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월)
오전 7시에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생각보다 꽤 괜찮은 아침식사이다. 빵을 메인으로 한 온갖 요리는 물론 훈제 연어까지 제공이 되었다. 숙소비는 20유로인데 아침으로 다 뽑은 느낌이다.
그리고는 곧장 짐을 싸서 공항으로 가기 위한 기차역으로 갔다. 벨기에는 높은 위도지역이라 8시가 되어도 깜깜한 새벽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중앙역에서 공항기차표를 끊고 기차를 기다리는데 수많은 기차가 지나간다. 다행히 친절한 청년의 도움으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오지여행을 많이 한 나도 선진국 기차에 쩔쩔맨다.
다카르행 항공을 타기 위해 브뤼셀 항공 직원에게 창문 좌석을 달라고 하니 직원은 자리가 없다고 한다. 아울러 오늘 비행기는 완전히 꽉 찼다고 이야기한다.
비행기에서 좌석에 앉으니 한 흑인이 자리가 있다고 한다. 좌석번호 31C라 31열의 세 번째에 앉았는데.. 확인해 보니 두 번째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좌석이 B가 생략된 채 A 다음에 곧장 C이다. 이유가 뭘까?
옆자리에는 백인 할아버지가 내 옆자리에 앉았는데 감비아를 여행한다고 하시는데, 이륙을 하고 영어로 된 입국카드 작성하시면서 어떻게 쓰는 건지 나에게 물어보신다. 입국카드 쓰는 방법을 대략적으로 알려드렸다.
브뤼셀 항공은 그야말로 서비스가 최상이다. 개인마다 터치스크린 기능이 있는 모니터가 탑재되어 있다. 비행기 거리와 루트를 알려주는 Air Show는 브뤼셀 항공이 최고다. 구글 입체맵을 활용을 해서 여러 시점으로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알려준다. 점심식사는 메인메뉴와 셀러드를 제공해주는데 맛이 최상이다. 음료서비스는 3번씩 하고 나중에는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까지 제공한다. 주는대로 먹으니 배가 부른다.
기내식 서비스가 “이렇게 하고도 더 먹을 수 있어?‘ 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예정시각보다 1시간정도 늦읁 오후 5시경 다카르에 도착했다. 2008년 이후 6년 만의 서아프리카이다.
다카르는 서아프리카의 중심도시 중에 하나로 공항 규모가 클 줄 알았는데, 우리의 중소도시 터미널만하다. 비행기에서 내려 곧장 입국수속을 밟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인과 유럽인은 세네갈 비자를 받지 않아도 되었는데, 이제는 모든 외국인이 인터넷으로 비자를 신청해서 받아야 한다. 중간에 감비아를 거쳐서 세네갈로 다시 입국하기 때문에 비자를 2개를 신청했다.
공항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2개 비자를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지 문의하니 왜 2개를 가져왔나는 표정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세네갈 한 가운데 있는 감비아는 세네갈 비자를 하나로도 여행이 가능할 것 같지만 서아프리카에서의 비자 정보는 확실치 않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항에서 비자 2개를 받았다. 덕분에 입국 심사를 제일 마지막으로 통과했다.
비자를 받고 짐을 찾으러 가는데 공항 직원이 세관을 무사히 통과시키게 해 준다며 돈을 요구한다. 뭐.. 서아프리카는 여전하군. 변한 게 없어^^ 일단 무시.
다카르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것은 택시로 가능한데 공항에서 타는 것 보다는 공항에서 벗어나 도로에서 택시를 잡으면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다. 어느 공항에서나 적용되는 진리이기도 하다.
3일 전 예약한 숙소에서 메일이 왔는데 다카르 공항 픽업을 15,000CFA에 해준다고 했다. CFA는 세파프랑으로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의 화폐이다. 주로 프랑스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쓰는 화폐로 우리 돈으로 환산하려면 CFA에 2.2를 곱해주면 된다. 즉 픽업이 33,000원 정도 된 셈이다.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세워 숙소 근처 지역까지 2,000CFA로 가기로 했다. 세네갈은 우리에게는 축구로 잘 알려진 나라이다.
