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있다. '~가 좋았어요'... 이러한 말은 여행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럼 과연 좋았다는 이야기는 주로 어떤점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경치라던지 특별한 유적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동티벳도 그와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동티벳을 두고 좋았다고 하면 먼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곳은 때묻지 않은 곳이고 언제나 새로운 경험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매일 걷게 되는 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외국인 금지 구역이라서 언제 잡힐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 되다 보니 빨리 빠져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너무 앞섰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든다. 8월 19일 개강을 티벳 제 2의 도시인 참도에서 맞게 된다. 이곳을 여행하면서 항상 생각한 것은 정말로 사람들이 순수하다는 것과 상상할 수 없이 환상적인 경치들.. 언젠가 한번은 더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2003년중에 쿤밍~라사~카일라스~카스 구간을 꼭 횡단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겨 놓은채 나의 첫 해외여행은 끝을 맺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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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수의 동티벳 여행기 1(바이이, 세킴라 고개) 8월 9일(금) 라싸에 온지도 벌써 1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라싸에서의 강행군으로 잠들어 있을때 보연이 형이 깨웠다.
보연이 형과 라싸에서 알게된 여자애들 3명은 동티벳으로
갈려는 나와는 반대 방향인 서부 티벳 알리로 간다고 한다. 여행에 있어서 안되는건 없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고생을 많이 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기
전에 나와 조장을 같이 갔던 선생님 한분이 태양초 고추장 1통을 나에게 주셨다. 그러면서 조심하라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동티벳의 첫 관문인 링쯔로 가기위해서는 일단 링쯔에서 18킬로 정도 떨어진 바이이시로 가야 한다. 바이이시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도
여러대 있으며 거리는 400킬로가 조금 넘는다. 요금은 80위엔이다. 라싸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난 불법여행자(지금도 허가증이
없지만..)이 되기 때문에 행동을 조심해야 된다. 라싸에서 바이이시의 길은 정말로 포장이 잘되 있었다. 그리고 운전기사를 잘
만나서 그런지 버스가 엄청나게 빨리간다. 내 옆에는 라마가 앉았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혹시나 신고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말을 한마디도 안했다.
바이이로 가는 길은 라싸에서 보았던 풍경과 정말 다르다. 아름다운 정글이 펼쳐져 있고, 산은 온통 초록 빛으로 물들어 있다. 경치를 감상하면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지나친 경계심 때문일까? 외국인 관광객 티를 내지 않을려고 일부러 찍지 않았다. 쓸데없이 주목을
끄는 행동은 금물이기 때문이다. 6시간 정도 달려서 바이이시에 도착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바이이시는 생각보다 발전이
되어 있었다. 시의 대부분의 구성원이 한족이고 물자도 풍부해 보였다. 일단 숙소를 찾았다. 라싸에 있을때 함께 있었던 센쳉이 메모해준
초대소로 갔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숙소를 찾으려 헤멘지 1시간..
땡잡았다고 생각하고 여장을 풀은후 배를 채우러 다시 나갔다. 한 식당에서 수샤오즈(물만두 5위엔) 미판(밥
1위엔)과 아침에 얻은 고추장으로 배불리 먹었다. 호텔에서 북경에서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 3명을 만났다. 그들은 걸어서 여행을
한다는데 나와는 루트가 좀 달랐다. 그 외에는 전혀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할수 없다.. 직접 부딧치는 수밖에..'
일단 오늘 지도상으로는 동쪽 티벳을 반정도 온것이다. 시작이 반이고 또 지도상으로 반이나
왔으니 벌써 3/4이라는 생각을 했다.(얼마안가 이 생각을 처절하게 후회함) 8월 10일(토)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출발했다. 18킬로 떨어진 링쯔로 가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링쯔로 가는 버스가 없다. 할 수 없이 강을 따라 길을
갔지만 길을 잘못들었다. 다시 바이이시로 들어와서 아스팔트길을 걸었다. 그러니 제대로된 길을 찾을수 있었다.(진작 아스팔트길로 갈걸..)
알고보니 바이이와 링쯔는 버스가 다니지 않고 미니 봉고 차량이
지나다니고 있었다(5위엔). 링쯔에 도착을 하니 바이이와 상대가 되지 않을정도로 초라했다. 같이 봉고를 탔던 중국여인의 도움을 받아서
링쯔의 정보를 얻었다. 링쯔에도 사찰이 몇개 있지만 중국여인은 별로 볼게 없다고 했다. 그 여인은 너무나 친절해서 내가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기 길을 갔다. 중국 여자들은 '이 여자가 날 좋아하나'싶을 정도로 외국인에게 친절하다.(절대아님!)
