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금)
오전에 일어나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처음에는 고산병을 의심했으나 아디스아바바는 예멘의 사나와 비슷한 고도이기 때문에 아닌 것 같다.
여태까지 강행군을 하면서 잘 버틴 몸이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한순간에 무너지며 몸살이 심하게 걸린 것이다.
원래 오늘 계획은 아디스아바바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럴 때는 하루 푹 쉬는 것이 상책이다.
하루 종일 누워서 노트북에 저장 된 영화를 봤다.
저녁 때 토모미가 내 머리에 손을 올리더니 화들짝 놀란다. 열이 꽤 심하다면서 약을 챙겨준다. 아플 때 챙겨주는 사람이 있어 심리적으로 안도가 된다.
뭐.. 여행하다보면 이럴 때도 있지.. 하루 종일 고열에 시달린 날이다.(대수롭지 않게 쓰지만 사실 많이 괴로웠음.)
1월 20일(토)
토모미가 준 약 덕분인지 몸살은 많이 나아져서 토모미와 다른 일본인 여행자인 타카세와 함께 팀캇(Timkat) 축제를 보러 갈 수 있었다.
팀캇 축제는 예수가 동방박사 앞에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날을 기념하는 꽤 큰 규모의 기독교축제로서 1월 19일부터 3일 동안 열힌다.특히 잔메다(Jan Meda) 운동장에서 열리는 크리스찬 의식이 유명하다.
미니버스를 타고 잔메다 운동장으로 가니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 모든 현지인들이 하얀색 옷을 입고 의식에 참여하는데 규모가 꽤 크다.
행사는 오전 9시에 시작하는데 1시간 전부터 찬송가를 신나게 부르며 의식을 한다.
오전 9시가 되자 엄숙한 분위기에서 메인 의식이 시작되었다. 안전사고를 우려해 수많은 경찰들이 의식장소로의 접근을 막는데 특이한 것은 사진을 찍는 외국인은 전혀 제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축제가 세계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어 많은 외신기자들이 와서 취재를 하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 의식을 하는 교인들을 지켜보니 진지한 표정으로 여러 의식을 한다. 에티오피아는 아르메니아에 이어 두 번째로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이곳 사람들의 신앙심은 꽤 깊다. 의식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1시간 정도 의식을 지켜보다 먼저 잔메다 운동장을 빠져 나왔다. 이 근처에 있는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서이다.
먼저 간 곳은 아디스아바바 대학에 있는 Ethonological 박물관인데 에티오피아의 전통 문화와 종교 원주민에 대한 다양한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모든 설명이 영어로 되어 있어서 에티오피아의 문화에 대해 공부하는데 좋은 장소이다. 직업이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보니 원주민 아이들의 장난감을 전시해 놓은 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저런 놀이기구도 있구나.’하고 감탄)
박물관을 나와 입장료(20Birr)을 내려고 하니 매표원이 자리를 비워 매표소가 잠겼다며 그냥 가라고 말한다. 이런 행운이...
전시물 보다 박물관 자체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스(Haile Selassie's) 황제가 거쳐하던 관저였다는 것이다.
그 전에 에티오피아의 황실에 대해 잠깐 소개를 하지면..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노아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햄족으로 피부만 검을 뿐 혈통 상으로는 백인에 속한다. 우리가 흔히 에티오피아 하면 보통 아프리카의 흑인들의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잘못된 상식이다. 거리를 걷다 현지인들을 관찰하면 이들의 얼굴과 행동이 어딘가 백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많이 들 것이다.
크리스찬에게 잘 알려진 솔로몬 대왕과 시바 여인에게서 메넬리크 1세가 전설상의 에티오피아의 첫 황제이다. 그 이후에 황위는 쭉 이어지지만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1270년 타스파 예수(Taspa Jesus)가 세운 솔로몬 왕조를 그 시초로 삼고 있다.
제 67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1930년에 즉위하여 1936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에 의해 한때 황위를 뺏긴 적도 있지만 1941년 연합국의 도움으로 다시 복위를 한다.
그 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의 근대화에 전력을 했으며 1960년대까지는 1인당 국민 소득 3,000$로 선진국 중 하나였다. 아프리카 국가의 리더였으며 아프리카 연합의 중심 국가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최빈국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00$를 넘지 못했을 시대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로 6.25 전쟁 당시 UN군에 에티오피아 군대를 파견해 한국을 도왔고 1960년대 한국을 방문을 했다.