2002년 월드컵 개막전에서 당시 우승후보였던 프랑스에 승리하는 이변을 연출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세네갈 역사를 살펴보면 9세기에 세네갈강 유역에 투쿨로르족이 정착하였고 11세기 중엽 북쪽의 제나가족(모리타니의 베르베르계 종족)이 이슬람교를 전파하였다. 모로코를 중심으로 한 알무라비트왕조(1050년대 말~1140년대 말)가 이 지역까지 지배했다가 1444년 포르투갈 항해자가 베르데곶을 내항하였다.
포르투갈은 세네갈 하구와 다카르항 앞바다에 있는 고레섬 등지에 무역기지와 가톨릭 포교기지를 건설하였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도 진출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밀어내었다. 1633년 창립된 프랑스의 세네갈 회사는 1659년 생루이에 상관을 설치하고 1677년에는 네덜란드로부터 고레섬을 빼앗았다.
영국은 감비아강 유역에 기지를 설치하여 17~18세기의 세네갈 지역은 영국·프랑스 간에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전쟁이 시작되어 모든 프랑스 기지는 영국에 점령되었다. 1816년 고레섬과 생루이가 프랑스에 반환되면서 프랑스는 주변의 식민지화에 노력했으며, 강력한 팽창정책을 취하여 내륙의 프랑스 식민지화가 추진되었다.
1895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가 하나의 통치단위가 되고 생루이가 수도가 되었다.
1902년에는 수도를 다카르로 옮겼으며 1908년 건설이 완료되면서 다카르가 서아프리카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쳐 ‘블랙아프리카’의 정책의식이 고조되면서 세네갈은 다른 프랑스령 아프리카 국가와 함께 1946년 프랑스연합 내의 해외 영토가 되었다가 여느 아프리카 국가처럼 독립을 하였다.
숙소 주변인 Yoff 지역에 도착하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해변에서 운동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축구는 이곳을 비롯한 아프리카 젊은이들의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해변 여기저기서 축구를 하고 트레이닝을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여기서 몇 명이나 유럽에 가서 성공을 할까?
숙소는 Ker Jahkarlo이며 Hostel.com으로 예약했으며 숙박료는 하루에 7,000CFA이다. 다카르에서 가장 싼 곳이 싶다. 거기에다 와이파이까지 된다. 단지 숙소를 찾는 것이 힘든데, 간판이 없기 때문에 여행을 많이 해 본 나 역시도 숙소를 찾는데 헤맸다.
주인장에게 환전 할 곳을 물어보니 근처의 주유소에서 하면 된다고 안내해준다. 주유소에는 작은 마트도 겸하고 있기에 필요한 것들도 살 수 있었다. 주유소 환전은 1유로에 650CFA이다.
세네갈에서의 첫째 날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내일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불확실한 요소인 시에라리온 비자를 시도해보려고 한다. 과연 비자를 받을 수 있을까?
1월 14일(화)
오전 7시에 일어나서 해변을 둘러보았다. 어제 저녁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해변에서 운동을 하는데 그 수가 1,000명은 넘는다. 아름다운 대서양의 우렁찬 파도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오늘 미션은 시에라리온 비자를 받고 고레섬과 장미 호수를 들리는 것이다. 다카르는 아프리카의 서쪽 끝 베르데곶에 있는 무역항이자 국제도시이다. 일찍이 ‘아프리카의 파리’라고 할 정도로 시가지는 프랑스화 되어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 및 라틴아메리카와의 교통상 요충지가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서아프리카의 상업·금융·정치·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444년 포르투갈 항해자가 발견 한 이후 16세기 말부터 프랑스·영국·네덜란드 등 3국이 쟁탈 끝에 1659년 아프리카 최초의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1857년 프랑스의 군사기지로서 건설되었다. 1887년 자치제가 되었고, 1902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전체의 수도가 되었다. 1960년 서아프리카의 모든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세네갈의 수도가 되었다.