식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물만두와 밥.. 고추장을 동원해서 아주 배불리 먹었다. 링쯔에서 작은 마을인 루랑으로 가기
위해 고개를 올라갔다. 아스팔트로 되어있는 길은 이내 비포장도로로 변했다. '걸어서도 갈수 있는 거리네.. 아예 보미까지 오늘갈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싸~성도 구간을 천장공로라고
한다. 하늘의 긴 도로.. 이곳 세킴라 고개 구간은 해발 4515m가 되는 구간으로 알고보니 70킬로나 되는 무지막지한 고개이다. 이 구간은
현재 도로를 공사하고 있다. 고개를 너무 쉽게 생각한 벌일까? 올라가도 끝이 없었다. 가다가 3명의 중국 자전거 여행자들을 만날수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루랑이 가까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올라가면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고개로 올라가던 랜드크루져와 차들이
모두 다시 내려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오후 5시까지 계속해서 걸어서
올라갔고 가끔가다 여기저기서 다이너마이트가 폭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길이 끊어진 지점을
건넜다. 건너자 마자 반대편에 차들이 많이 모인것을 볼수 있었다. 이 길이 복구될려면 최소한 한달은 있어야 할거 같은데... 운전자들이
장기를 두면서 모여있는 장소로 가보았다. 운전자중에서는 영어를 할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 고개에 대한 사실을 확인할수 있었다. 지도상에
20킬로로 되어있는 고개는 사실 70킬로가 넘는다고 한다. 어쩐지 너무 길더라... 다시는 지도빨에 속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걸었다. 운전자들은 자신들과 같이 자자고 한다. 8시가 되면 완전히 어두워지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한다. 난 아직 2시간이나 남았으므로
문제 없다고 했다. 다시 길을 걸었다. 걷다가 집이 하나 보여서 거기서 잘려고 했지만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계속해서 걸어가는데 수상한 장족 2명이 날 따라오는걸 느꼈다. 갈 곳 없는 나에게 강도짓을
할려고 하나? 이렇게 생각하며 빨리 걸었다. 그렇지만 하루종일 걸은 난 너무나 지쳐서 아예 사생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그들은 나에게
다가오고 난 쉬는척 하면서 돌맹이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들이 나에게 거의 다가올쯤에 그때 2시간전에 나와는 반대 방향길이 끊어진
지점까지 사람을 수송한 랜드크루져가 보였다. 얼른 히치를 했다. 랜드크루져를 히치를 할때 돌아가는 빈차는 가격을 싸게 불러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도 어짜피 빈차가 가는것 보다는 싸게라도 돈을 받는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루랑까지 20위엔에 가기로 했다. 아까 날 따라왔던
그들도 같이 랜드크루져에 탔다. 알고보니 자신들의 공사구역으로 가는중이다. 괜히 나만 오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랜드크루져는
장족 2명을 공사구역에 내린다음 세킴라 고개 정상을 넘어서 루랑쪽으로 내려갔다. 걸어갔으면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내려가는 도중 트럭
한대가 진흙탕에 빠져 있었다. 이 트럭때문에 다른 차량들은 전혀 통과할수 없었다. 차에서 내려서 같이 도왔다. 이 트럭은 이 구간
공사차량인데 무식하게 돌을 많이 실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트럭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빠져나오지 못해다. 밑에서 공사하던 인부들을 동원해서
빼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트럭을 구조하는 도중 앳되보이는 장족에게 몇살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16살이라고 하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하루에
25위엔(3750원)을 받는다고 한다.(몸짓으로 대화했음) 16살.. 우리나라 나이로 고등학교 1학년 뻘인 이 아이는 힘든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하루에 3750원을 벌려고 위험한 절벽에서의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또한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 까지 일하는 것이다.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 그것은 같은 노력으로 얼마나 돈을 버느냐의 차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차를 구조한 시각 9시.. 다시 루랑으로 향하던 도중 마주오던 트럭운전자가 내가 탄 랜드크루져 운전자에게 무슨 말을
했다. 몇시간 전만 해도 차가 통과했는데?
마주오던 운전자와 몇번 더 이야기를 해본 랜드크루져 운전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오늘은 고개에서 자야 된다고 했다.
길이 끊긴 인접지점에서 도로공사 인부들이 자는 숙소에 차를 세웠다. 거기에는 길이 끊겨서 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도 보였다.
일단 숙소에서 국수를 얻어먹고 차에서 잤다. 차에서의 잠은 거의 최악이었다. 몸도 구부린채로 자야하고 무엇보다도 4000미터의 산이 만들어내는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밤새 추위에 시달리면서 잤다. 아니 잔게 아니라 어서 시간이 지나가라고 밤새 빌었다.
가끔가다 잠들고 추워서 다시 깨고.. 몸을 구부린채로 자서 허리는 아프고... 소변이 마려웠지만 추워서 그대로 참았다... 거의 골병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더 이상 글로 표현 못하겠슴) 그렇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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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들의 도시인 바이이시의 전경 |
세킴라 고개의 숲은 정말로 울창하다. |
길이 끊어진 지점.. 절벽위의 길이라 그런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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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수의 동티벳 여행기 2(루랑, 적과의 동침) 8월 11일(일) 추위에 시달리면서 문득 날이 밝고 있음을 느꼈다. 아.. 정말로 이렇게 힘든 밤은 처음인거 같았다.
'와!! 개고생 했다(용어상의 문제점은 이해해주길^^)'
어제 국수를 얻어먹었던 인부막사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반찬은 따로 없어서 이때는 대비해서 얻어둔 고추장으로 대충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어제 신세진 랜드크루져 운전자는 길은 오늘,내일 도저히 힘들다면서 20킬로 떨어진 루랑으로 걸어가라고 했다. 내가 감사의
표시로 루랑까지 가면 주기로 했던 20위안을 줄려고 내밀자 운전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필요없다며 다시 돌려주었다. 정말로
놀랬다. 20위안이면 이 사람한테 큰 돈일텐데.. 난 이 장족 운전자에게 작별의 악수를 하고 떠났다. 아침일찍인데도 불구하고
인부들은 도로 공사를 하고 있고 여기저기서 다이너마이트 폭팔음이 들린다. 길이 끊어진 지점은 얼마안가 볼 수 있었다. 그냥
돌덩이나 산사태가 나서 끊어진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어제 보았던 광경과 마찬가지로 30미터 정도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와.. 진짜
무식하게 길이 끊겼네..' 아까 나와 헤어졌던 운전자가 걱정이 되었다. 이건 완전히 오도가도 못한 신세가 된게 아닌가.. 가족들도
있을텐데.. 그렇다고 차를 버리고 갈 수도 없구... 참 딱했다. 20킬로라고 간단하게 생각했지만 길은 너무나 멀었다. 그렇지만
이곳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마치 태초의 에덴 동산을 보듯이 싱그러웠다. 그렇지만 곳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서 소음이 심했다.
이렇게 험한길을 중장비는 트럭 몇대 가지고 모두 수작업으로 공사를 한다. 옆에서 지켜보면 아무리 봐도 끝날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산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아름다운 집들과 여기저기서 풀을 뜯는 양, 말, 소, 돼지들..
정말로 평화로와 보였다. 루랑은 운송하는 트럭과 차들을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다. 길을 중심으로 숙소와 식당과 상점이 즐비한 작은
마을이다. 그렇지만 길이 끊어진 지금 이곳 마을은 활기를 잃은 느낌이다. 먼저 아름다운 통나무집(15위엔)에 숙소를 잡았다.