개인적으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6.25 전쟁 당시 군대를 파견한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던 이유와 흡사하지 않나 생각된다. (과거 전쟁에서 큰 도움을 줬던 서방국가에게 보은의 차원, 또는 경제적 이유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호위무사가 그 유명한 올림픽 마라톤 2관왕인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이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티오피아 황실의 역사는 우리의 생활 속에도 자리 잡고 있다.
바로 라스타파리즘이라 불리는 레게음악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레게음악의 시조는 바로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이며, 그 직계 후계자가 바로 미국 레게음악의 대부 밥 말리이다.
오늘날 간신히 황통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현 황위 계승자는 영국에 거주) 에티오피아 황가는 레게음악 매니아들 사이에서 신봉되고 있다.
그러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말년의 실정과 교회의 부패로 인해 민중들이 큰 고통을 받게 된다.
외세의 침략과 전쟁, 그 후 개발독재와 독재 말년의 실정...
에티오피아의 역사는 우리의 근대사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1974년 소련의 세력을 등에 업은 멩기투스의 쿠데타로 인해 두 나라 역사는 완전히 극과 극을 내달린다.
우리는 흔히 선진국에 진입했다 후진국으로 전락한 나라로 아르헨티나를 꼽는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좋은 사례로 에티오피아를 꼽으면 어떨까? 에티오피아처럼 완벽하게 추락한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일레 마리암 멩기스투는 1974년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세력을 등에 업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궁궐 뒤 화장실에서 살해하고 사회주의 성향의 임시군사평의회를 설치했다.
그 후 수 천명의 야당인사를 살해하였으며 1984년 9월 에티오피아 노동당을 조직해 의장이 되었다. 1987년 국민투표에서 81%의 찬성표를 얻어 신헌법을 통과시키고 군사정부를 해체, 민간정부로 전환합니다.
멩기스투 시대에 무리한 사회주의화 정권추진, 내전, 독재, 기근에 시달리며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에티오피아에는 많은 난민들이 생겨나게 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팝송인 ‘We Are The World'가 1985년 미국의 유명가수 80여명이 ’USA for Africa(다소 오만하다는 느낌이..)‘라는 이름으로 기아로 죽어가는 에티오피아 난민들을 돕기 위하여 부른 노래이다.
그러나 멩기투스 역시 반군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1991년 4월에 대부분의 도시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본인도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당시 반군이던 멜라위가 현재까지 정권을 잡고 있다. 15년간의 독재체제와 이웃한 에리트리아와의 계속되는 분쟁과 빈곤으로 인해 대다수의 이디오피아 민중들은 고통을 받고 있다. 2005년 5월에는 당시 에티오피아 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에티오피아 전 지역에서 시위가 일었는데 철저하게 학생들과 민중들을 탄압했다.
당시 국제앰네스티는 26명의 학생과 수십 명의 시위자가 살해당했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500명가량이 체포되어 고문 위협에 놓였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2006년 6월 이웃나라인 소말리아에서 이슬람법정연대가 수도를 장악하고 그 세력을 넓히자, 이디오피아 멜라위 정부는 당시 소말리아 외곽도시에만 영향력을 한정하고 있던 소말리아 과도정부 측에 무력 지원을 했다.
계속 되는 혼란과 독재는 유니세프(UNICEF)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최빈국 중 하나로 에티오피아로 꼽도록 만들었다. 또 전체 인구의 23%가 하루 1달러 이하로 생활하고 있으며, 평균수명이 48세로 극히 열악한 상황이다.
민중의 지지와 국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멜라위 정부가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아는 분들은 짐작했겠지만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9.11 사태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고, 주변이 이슬람 국가로 둘러싼 에티오피아 멜라위 정부는 미국의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해 왔다.
지금 지부티에는 대규모의 미군기지가 있는데 주요한 임무가 에티오피아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 의해 훈련된 20만 명가량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당연히 소말리아에 벌어진 전쟁의 주인공도 에티오피아다.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군..
이해하기 쉽도록 여기서 2007년 1월 18일자 프레시안에 실린 ‘소말리아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인용하도록 하겠다.
----------------기사 내용----------------------------------------
이번 전쟁이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 전쟁이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이슬람법정연대의 전쟁, 즉 내전이라고도 하고, 또는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이디오피아, 그리고 그 뒤의 미국으로 묶여진 동맹과 이슬람법정연대와 에리트리아, 그리고 일부 중동국가를 묶는 동맹 간의 전쟁이라고도 한다.
