은 꽤 까다롭다. 여행사의 보증이 있어야 받을 수 있는데 이제 막 도착한 우리가 뭘 알겠는가?
배는 오늘 중으로 가축을 싣고 다시 예멘 모카항으로 떠난다고 한다. 혹시나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면 가축과 함께 예멘으로 떠나야 할 상황이다.
다행히 선장이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애써준다.
푸근한 인상의 선장은 선장실에서 음료를 대접해주며 오늘 비자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며 우리를 안심시켜준다.
토모미는 조리실로 가서 점심 식사 준비를 거든다. 나는 선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오전 내내 이곳 Immigration 관계자와 여행사 직원이 배를 왔다간다 한 결과 오전 11시에 7일짜리 통과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Immigration 직원은 경찰을 대동해서 이곳의 수도격인 하르게이사(Hargeysa)까지 택시를 대절해서 가야 한다며 100$를 요구한다.
그냥 로컬(현지인)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말하지만 허락지 않는다.
결국 토모미와 내가 25$씩 내어 50$에 하르게이사(Hargeysa)까지 가기로 했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주방장 할아버지와 토모미가 만찬을 준비를 했다. 모두가 맛있게 식사를 하며 이별을 아쉬워한다.
잠깐의 만남이지만 선원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 우리가 떠나려고 하자 모두들 악수를 하며 배웅을 나온다.
특히 한 할아버지 선원이 여행할 때 쓰라며 비누 한개를 내손에 쥐어준다. 할아버지의 정성에 가슴이 뭉클하다.
친절한 선장은 여행할 때 요긴하게 쓰라며 물 10병과 음료수 6개, 스위트(코코아 맛이 나는 과자 종류) 4개를 비롯해 토모미를 위해 담배 5갑을 챙겨준다. 선장의 호의가 고맙기는 하지만 짐이 너무 무거워 들고 다니기가 버겁다.
모두와 헤어지고 택시에 올랐다.
소말리아는 지금 전쟁 중인 소말리아(Somalia), 북서쪽에 위치한 펀트랜드(Puntland), 북쪽의 소말리아랜드(Somaliland)로 나눠진다. 각각의 지역은 독립된 형태의 지방정부가 있다.
현재 전쟁 중인 지역은 소말리아(Somalia)로 기독교계 임시 정부군과 이슬람 반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매일 외신을 타고 있다. 에티오피아, 미국이 임시 정부군을 지원하고 있고 중동을 비롯한 이슬람 국가는 반군을 지원하고 있어 사뭇 국제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내가 위치한 지역은 소말리아랜드(Somaliland)이다. 세 개의 지방 정부 중에서 그나마 나은 상황을 유지하고 있고, 외국인 여행객의 방문도 가능하지만(거의 극소수가 방문) 화물선에서 바라 본 아름다운 항구와 달리 베르베라(Berbera)의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의 표정은 메말라 있으며 온전한 건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Immigration에서 택시를 타고 하르게이사(Hargeysa)로 향했다. 계속되는 사막 초원과 산맥이 쭉 이어진다.
하르게이사(Hargeysa)로 가는 동안 몇몇 마을을 볼 수 있었는데 집 같지도 않은 움막에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시간 정도를 달리니 큰 도시가 나타났다. 바로 소말리아랜드의 수도인 하르게이사(Hargeysa)이다.
소말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지만 아스팔트 도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차들이 먼지를 풀썩 일으키며 지나다니고 있다.
고층건물은 찾아볼 수가 없으며 차림새가 남루한 사람들이 표정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어두운 좀비의 도시에 온 느낌이 든다.
그래도 외국인이 신기한지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영어가 어느 정도 통하는 편이다.
택시는 Bilal 호텔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이곳은 우리보다 앞서 온 6명의 여행자들이 묵고 있다고 말한다.
숙박비는 30000소말리랜드실링(앞으로 실링이라 부르겠음)이다. 1$에 6200실링이니까 5$도 채 안 된다.
호텔에서 짐을 푼 후 환전을 하러 거리에 나섰다. 외국인이 나타나자 많은 사람들이 동냥을 한다. 거리를 걷다보면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벌리는 사람들이 쭉 이어진다.
거리에는 많은 환전상이 있는데 토모미와 내가 15$씩 총 30$를 건네니 환전상은 돈뭉치 3개를 준다. 뭐지?