숙소를 잡고 침대에 누웠다. 어제 오늘 고생을 해서 그런지 움직이기가 싫었다. 그렇게 2시간을 가만히 침대에 있었다. 이 날부터 은 나와 함께했던 많은 아이템들을 잃어버리거나 버려야 했다. 먼저 나와 함께한 청바지는 그동안의 고생에 시달린듯 엉덩이 부분이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어쩔수 없이 버려야 했고, 빨래를 하는 도중 비누를 떨어트려 잃어버리고 비누를 찾는 도중 시계에 물이 새서 시계는 혼수상태에 접어 들었다.
저녁이 되어서 난 숙소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있는것을 창문 밖으로 보았다. 공안(경찰)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내가 있는
숙소를 중심으로 모여있다. 순간 '아.. 외국인인 내가 걸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엄연히 외국인 출입 금지구역이기
때문이다. 마침
여관 주인이 없었지만 이내 다시 들어왔다. 공안은 방안으로 들어오고 몇몇사람과 함께 내가 있는 2층으로 들어왔다. '이제
끝이구나..' 여관 주인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공안과 같이
내방으로 들어왔다. 일단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오히려 공안에게 보미시로 가는 길을 물었다. 공안은 알수 없는 말로 말하고 방안을 확인한 후
사람들이랑 같이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된거지?' 분명히 날 잡으로 온거 같은데..? 일단 궁굼했지만 난 숨죽이면서 창문 밖의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몇분있다가 공안과 몇몇사람이 짐을 가지고 내 방으로 오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여기서 잘려고
하는가 보다. 그런데 하필 왜 내 옆침대야!!!
휴.. 외국인인거 걸리면 안되는데.. 이건 완전히 적과의 동침이었다. 먼저 밑으로 내려가 공안의 보온병(여관마다 있음)을 갔다
주었다. 일단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공안은 정말로 고마워 하면서 어디서 사냐고 물어보았다. 순간 한국이라는
대답이 나올 뻔했지만 난 '지닌성 조센족(길림성 조선족)'이라고 대답을 했다. 이곳에서는 장족들도 중국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소수민족인 내가 중국어를 잘 못하는건 당연하다고 공안도 생각했나 보다. 인상 좋은 아저씨를 연상하게 하는 그는 나에게 흥미를
느꼈는지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 준다. 자신의 이름보다도 앞면의 한문으로 '공작'이라는 것을 강조를 한다. '공작이 뭐지?' 생각을 해보니
내가 어렸을때 반공만화를 보면 북한 간첩을 흔히 '공작원'이라고 했다. '아! 정보쪽에서 일하는 구나..' 군대와 마찬가지로
경찰에서 정보분야에 근무하는것은 막강한 파워를 지닌다. 그는 나에게 그걸 강조하는 것이다. 그 공안은 52년생이고(울 엄마랑 동갑)
티벳에서 26년간 근무를 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걸 보니 내가 외국인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다.(일단
성공..) 그래도 정보분야에 근무하는 만큼 행실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안은 라싸로 가는 중이고 나에게 길 사정을
물어 보았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니 여관주인이 혹시 한국인이 아니냐고 물어보길래 난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을 했다.(역시 포커
페이스^^) 이럴때는 빨리 자는게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잠들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도중 근처의 나이트(나이트라 말할수
없을정도로 허름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유심히 들었다. 내 옆의 공안이 코를 곤다. 일단은 안심을 했다. 적과의 동침은 이렇게 마감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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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루랑을 향한 길은 역시 산사태로 막혀 있었다. |
세킴라 고개에서는 주로 침엽수가 주를 이룬다. |
루랑에 거의 다다를 때쯤에는 평화로운 수목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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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수의 동티벳 여행기 3(보미) 8월 12일(월) 날이 서서히 밝고 어제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일찍 잤던 탓인지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내
옆침대에 있는 공안이 착해보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경험의 갈망과 또한 위기를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빨리 출발을 할려고 준비를 했다.
여장을 다 챙기고 떠나려고 하자 막 깨어난 공안이 내 손을 잡으며 등을 토닥이며 30초동안 이야기 한다. 난 거기서 딱 3단어만
알아들었다. '니(너)............따이세성(대학생)........중궈어(중국어)' 분위기와 그의 표정을 봐서 추론하건데 '너
대학생되면 중국어 잘해라'라고 하는것 같았다. 와.. 나 고등학교 졸업한지 6년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는 날 고등학생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상하다.. 중국에서는 중국어를 못하면 대학을 못가는데 어떻게 대학에 들어갈거라 생각을 했을까? 이러한 의문을 품을채
떠났다. 잠시 걸으면서 내린 결론은 내가 고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티벳 여행을 하는걸 보고 공안에게 부잣집 아들로 비춰졌으며 중국에서는 돈이
많으면 대학을 쉽게 들어갈수도 있을거라는 나름대로의 추론을 했다. 오늘의 목표는 160킬로 정도 떨어진 보미시이다. '어제까지의 고생은 다 잊어버려!!(개그콘서트 갈갈이
버전)' 이렇게 주문을 외우며 걸어갔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도로공사는 쭉 이어지고 있었다. 일단 오늘 차가 20대정도 지나가리라 예상을 하고 계속
걸었다. 한 1시간쯤 걸으니까 랜드크루져 한대가 지나간다. 일단 첫차는 바쁜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의한 지나쳐 주었다. 그 다음은 버스가 지나간다. 그런데 이 차는 얼마 못간다는 싸인을 보낸채 지나간다. 다음은 트럭 2대.. 이렇게 4대가 지나간 다음에 차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멋진 경치를 감상한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은 흐려지기 시작한다. 1시간을
걸었다... 2시간.. 3시간.. 이건 완전히 국토순례가 된 느낌이다. 그때까지 차가 한대도 안지나갔다. 일단
12시가 되자 비상식량(미숫가루)을 물에 풀어서 마셨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출발한지 얼마안가 트럭3대가 보였다. 첫번째 트럭이
내가 특별한 싸인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저절로 멈춘다. 그러면서 나보고 타라는 것이다. '아싸 땡잡았다..' 트럭을 탄
찰나.. 카메라가 없다는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허전하러라 했더라. 아쉽지만 트럭운전사에게 다시 내려달라고 하고 카메라를 찾아나섰다.