또는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전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침공은 아무런 힘도 없는 소말리아과도정부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미국에 의해 잘 훈련된 이디오피아의 멜라위 정권 군대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올해 6월부터 소말리아에서 세력을 확장 중인 이슬람법정연대를 무력 처단한 것이다.
1991년 이후 소말리아는 세속 부족과 군벌에 의해 무법, 무질서의 상황이었다. 1992년 유엔과 미국은 소말리아에 개입하지만 1995년 공식적으로 임무실패를 선언하며 소말리아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 그 이후 소말리아 내부 상황은 큰 군벌 간의 전쟁, 더불어 소규모 군벌들까지 전쟁에 개입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빈곤한 나라가 되었다.
수십만 명이 유엔의 긴급구호물자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나 몰라라 하고 있던 미국은 올해 6월 이슬람 샤리아를 법과 질서로 내세운 이슬람법정연대라는 세력이 수도를 비롯하여 소말리아 전역으로 세력을 키우자 그제서야 소말리아와 오랜 긴장관계에 있던 에티오피아를 부추겼다.
거의 15년 이상을 기아와 빈곤, 무법과 무질서 상황 속에 있던 소말리아 민중들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치 않다가, 더군다나 이슬람법정연대의 부상 이전에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하고 있던 군벌에게는 자금지원까지 하면서 소말리아의 무법상황을 방치했던 미국이 이슬람법을 질서수단으로 하는 세력이 나타나자 이를 이디오피아와 소말리아 과도정부를 내세워 무력으로 차단한 것이다.
미국의 눈에는 수백만 소말리아 사람들의 고통의 찬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직 '이슬람이라는 귀신'만 보였던 것이다.
전쟁 끝? 전쟁 2막의 시작!
이슬람법정연대의 짧은 소말리아 통치 기간 동안 수도 모가디슈는 상대적으로 법과 질서가 생겼고 공항과 항만도 열었었다. 오랜 가뭄과 내전, 무법으로 고통의 극한에서 지냈던 소말리아 민중들에게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반길 일이었지만 내부적으로 이슬람법정연대 강경파에 의한 강력한 통제정책(서구적 음악과 영화 상영금지, 축구관람 금지, 여성 히잡 착용) 등은 수도 모가디슈에서 반발을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슬람법정연대에 의한 이런 시도는 외세의 군대에 의해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디오피아 수상은 소말리아 내의 여론악화를 우려하여 자국의 군대를 수주일 내로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고, 소말리아 과도정부 수상 게디 역시 공항과 항만을 열고 무기소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외세의 군대가 철수하면 당장 과도정부 내에서 소말리아를 통제할 힘이 없기에 소말리아 과도정부는 유엔이나 이디오피아에 군사력을 빌리려고 할 것이다.
또한 이슬람법정연대의 세력이 전투로 인하여 패퇴하였다기보다는 각 근거지에서 먼저 빠졌기 때문에 다수의 세력이 인근 케냐나 수단에 자리 잡고 있고, 또 일부는 소말리아 내부로 스며든 상태다. 이미 그들은 소말리아 과도정부에 대해 공세를 펴겠다고 발표한 상태다.
더불어 여전히 소말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세속 군벌과 부족은 또 다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소말리아 과도정부와의 관계를 설정할 것이기에 전쟁의 2막은 1막의 종료와 함께 이미 시작된 것이다.
미국은 '이슬람은 곧 테러'라는 악령에 씌여 15년 만에 소말리아 민중들에게 찾아온 새로운 기회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소말리아 과도정부를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당장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소말리아 과도정부는 소말리아 민중의 지지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외세의 힘에 의존할 것이고 결국은 소말리아의 상황도 이라크의 상황과 유사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또한 소말리아 민중의 95%가 무슬림인 상황에서 미국과 이디오피아의 존재는 반감과 갈등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속 군벌이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자칫 과거 수십 년 동안 반복되어 왔던 무정부 상황으로 갈 확률 또한 높다.
민중의 지지가 없이 외세의 힘만으로는 평화가 구현될 수 없다. 이는 이미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여타의 경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은 전 세계에 전쟁을 일으키며 그 곳에 고통의 씨앗을 심었다. 미군의 주둔과 점령으로 이라크에서, 아프카니스탄에서, 전 세계 많은 곳에서 민중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소말리아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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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사에서는 소말리아의 내전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 내 생각에는 에티오피아 역시 혼란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에티오피아는 수많은 종족들로 나눠있으며 종족 간에 갈등이 심한 편이다. 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장기 독재에다가 외세의 지원에 목메는 현실이다.