그 이유는 이곳의 가장 큰 화폐단위가 500실링이기 때문이다.1$에 6200실링이니까 30$면 186,000실링이다. 500실링짜리 372장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 오랜 전쟁의 여파로 경제 시스템이 거의 마비되었고 때문에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겪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떠올랐다. 당시 독일은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갚기 위해 독일 은행에서는 마르크화를 무분별하게 찍어댔으며 결국 1$에 4조 마르크까지 뛰어 올랐었다. 이러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독일 국민의 생활은 무척 피폐했으며 그러한 사회 환경으로 히틀러의 나치가 무섭게 성장했으며 그 결과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환전을 하고 돈뭉치를 바지 주머니에 넣으니 주머니가 묵직하다. 마치 부자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하다.
거리를 걸으니 친숙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여기저기서 싸움을 하는 것을 목격 할 수가 있다.
특히 이권이 걸린 장소, 예를 들면 택시 정류장과 같은 곳에서는 서로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주먹이 난무한다. 이곳 사람들의 삶이 무척 억척스럽고 힘겨운 것을 알 수 있다.
저녁 식사는 우리보다 앞서 도착한 6명의 여행자와 함께 식사를 했다. 지부티에서 NGO 활동을 마친 프랑스 커플, 영국, 미국, 아일랜드, 일본인 각각 1명씩이다. 여기에 내가 한국인이니까 무려 6개국 여행자가 모여 식사를 하는 셈이다. 아마 하르게이사에 체류하는 거의 유일한 배낭 여행자일 것이다. 언어는 물론 영어로 통했다.
베르베라에서 하르게이사까지 오는 과정을 물어보니 그들은 베르베라에서 1인당 2$씩 내고 하르게이사로 왔다고 말한다.
우리가 Immigration직원에게 속았다. 23$를 여러 사람들에게 그대로 바친 셈이다. 이곳 물가로 봤을 때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토모미와 나는 그냥 비자피가 45$라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돈이라도 가로채려고 오전 내내 노력한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6명의 여행자는 5일짜리 통과 비자를 받아서 내일이면 지부티로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지부티로 가는 교통은 랜드크루져가 유일하며 1인당 부담해야 하는 금액도 무척 비싸다.
나와 토모미는 지부티, 에티오피아 비자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차하면 이곳에서 가까운 에티오피아로 빠지기로 했다.
난 소고기 볶음에 밥, 주스와 차를 곁들였는데 18000실링이 나온다. 500실링짜리 지폐가 36장이다. 돈 세는데도 버겁다.
가장 큰 화폐단위인 500실링이 우리 돈으로 77원 정도니 1000원짜리 물건을 사면 몇 장의 지폐를 지불해야 하는지 잘 계산해보라. 지금 여행기를 계속해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쓸 정도이다. 차라리 고액 화폐를 새로 발행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텐데 돈을 세는데 만 많은 경제적 손실이 있을 것이다.
저녁이 되자 호텔에도 전기가 들어온다. 되돌아보면 오늘 하루일이 꿈처럼 흐른다. 마치 다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다. 이렇게 열악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6.25 전쟁 직후의 우리나라도 비슷한 상황이었겠지?
어르신들이 외국인만 보면 Give me 초콜렛 말했다는 것이 이곳에서는 실감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Give me money'를 나에게 외친다. 특히 어린이들 같은 경우는 더욱 심한편이라 안타깝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의 한 경제학자는 한국을 보며 도저히 가망이 없는 나라라고 소개를 했다. 그렇지만 높은 교육열과 잘 살아보겠다는 일치된 우리 국민성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성장을 이루어 지금은 선진국으로 진입을 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나라이기에 많은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우리나라다.
그런데 이곳은... 음...
솔직히 이곳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식주 모두 피폐하고 사람들의 표정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며 여기저기서 싸움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큰 화폐인 500실링짜리 뒷면을 보면 가축을 수출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즉 우리가 베르베라로 올 때 타고 온 가축 화물선이 이곳 수출의 전부이다.
수십년의 내전으로 산업 기반 시설은 파괴되었으며 생산 활동이 거의 없으니 수출은 이루어질 수 없고, 수입에 대한 수요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결국 엄청난 인플레이션만 되풀이 될 뿐이다.
오늘 하루 하르게이사를 돌아보면서 나의 생각이 1960년대 우리나라를 바라 본 미국인 학자처럼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