그런데 카메라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마 아까 점심을 먹을때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저번에 파키스탄 국경을 넘을때의 기분이 생각이
났다. 그때 여행을 계속할까 말까 고민을 했었지만 선택은 티벳으로의 여행이었다. '좋아 카메라는 아깝지만 잊어 버리자.' 일단
배낭에서 비상용으로 대비해둔 1회용 카메라를 꺼냈다. 이상하게 어제부터 여태까지 나와 함께했던 아이템들을 많이 분실을 했다.
청바지, 비누, 카메라를 비롯해서 시계는 어제 물에 젖어서 현재 혼수상태에 있었다. 걷다가 검문소를 보게 되었다. 일단
포커페이스로 검문소앞을 유유히 지나쳤다. 경비를 보던 군인은 한번 쳐다보더니 신경쓰지 않는다. 아마 중국인 여행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30분쯤 더 걷자 봉고차 한대가 지나간다. 당연히 히치를 하고 사람좋게 생긴 장족운전자는 루랑에서 40킬로 정도 떨어진
퉁메까지 태워다 주었다. 통메는 중앙에 다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이 몇채안되는 마을이다. 관광거리는 있을리가 없는게 당연하지만 이곳은
경치자체가 그림이다. 통메에서 다시 걸어갔다. 그런데 차가 지나가지 않는 것이다. 계속 걷다가 여태까지 나와 여행을 같이한
등산화에 물이 샘을 느낄수 있었다. '너도 이제 갈때가 되었구나' 일단 등산화를 버리고 샌달 체제로 전환을 시켰다. 한결
편해졌다. 10분정도 걸으니까 뒤에서 지프차한대가 보였다. 얼른 히치를 했는데 그 차는 날 무시하고 그냥 지나갔다. 정말 다행이었다.
알고보니 그차는 중국군 차량이었던 것이다. 다시 5분정도 지나자 트럭이 한대 지나갔다. 당연히 히치를 했다. 트럭 뒤에서 시원스러운
계곡과 함께 바람을 가르며 감상을 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만년설이 멋져 보였다. 그런데 트럭이 가는도중 멈추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아까 지나쳤던 지프차를 중심으로 무장한 중국군 여러명이 무언갈 하고 있었다. '혹시 날 잡을려고 하나' 일단 트럭뒤에 움크려서
숨었다. 트럭은 다시 출발하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나를 내려 주었다. 벌써 4시가 다 되가고 있었다. 이러다간 보미는 고사하고
잠잘곳도 못 구하는거 아냐.. 그 때 뒤에서 차소리가 들린다. 다시 히치를 할려고 보니까 아까본 중국군 차다. 벌써 3번 마주쳤다.
걷다가 첸?마을(이름을 자세히 모름)에 도달하기 직전에 검문소가 보였다. 또한 그 검문소에는 이미 3번 마주친 지프도 보였다.
중국군 3명이 날 좌시하는 가운데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바로 앞의 한자 간판을 자세하게 읽는 척 하면서 지나쳤다. 순간의 일이었지만 꽤
효과가 있었다. 한자 간판을 잘 읽는척 해서 그런지 그들은 날 제지 하지 않았다. 5시.. 생각해 보면 2번을 빼놓고
하루종일 걸었다. 차가 지나가지 않는 이유는 아마 세킴라고개가 막혀서 그런거 같다. 필사적으로 히치를 했다. 다행히 차는 보미까지 가는 랜드크루져이다. 운전자는 장족이고 타고있던 구성원모두
장족들이다. 그들은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처음 본다면서 무척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일단 차는 1시간정도 가더니 당미에서
내린다. 당미는 마을이라기 보다는 그냥 절벽 옆에 붙어있는 집 몇채가 전부였다. 여기서 저녁을 먹고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수를 시켜먹었는데
무척 짜고 맵지만 무척 맛있다. 이곳 티벳인들과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입맛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풋고추를 가져오길래
아무렇지도 않게 먹으니까 무척 신기해 보였나보다. 티벳사람들은 풋고추를 소금에 찍어서 먹는다. 내가 갑자기 장족이라는 명칭에서
티벳으로 바꾼 이유는 내가 동행자들과 이야기를 할때 장족이라고 하니까 자신들을 티벳탄으로 불러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차는
다시 출발을 했다. 아까 보았던 군대지프가 우리차를 추월을 했다. 벌써 오늘들어 4번째 만남이다.^^ 큰 다리가 보였다. 이곳에는 좀 까다로운듯한 검문소가 보였다. 다행히 운전자는 이곳
군인들과 잘 아는 사이인거 같았다. 난 일부러 자는 척 하면서 귀찮다는듯 외면했다. 결과는 무사통과.. 다리 반대편에도 검문소 비슷한게 있지만
이미 검문을 받아서 그런지 신경쓰지 않는다. 30분정도 진행하던 차는 갑자기 멈추더니 농가로 들어간다. 티벳탄 농가인데 여기서
잠쉬 쉬면서 술을 먹고 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티벳탄들의 보통 농가모습을 볼수 있었다. 동물들은 거의 풀어서 방목을
시키는 모습이 정말로 평화로와 보였으며 특히 내부는 큰 화로를 중심으로 구성이 된게 이색적이었다. 단지 벽면 중앙에 모택동 사진이 있는게 좀
거슬렸다. 티벳탄의 술은 정말 맛있다. 그들은 '산주'라고 하면서 나한테 술을 권했는데 약간 신맛이 나기는 하지만 막걸리 약간
비슷했다. 처음에는 운전자에게 술을 먹이지 않을려고 많이 마셨지만 술 자체에 매력을 느껴서 많이 마셨다. 정신이 헤롱한 가운데
티벳탄들의 대화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랑 동행한 아저씨가 슬픈 이야기를 하는듯했다. 그러자 집주인을 비롯해서 운전자까지 모두 안타까워
하면서 눈물을 글성이는 것이다. '참 순수한 사람들이구나. 다른사람의 일을 같이 슬퍼할줄 아는 순수한 사람이다.' 창밖으로 저
멀리 설산에 산사태가 일어나는것이 보였다. 어두운 그의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난 지금 외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티벳탄들에게는 목숨이 걸린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본 것이다. 밤이 되었다. 술집에서 한명이 더 동행을 하게 되서 차 구성인원은 5명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맥주를 마시며 여행을 즐겼다. 드디어 오늘 목표로 했던 보미시에 도착을 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웅장한
산 밑의 도시..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랜드쿠르져 운전자는 처음에 50위엔을 줄것을 요구했지만 내가 '에이^^ 워
마 한궈 따이세성(에이 난 한국 대학생인데..)' 이라고 하니까 30위엔으로 깍아준다.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대학생이라서 그런가? 무엇때문에
깍아준지는 잘 모르겠지만 티벳탄들의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마오쩌둥에 대해서 물어보았던 청년이 나에게 차를 같이 마시자고 권했다.