강한 군대를 보유했다는 이야기는 정부가 통제력을 잃었을 때 쿠데타나 군벌 세력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도 된다.
무엇보다 에티오피아는 기독교 국가이기도 하지만 무슬림 역시 35%가 넘으며 그 비율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즉 지금 정부는 에티오피아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여력을 잃은 채 외세(더 정확히 미국)에 기대고 있으며 그것이 와르르 무너졌을 때는 혼란 상황이 올 것이 뻔하다.
에티오피아에도 국민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 국민의 지지를 폭 넓게 받는 진정한 민주 정부가 들어서 옛 영화를 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물관에 들렸다는 내용을 쓰려다 이야기가 이곳저곳으로 마구 샜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가? 여인네들이 말 많은 남자보다는 과묵한 남자에 더 매력을 느낀다던데.. 쯧
다시 길을 나서니 날씨가 너무 덥다. 잠시 카페에 앉아 마키아토(에스프레소 커피) 두잔을 훌쩍 마셨다. 시내 곳곳에 카페가 있어 걷다가 지치면 잠시 앉아 부담 없이 커피한잔(2~3Birr)을 하는 것도 에티오피아 여행의 큰 매력이다.
남쪽으로 500m를 걸어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에 갔다. 이곳에는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는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다.
바로 인류의 조상이라고 알려진 ‘Lucy'이다. 320만년전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비밀의 중요한 열쇠를 쥐었다고 한다.
아프리카는 인류의 요람으로 원래는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지금의 사하라사막 지역이나 이곳 에티오피아 고원은 남미의 아마존 못지않게 푸른 신록으로 울창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원숭이의 형태로 남부럽지 않게 지내던 우리 조상에게 세월에 따른 지형 변화는 생활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나무위에서 지내던 유인원은 울창한 숲이 하나둘씩 사라지며 나무 아래로 내려와 생활을 해야 했으며 그에 따라 손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진화를 한 것이다.
손을 사용함으로서 도구를 쓰게 되고 곧바로 뇌의 발달로 이어졌다. 또한 그림과 문자를 사용함으로서 정보의 공유가 편해지고 더 많은 지식을 습득 할 수 있었다. 인간의 뇌의 발달에 따라 무게가 더욱 무거워 졌으며 무거운 뇌를 지탱하기 위해 인간의 척추는 구부정한 형태에서 직립 형태로 변했으며 계속되는 이주로 전 세계에 널리 퍼졌게 되었으며 지금은 가장 성공한 존재가 되었다.
간단하게 설명을 했지만 사실 수백만년에 걸친 과정이다. 우리의 먼 조상을 이 박물관에서는 물과 몇 십 센티의 거리를 두고 만날 수 있다.(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박물관에는 루시 이외에도 많은 유인원(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형태) 화석과 동물 화식을 관람할 수 있으니 아디스아바바를 방문하면 꼭 들리도록 하자.(입장료 10Birr)
저녁은 바로(Baro)호텔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길을 건너 서쪽으로 한 블럭 가면 ‘Isola Verde Pizzeria’가 보일 것이다. 이탈리안 식당인데 피자, 라자니아 등 이탈리아 음식을 정말로 부담 없는 가격(15~22Birr)에 먹을 수 있을 것이다.
15Birr(1600원 정도)짜리 피자를 시키니 우리 동네 피자가게 미듐 사이즈 피자가 나온다. 꽤 맛있음으로 피아사에 머무는 여행객을 꼭 들러서 먹어보길 바란다.
아직 몸살의 여독이 가시지 않았지만 에티오피아의 역사와 현재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유익한 날이었다.
1월 21일(일)
내가 있는 방이 타이투 호텔의 가장 싼 방이라서 그런지 침대가 지저분하다. 덕분에 며칠 지내면서 벼룩과 빈대에 물려 온몸이 간지럽다.
토모미는 어제 시내의 온천 사우나에 갔었는데 너무 좋았다면서 나보고 꼭 가라고 한다. 오늘의 목표는 온천 사우나를 하는 것이다.
피아사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암바사(이렇게 말하면 다 알아들음)로 간 다음 Yohanis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300m 정도 걸어가니 Filwoha Hotel이 보인다. 주변에는 많은 차들이 정차해있다.
오랜 여행으로 온몸이 땀과 피곤에 절은 여행자들이 아디스아바바에 오면 꼭 들려야할 장소이다.