다카르는 베르데곶 전체에 걸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여행자 입장에서는 둘러보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지만 교통 체계를 알 수 없기에 이용이 어렵다. 오전에 시에라리온 대사관에 가봐야 하기 때문에 택시(2,500CAF)를 이용해 다카르 중심으로 이동했다.
독립광장(Pl de Independance)에 내리니 한산한 모습이다. 시내 중심인데 인적이 드물다니.. 청년 한명이 쫓아와 돈을 달라고 한다.
근처의 시에라리온 대사관에 가니 경비원이 오늘은 대사관 문을 열지 않고 내일 연다고 한다. 화요일인데 문을 닫다니.
시에라리온 비자는 다음으로 넘기고 근처의 선착장으로 가니 마침 고레섬으로 가는 페리가 떠나려고 한다. 왕복 5,400CAF내고 페리에 탑승했다.
페리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다카르의 모습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눈에 들어온다. 번잡한 도시에서 잠시 벗어난 느낌이다.
다카르에서 3.5km 떨어진 고레섬(Gorée)은 15세기~19세기에 아프리카 연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프랑스에 의해 연달아 지배를 받은 곳이며 노예무역상의 대저택과 노예들의 막사가 있다. 약 20,000,000명으로 추정되는 아프리카인들이 15세기 중기와 18세기 중기 사이에 이 섬을 거쳐 갔다.
지리학적으로 북과 남 사이의 정중앙에 있는 고레 섬은 훌륭한 전략적 위치 덕분에 이곳에 정착하는 선박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 준다. 그래서 ‘좋은 정박지(Good Rade)’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15세기부터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 의해 단기 체류지로 이용되거나 노예시장으로 끊임없이 포획당해 왔다. 내륙 지역에서 노예를 축출해낸 ‘호모덕스(homeoducs)’의 첫 번째 종착지인 고레는 노예무역을 장악한 유럽국가 간의 경쟁의 중심지였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노예무역을 폐지할 때까지 고레는 수십 채의 노예 막사가 넘쳐나는 창고였다.
땅덩어리인 고레 섬은 15세기~19세기에 아프리카 연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30분이 지나 고레섬에 다다르니 예전에 아픈역사와는 달리 평화로운 모습이다. 작은 섬이기는 하지만 다카르는 물론 주변 지역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인 관광객들을 따라 섬을 둘러보았다. 집들과 골목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놀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볼 수 있다.
남쪽에는 봉우리가 있는데 정상에는 성이 있다. 성보다는 군사기지에 가깝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길거리 미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 팔고 있다. 괜찮은 작품도 많지만 아직 많은 여행길이 남은 이상 감상만 했다.
정상에는 거대한 대포와 벙커가 있는데 대부분이 현지 사람들의 숙소나 가게로 이용이 되고 있다. 정상에서 다카르 시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배를 타고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맞아주는 곳이 해안의 성채이다. 예전에는 군사시설 및 노예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역사박물관(IFAN Historical Museum)으로 단장하였다. 500CFA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사진 자료를 비롯해 노예 무역시대의 시대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대의 자료를 전시한 것은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건물은 고레섬의 랜드마크임에도 서양 관람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현지 관광객들만 보인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노예의 집(Maison des Esclaves)이다. 1776년 네덜란드에 의해 세워진 ‘노예의 집(House of Slave)’은 고레에 마지막으로 남은 노예의 집이다.
유네스코 등재 자료를 참고하면 이곳의 막사의 한 칸은 가로, 세로 각각 2.6m이며, 남자를 위한 시설로 성인 15명~20명을 수용했다. 노예들은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서 목과 팔은 사슬에 묶여 있었다. 쇠사슬의 중간에는 큰 쇠구슬이 달려 있어서 움직이려면 노예가 두 발과 두 손으로 들어 옮겨야 했다. 이 쇠구슬은 노예들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루에 한 번, 그것도 대개 같은 공간 안에서만 풀어 주었다. 위생 상태가 매우 불결해서 1779년에는 섬을 휩쓴 최초의 전염병은 이곳에서 발원되었다.