따라가서 우유(양젖)를 대접받았다. 그는 나에게 무언가 말할려고 했지만 아까 반성을 한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뭔지 안다.. 그냥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이루어 질거다(몸짓으로)'라고 이야기 했다. 그는 고맙다고 나한테 이야기 했다. 술 취한 상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광장옆 여관에 방을 잡았다.(15위엔) 취한 상태에서 싼 방을 무리없이 구할수 있다니.. 오늘도 역시 많이 걸었다. 사진기가 없어서 사진을 많이 찍지 못한게 아쉽기는 하지만 티벳농가에 직접들어가서 그들의 생활과 표정을 본것이 큰 수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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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랑에서 출발하자 울창한 숲으로 설산이 보였다. |
작은 마을인 통메에서..(이미 나의 모습은 처참한 상태) |
검문소가 있는 다리.. 여기서는 우회할 방법이 없다. 난 무사 통과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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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수의 동티벳 여행기 4(라웍쵸) 8월 13일(화) 어제 무척 많이 걸어서 그런지 아침에 다소 늦게 일어났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일은 잃어버린 카메라를 보충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사진은 귀중한 자료로써 남기 때문이다. 아침에 바라본
보미시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사방으로 눈이 덮힌 설산들이 보이고 보미시 중앙에는 비교적 큰 하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곳에도 사진기를 팔까?' 이런걱정을 했지만 이내 가전제품점에서 사진기를 찾을 수 있었다. 거기서 본 사진기는 정말이지
구식이었다. 장난감인지 사진기인지 구분이 안가는 사진기가 150위엔(22500원)이나 하는 것이다.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사진기를 샀다.
사진기에 필름을 채우고 보미시를 둘러보는 도중에 사진관이 하나 보였다. 혹시나 해서 아까산 사진기의 가격을 물어보니까
65위엔이다.. 무려 85위엔씩이나 바가지를 덮어 쓴 것이다. 다시 여관에 돌아와서 고민해 보았다. 중국사람 특성상 분명히 환불은
안해줄거구... 결국 한가지 꾀를 냈다. 중국의 사진기에는 나중에 사진을 현상을 할때 사진자체에 날짜가 나오지 않는데 그걸 이용해서 환불
받기로 했다. 무척 호들갑을 떨면서 사진기를 산 가전제품점으로 갔다. 여주인은 무슨일이냐며 물어보길래 사진기에 날짜표시 기능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없으면 난 망한다는 표현을 썼다. 주인은 난처하다는듯 사진기를 잠시 살펴보더니 귀찮다는듯 환불을 해주는
것이다.(앗싸~) 난 더 오버해서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날짜표시 기능이 있는 사진기를 구할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여주인은
보미시에는 없을거라고 한다. 나의 이런 연기는 아마 아카데미상 후보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돈을 환불받고 아까의 사진관으로
가서 220위안짜리 사진기를 180위안까지 깍어서 샀다. 나의 가격 깍는 기술은 내가 생각해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얼굴에 철판깔고 무조건
원하는 가격을 부르면 못당하겠다는 표정으로 어느정도 깍아준다. 여관에 돌아와서 고민을 했다. 여태까지 동티벳을 여행하면서
매일매일이 고생이었다. 그래서 원래는 하루정도 보미에서 쉴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여관 바로앞의 광장에서는 많은 공안(경찰)과 군인들이
있었고 할일 없는 사람들이 군중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나를 본 사람중에 누군가 신고를 한다면...' 내 복장은 이곳
동티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반바지 차림이다. 반바지를 입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날 쳐다본다. 또한
아침을 먹으로 식당으로 들어갔을때 실수로 한국인이라고 밝혔었다. 무엇보다도 일어난지 반나절이 되지 않아서 떠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 한
것이다. 결국 오늘도 모험을 강행하기로 했다. 먼저 시장에 가서 복숭아 5개를 샀다. 보미시에서 연결되는 도로는 비교적 깨끗한
아스팔트로 되어 있었다. 오늘의 목표는 120킬로 정도 떨어진 라웍쵸라는 호수로 정했다. 이곳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중에
하나로서 경치가 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머... 여태까지 목표를 세워서 제대로 달성된적이 없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거리도 비교적 짧고 길도 좋다고 판단이 되어서 먼 저 라웍쵸에 도달한 후 편히 쉬어야 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12시 30분 먼저 히치를 위해
무조건 걸었다. 길 옆에는 잘못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할정도의 속도로 흐르는 강(구정물)이 있었고 온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차가 지나가지 않는 것이다. 간혹가다 렌드크루져나 군용트럭이 지나가는 것이다. 군용트럭을 히치하는것은 '나 잡아가세요'라고 말하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고, 랜드크루져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2시간을 걸었다. 이건 완전히 어제와 같은 상황이다.
라싸쪽으로 가는 길이 끊어졌다고 해도 보미시 자체의 물자에 대한 수요가 있을텐데.. 왜 트럭들이 지나가지 않는거지? 그 이유는 3시가
되서, 지나가는 봉고(다마스크기)의 차를 히치한 다음에 알 수 있었다. 봉고차 운전자는 한족인데 나한테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대로는
또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30위엔(4500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라웍쵸까지의 길은 '뿌통'이라고 한다.