이곳 온천은 네 클래스로 나뉘는데 4번째 클래스인 샤워가 6Birr, 퍼스트클래스(개인 목욕탕)는 12Birr이다. 사우나는 24Birr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퍼스트클래스에서 온천욕을 즐긴다.
문제는 저렴한 가격이라 현지인들도 무척 애용을 한다는 것이다. 요금을 내자 대기번호표를 주더니 기다리라고 한다.
적어도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기에 그 시간동안 어제 다 못한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가까운 곳에 Dreg Monument로 갔다. 거대한 탑 위에는 붉은 별이 달려 있고, 아래에는 전쟁을 하는 사람들의 부조가 보인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탑니다. 공산주의를 기념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La Gare역으로 갔다. 역 근처에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기념하는 Lion of Judah Monument가 보인다. 멋진 사자 형상이 아디스아바바 시내를 포효를 하며 쳐다보고 있다.(바로 아래 거지들이 잠을 자고 있어서 좀 안타까웠다.)
La Gare역은 아디스아바바에서 지부티로 연결되는 철도의 종착역으로 프랑스인들에 의해서 지어졌다.
역사는 낡았으며 철로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한나라 수도의 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
이곳에서 지부티로 가는 열차는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출발하고 곧바로 지부티로 가는 것이 아니라 Dire Dawa까지 가서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지부티로 가야 한다.
역에서 Meskal 스퀘어로 가니 축구 선수 스티커를 파는 잡상인들이 쭉 늘어서 있다. 전에도 이이기 했지만 이곳의 프리미어 리그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찔러서 많은 청년들이 좋아하는 스타의 사진을 지니고 있다.
혹시나 해서 살펴보니 박지성 사진도 있다. 몇 장 없기는 하지만 세계적인 스타 속에 당당히 자리한 박지성 사진이 같은 한국인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웠다.
아프리카전당(Africa Hall)에 가니 휴일이라 그런지 문이 굳게 닫혀있다. 공원에는 모든 아프리카 국기가 걸려있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아프리카 전당이 한 때 아프리카의 중심이었던 에티오피아의 옛 영화를 보여준다.
시내를 둘러보고 Filwoha Hotel로 돌아가니 아직 1시간 이상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내 번호는 325번인데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돌아가는 청년이 번호를 바꿔줘서 285번으로 번호가 앞서게 되었다. 그래도 앞에는 60명이 대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시내를 나서 워커힐 호텔 쪽으로 나섰다. 이 나라에서 가장 고급호텔인 워커힐 호텔 앞에도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삐끼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공원 쪽 도로로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곳이 아디스아바바의 뷰(View)포인트인 것 같다.
공원으로 들어서려고 했지만 문이 잠겨 있고, 북쪽의 역사박물관(History Museum)으로 갔지만 점심시간이라 개점휴업이다.
점심시간이 10분이 지나도 열 생각을 안 하기에 다시 Filwoha Hotel로 길을 나섰다.
대기표를 받은지 3시간 정도 지나서야 온천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만족..
널찍한 개인 룸에 아파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욕조가 있고 찬물, 더운물도 펄펄 나온다. 주어진 시간은 45분..
최대한 온천욕을 즐기기 위해서 시간을 아껴야 한다. 일단 옷을 훌딱 벗고.. 최대한 물을 세게 틀어 욕조를 채웠다.
빈대에 물려 몸 여기저기에 빨갛게 부어오른 자국이 많다.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니 ‘어’하며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시간이 야속하게 빨리 간다는 느낌이 든다.
온천욕을 끝내고 숙소가 있는 피아사 거리로 돌아왔다. 이제 아디스아바바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저녁 시간에는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는 영화 ‘괴물’을 보았다. 작년 한해 최대 흥행작인 영화 괴물을 보면서 잠시 한국어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여러분은 괴물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무엇인가?
지금 난 영화 속에서 온 가족이 모여 김밥, 컵라면을 먹는 장면과 마지막 부분에 송강호가 아이에게 맛있는 밥을 퍼주는 장면이 인상적이며.. 어린 아역배우가 괴물에게 빠져나가면 먹고 싶은 음식을 계속 말하는 부분이 참 공감이 간다.
그만큼 한국음식에 굶주려 있다는 뜻이 되겠다.
에티오피아 북쪽을 여행한 후 곧바로 지부티로 빠지는 여정을 계획했는데 어떤 여행이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