작은 막사에는 150명~200명의 노예를 수용했다. 이들은 길게는 3개월을 기다려야 배에 실려 다른 곳으로 팔려 나갔다. 아메리카로 향하는 출발도 전적으로 노예를 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었고, 대부분의 노예는 가족과 생이별을 겪었다. 어린 노예들을 수용하는 특별한 방도 있었는데, 이곳의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 젊은 여성 노예들은 다른 여자들과 분리되어 가장 비싸게 팔려 나갔다.
기준에 맞지 않는 노예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시설도 있었다. 남자 노예의 가치는 몸무게로 결정되었는데, 최소 몸무게 60㎏이 적정선이었다. 만약 몸무게가 기준치에 못 미치면 임시 시설에 수용시켜 놓고 세네갈 니에베(niebe) 지역에서 자라는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된 콩을 먹여 억지로 몸무게를 늘렸다.
경사진 복도는 오늘날 ‘돌아오지 않은 여행’으로 가는 문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한번 이 문을 통해서 바다로 끌려간 노예는 아프리카와 영영 이별했기 때문이다. 그 바로 바깥에는 야자수 나무로 만든 부두가 있어, 짐 싣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일부 노예들은 배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다에 뛰어들어 도망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도망친 노예들은 멀리 갈 수 없었다. 경비대가 쏜 총에 맞거나 상어에게 바로 잡아먹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프거나 부상당한 노예들은 바다에 던져져 상어를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었다.
노예 상인들은 이 계단의 발코니에 기대서서 노예를 바라보며 근육 값을 매기고 품질을 논의했다. 각각의 아프리카 민족에 따라 그룹을 정해놓고 그룹에 따른 시세와 세분화된 분류를 하였다.
이런 아픈 역사를 쭉 기억을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 그렇기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했다.
고레섬을 둘러보고 배를 타고 다카르로 돌아오니 정오가 되지 않았다. 장미 호수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니 도통 오지를 않는다. 정류장의 현지인들도 버스가 오지 않기에 택시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이동을 한다. 일단 장미호수는 포기~ 시장을 둘러보고 국립박물관으로 가니 오늘 휴관을 한다. 오늘 무슨 일이 있나? 나중에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니 오늘이 국가기념일이라서 휴일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시에라리온 대사관부터 박물관까지 허탕을 쳤으니..
시내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지역으로 가려고 하는데 도통 버스편을 찾을 수가 없다. 택시를 타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내일도 택시를 타고 시내로 와야 한다. 오늘 반드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른데 결론은 주인장이 알려준 2번 버스는 거의 없는 편이고 23번 파란버스를 타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수소문을 한 끝에 23번 버스를 발견했다.
오늘의 한 가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숙소 부근에 에코르 졸(Ecole Dior) 사거리에서 내려 숙소로 가면 된다. 혹시 Ker Jahkarlo 숙소를 이용 할 여행자는 참고 할 것. 아마 다카르에서 하루 7,000CFA에 이용할 수 있는 숙소는 없을 것이다. (단 도미토리 가격임) 숙소는 와이파이가 잘 되었기 때문에 Lonely Planet 사이트로 들어가 시에라리온 비자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았다. 시에라리온 비자 취득은 서양 여행자들에게도 까다롭고 시간이 최소 2~3일은 걸린다. 단 감비아 반줄에서는 쉽게 나온다는 정보가 있다. 좀 더 살펴보니 몇몇 여행자들이 감비아에서는 쉽게 받은 것을 확인했다.
대사관의 비자업무는 대부분 월요일부터 목요일가지만 하니까 수요일인 내일 이동을 하고 감비아 반줄에서 목요일에 시에라리온 비자가 당일에 가능하다면 취득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카르에 더 머물면서 시에라리온 비자를 신청할까도 고민을 했지만 확실한 정보를 믿기로 했다. 어쨌든 서아프리카는 항상 비자 문제가 여행자들을 괴롭힌다.
하지만 그런 변수를 해결 할 때마다 짜릿함을 가져다주는 것이 오지 여행의 매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