젠장...또 길이 끊긴거구먼... 봉고차 운전자와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자꾸 물어본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에는 내가 돈을 주고 탄 경우이므로 궂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틴부동(못알아듣겠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잘 달리는 차가 비포장도로를 만나서 빌빌대는 것이다. 도중에 시냇물에 빠져서 차를 뒤에서 2번이나 밀어야 했다. 처음에는 돈을 받았다는
자체만으로 기분나빳지만 비포장도로를 운전하는 과정에서 차가 망가진것을 보고 정말이지 미얀했다. 그런데 이건 망가져도 무식하게 망가진
것이다. 차가 진행을 하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꺽이는 현상이 벌어졌는데.. 오른쪽은 바로 어마어마한 속도의 급류이다. 즉... 떨어지면 그야말로
죽음이었다. 그런데도 운전자는 태연하게 계속 운전을 하는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내려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더이상 차도 안지나가고
사람들도 살지 않는 곳이라서 '지도(운전자) 죽고싶지는 않겠지..'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렇지만 차가 오른쪽으로 급회전을 할때마다 공포감을
느껴야 했다. 처음 히치했던 지점으로 부터 60킬로 정도에 검문소가 있었다. 무사히 통과할줄 알았던 이 검문소에서 이 차는
군인에게 말을 건후 곧바로 바로앞의 군부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이 의리없는 사람들이 날 신고할려고 군부대로 들어가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재수없게 걸릴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이왕 이렇게 걸린 이상 날 태운 한족들에게 덤터기를 쒸울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차가 서자 마자 여기저기서 군인들이 반갑게 달려오는 것이다.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서 내자리 옆에 있던 신문과 편지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알고보니 이 차는 우편차였다. 각 부대를 돌며 편지를 전해주는 차 였다. 덕분에 중국군부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온 편지를 발견하면 좋아하고 오지 않았을때에 실망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난 피식 웃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군대와
똑같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여행이 금지된 이 지역을 여행하는것도 모험이라고 생각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중국군부대까지
들어오다니.. 누가 상상이랴 하리.. 10분정도 머물러 있었던 차는 이제 나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좀 미얀했다..
고작 20위엔(3000원)을 내고 나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차가.. 조금씩 망가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10킬로를 달려서 길이
끊긴 지점을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차가 도착했을때 바로 뒤에서 트럭이 왔다. 그러더니 많은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길이 막혀도
최소한의 왕래는 있는 법이다. 이번 길은 절벽이 무너져서 생긴길이 아니라 산사태로 끊어진 길이다. 산사태도 이건 완전히 대형
산사태이다. 50미터정도 되는 길을 완전히 삼켜 버렸으니... 날 위해 수고한 봉고차에게 20위엔을 준후 산사태지점을 걸어서 넘었다.
넘어가는 도중에 무모하게 이 지점을 넘을려다고 고립된 군용차량과 그 차를 구조하기 위해 동원된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
반대지점으로 나가자 트럭이 몇대 보였다. 그 트럭들 중에서 초록색 고물 화물차가 금방 출발할거 같았다. 그 차에 가자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네모난 직사각형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먼저 20대 후반으로 보이고 잘 생긴 트럭주인에게 라웍쵸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인심좋은 트럭주인은 잠시 기달려 보라고 했다. 기다리는 도중 먼가가 이상하다. 다른곳과는 달리 이곳에는 파리가
정말 많았던 것이다. 또한 트럭 짐칸에서 6명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상자에서 모래를 퍼내는데 냄새도 조금 이상했다. 일단 공짜로 타기
위해서는 약간의 봉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트럭위로 올라가서 사람들을 도울려고 했다. 날렵하게 트럭위에 올라가는
순간....맙소사!!!!!! 상자안에 있었던 것은 물건이 아니라 시체였다. 대충 상황을 파악해보니 이 트럭은 시체를
보미시까지 운반하기 위한 시체차였던 것이다. 어쩐지 이상한 냄새가 나고 파리가 득실댄다 했더라... 길이 막히자 내가 도착한 직후 도착한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이 시체 트럭에서 시체를 옮길려고 했던 것이다. 조장에서도 시체를 본 경험이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부패한 시체를
보는건 정말이지 충격이었다. 시체는 나무토막과 비슷해 보였고 파리나 벌레에게 뜯긴 살점들이 보이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시 트럭을 내려 왔다. 아까까지 상자라고 표현되었던 관에서 사람들은 무게를 줄일려고 모래를 계속 퍼내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관안에 모래를 가득 채운다는 장례문화를 하나더 체험할 수 있었다. 아까까지 내 몸에 붙은 파리들에 대해서 관대했지만
시체를 뜯어먹은 파리라는 생각에 내 몸에 붙은 경우 가차없이 마구 파리를 살생했다. 시체를 운반하고 난 후 이 트럭에 남은건 바로
시체 주위를 둘러 쌓았던 모래들이다.. 나와 운전자 또 나와 같은 생각으로 차를 탈려는 2명의 한족아저씨와 같이 이 모래들을 삽으로
치웠다. 난 공짜로 탈려는 일념으로 열심히 모래를 치웠다. 다 치우는 순간 우리 4명에게 웬지 모를 우정이 싹텄다. 드디어
차가 출발했다. 이곳은 마치 그랜드 캐년같이 깊은 계곡이다. 때문에 차는 아슬아슬하게 절벽위의 길을 지나가야 했다. 이곳에서의 경치는
한마디로 거대하다. 엄청난 절벽과 산들.. 여기서 인간은 한없이 작다는것을 느꼈다. 차로 지나치기는 아쉬운 경치들이 지나쳤다. 사진을
찍을려고 했지만 트럭 앞좌석에만 4명이 타는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인심좋은 트럭운전사는 도중에 히치하는 사람들을 모두
태워주었다. 특히 라마 2명은 이 차가 그냥 지나칠까봐 10위엔 지페를 마구 흔들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일행은 모두 웃었다.
엄청난 물쌀의 강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자 바로 라웍쵸가 보였다. 와... 정말 아름답다!!! 거대한
호수에 거대한 산.. 또한 간간히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폭포들.. 이곳이 별천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티벳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이곳
경치는 가면 갈수록 나에게 감동을 준다. 그렇지만 이곳구간 부터는 도로공사를 한참 하고 있었다.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공사..
하긴..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무척 불쌍하다 매일매일 텐트에서 숙식하며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고 받는돈이 고작 우리나라 돈으로
3750원.. 라웍쵸의 트럭기지인듯한 마을에 도착했을때 7시.. 트럭은 날 내리고 다시 파소시 방향으로 갔다. 비록 시체차였지만
날 여기까지 모셔준 고마운 트럭이었다. 라웍쵸는 그 어느곳보다도 아름다운 곳이다. 만약에 티벳이 외국인에게 개방이 되고 관광이
허용이 된다면 이 마을은 틀림없이 엄청난 발전을 했을 것이다. 이곳은 많은 차들이 혼란에 쌓여있다. 바로 길이 막혀서 그런것이리라.
길은 진흙으로 변해 있고, 차들은 이러한 길을 빠져나오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날은 쌀쌀해지고... 이때 기분을 머라고
표현할까? 마치 전쟁이 일어나는 한 도시를 방문한 느낌이었다. 일단 여기서 제일좋은 여관에 20위안(3000)을 주고 방을 잡고 식당에
가서 두부반찬에 밥을 먹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도중 중국남부에 위치한 충칭시에서 여행을 온 여행자들을 만날수 있었다. 이들은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어느정도 의사표현은 가능했다. 난 그들로 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거리가 얼마 안 될거라고 생각을 한
파소시는 이곳에서부터 90킬로나 걸린다는건 어느정도 각오했지만.. 그 구간 역시 '뿌통(불통)'이라는 사실.. 그러면서 그들은 내가 성도까지
갈려면 최소한 15일은 걸릴거라고 하면서 빨리 한국으로 갈려면 다시 라싸로 돌아가는게 더 빠를거라고 한다. 학교 개강이 6일
남았는데...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좀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속 계획했던 목적지로 진행하기로 했다.
밥을 먹고 어두운 마을을 걸으며 생각을 했다. '난 왜 이렇게 고생스럽게 여행을 할까?' '아... 빨리 편안한 집으로 가서 목욕도 하고 게임도 하고 후배들이랑 술도 먹고 싶다' 이런 온갖 생각이 들어도.. 앞으로의 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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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쌓여 있는 고봉들에 둘러 쌓여 있는 보미시 전경 |
보미시에서 약 60킬로 지점까지는 아스팔트로 길이 닦여져 있다 |
역시 이곳도 길이 끊겨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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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수의 동티벳 여행기 5(파소) 8월 14일(수) 어제 밤에 많은 차들로 뒤엉켜 혼잡하기만 했던 라웍쵸 마을은 아침이 되자 지상낙원으로 변해 있었다. 고산지대에 있으리라고 믿을수 없는 넓고 잔잔한 호수와 주변을 둘러싼 눈덮힌 설산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하루를 지내면서 여유있게 라웍쵸를 돌아다녔겠지만 양쪽길이 다 끊겨 있고, 시간도 많지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파소시를 향해서 갈 수 밖에 없었다. 라웍쵸에서 파소까지는 90킬로가 넘는 길을 가야한다. 지금 이시점에서 길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는 상태에서 분명히 곳곳에 길이 끊겨 있을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을을 잠시 둘러보는 사이 어제 나를 태워주웠던 시체차 운전자를 만났다. 우리둘은 서로 반가워서 얼싸안으며 인사를 했다. '역시 길이 끊겨서 파소까지 가지 못했구나...' 마을사람들한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파소까지는 4800미터가 넘는 고개가 하나 있으며 길은 아마 끊겼을거라고 했다. 우선 출발을 했다. 곳곳에 도로공사를 위한 기계들이 굉음을 내고 있었으며, 인부들은 바삐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일을 비능률적으로 하는거 같지만.. 그건 내가 개입할 일이 아니었다. 며칠째 많은 거리를 걸어서 발에 물집이 잡혔지만... 목적지를 위해서는 어쩔수 없었다. 힘들기는 하지만 걷는것도 꽤 매력이 있다. 먼저 아름다운 자연을 여유있게 감상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과도 접촉을 할 수 있다. 반바지 밖에 안 남는 나로서는 어쩔수 없이 반바지를 입고 다녀야 하는데 이곳사람들한테는 그게 흥미거리인가 보다. 지나갈때 마다 사람들이 뚫어지게 날 쳐다보고 흥미롭게 말을 걸기도 한다. 또한 길을 대규모 양떼와 마주칠때에는 가까이서 양들을 관찰하고 목동에게 윙크를 하며 지나갈수 있는 즐거움도 얻는다. 아찔한 높이에 걸친 절벽에 걸친 길은 거의 전구간에 걸쳐 공사를 하고 있다. 비록 소음은 시끄럽기는 했지만 절벽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폭포들과 아름다운 경치들의 감탄속에 그러한 불편은 잊혀지고 만다.. 30분정도 걷자 어마어마한 장면을 목격했다. 30미터 정도의 절벽이 완전히 무너져서 길이 끊겨 있었는데 그 규모가 거대했다. 우리나라의 한 산을 그대로 무너트린거 같다. 여기저기서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것으로 보아서 이곳 구간을 넓힐려고 일부러 절벽을 무너트리는 작업을 하는것 같았다. 다이너마이트 설치하는 작업도 간간히 볼 수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정말로 무식하게 작업을 하는것을 알수 있었다. 물론 쉽게 무너트릴수 있지만... 만약에 절벽이 한꺼번에 무너지면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은 고스란히 깔리는 것이다. 동티벳의 길이 높은산에 걸친 아슬아슬한 절벽에 걸쳐 있다는걸 생각해보면 얼마나 위험한 작업인지 상상할 수 있을것이다.
길이 끊긴 지점에서 공사차량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험준한 산악도로에세의 작업은 거의가 수작업이긴 하지만 모든 자제는 트럭들이 나르고 있다. 때문에 구간구간 마다 시내버스가 다니듯이 일정한 노선으로 트럭이 왔다갔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트럭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고개위쪽으로 올라가는 트럭은 무조건 잡았다. 트럭들도 어짜피 올라가는 거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날 태워 주었다. 그렇게 3번의 히치 끝에 15킬로 정도 갔다. 트럭에서 내려서 운전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잠시 걸었다. 그런데 반대편에 서양인 남녀 2명이 걸어오는게 아닌가? 그들에게 영어로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경계심을 풀면서 반가워 한다. 그들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살며 교사를 한다고 한다. 그들은 내가 출발할려는 루트랑 정 반대방향에서 출발했다. 어짜피 동티벳에서의 길은 하나이기 때문에 반대편에서 오는 여행자들끼리는 자주 마주 칠거라고 한다. 그들이 나한테 준 정보는 성도까지 곳곳에 길이 끊겨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들에게 검문소가 있는 정보를 주고 길이 끊겨진 지점을 지도에 표시해 주었다. 트럭을 타고 거의 산 꼭대기 까지 올라갔다. 올라가니까 광활한 평지가 나타났다. 거의 끝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평평했다. 길을 가다 보니 트럭들이 멈춰 있었다.. 이곳에서도 진흙탕 때문에 길이 끊겨져 있는 것이다. 잘하면 트럭을 히치해서 타고 갈려고 했던 나의 기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반대편을 향해여 끝없이 걸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산정상에 분지가 있을 줄이야.. 아까 진흙탕에 얽혀 있었던 트럭들 중에서 한대가 빠져나온 모양이다. 뒤에서 트럭소리가 들리길래 어떻게 해든 히치를 할려고 했는데 운전석에 사람이 꽉 차 있어서 타지를 못했다. 그 트럭을 놓치고 나서 무척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 파소까지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걸어야만 했다. 파소까지는 아직도 50킬로 정도 남은거 같다. 걸어가다가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티벳인들이랑 마주쳤다. 그들은 나에게 음료수를 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려고 하지만.. 그게 어디 되나?(말을 모르는데..) 그래도 1시간정도 걷고 나니 공사차량이 지나다닌다. 물론 놓치지 않고 히치를 했다. 히치를 해서 파소쪽으로 가는 내리막길까지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도대체 트럭들이 지나다니지 않는다. 이곳에서 부터는 공사차량도 지나다니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걷기만 했다. 가다가 아까 내가 놓쳤던 트럭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것만 탈 수 있다면.... 그렇지만 나를 50미터 뒤에 두고 그 트럭은 다시 떠났다.. 머야.. 나를 약올리는 건가? 트럭을 놓치고 한시간 정도 걸었다. 어라? 트럭이 한대 엎어져 있고 사람들이 주위에 삥 모여 있는것이다. 길이 막힌 구간에서 과도하게 방향을 꺽다가 옆으로 넘어진거 같다. 그런데 트럭을 자세히 보니 내가 2번이나 놓친 그 트럭이다. 순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저걸 탔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길을 계속 내려가고 있었지만 이제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동티벳을 여행한 이래 이렇게 계속 걷기만 하는거 같았다. 햇빛은 너무나 따가워서 더운데도 불구하고 긴팔 점퍼를 입었다. 그나만 지나가는 도중 나에게 말을 거는 티벳탄들이 있어 조금 힘을 내기는 했다. 오후 5시가 되자 해가 지고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파소까지의 거리는 한참인거 같은데.. 끝없는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6시가 되자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 어떻게 한담.. 주변에는 집도 없고 밤이되면 꼼짝도 못할 정도로 어둡기 때문이다. 다행히 트럭들이 조금씩 지나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결사적으로 히치를 할려는 나를 무시한채 지나가기 일수 였다. 휴.. 어떻게 한담.. 그때 밑에서 티벳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한테 몸짓으로 길이 끊어진 지점이 몇킬로 정도 되냐고 물어보니까 약 5킬로 정도 된다고 한다. 그들은 파소에서 트럭을 타고 출발하여 길이 끊어진 지점에 내린 후 걸어서 근처에 있는 자신들의 집으로 가는중이었다. 일단 길이 끊어진 지점까지 가기로 했다. 어떻게 가면 되겠지.. 30분정도 걷다가 뒤에서 초록색 트럭이 보이길래 기를 쓰고 세워달라고 했다. 저거 마저 놓치면 정말 절망일거 같았다. 그런데 트럭이 순순히 세워주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어제 타고 왔던 시체트럭이었다. 운전자도 정말 날 반가워 했다. 아침에 만났을때 자다가 출발한다고 했는데 온갖 난관을 다 극복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우리는 얼사안으면서 재회를 기뻐했다. 트럭 뒤에 타자 많은 사람과 물건이 있었다. 특히 집채만한 돼지 5마리도 같이 있었는데 흔들리는 트럭 위에서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특히 돼지들은 소리를 지르며 트럭이 흔들릴때마다 뒹구르고 있었다. 냄새도 지독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까까지 걷던걸 생각하면 이건 편한 여행이다. 트럭뒤에는 10명정도의 사람이 같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어제 같이 트럭을 탔던 라마 2명도 보인다. 트럭이 길이 끊어진 지점에 다다랗다. 차들이 길게 늘어져 서 있었다. 터프한 운전자는 내려서 다른 운전자들과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길길 뛰면서 바로 앞에 놓인 큰 돌을 두팔로 번쩍 들어서 던지는 것이다. 이런 사이코 같은 짓을 하는걸 보니 먼가 좋은 일이 있는거 같다. 알고보니 막혀 있었던 길이 우리가 도착한 시점에 뚫린 것이다. 역시.. 행운은 한꺼번에 몰아치는거 같았다. 시체 트럭이 길이 끊어지는 지점을 지나칠때 정말로 아슬아슬 했다. 잘 못하다가 트럭이 밑의 강에 떨어질 수도 있을 정도로 트럭이 기우는 것이다. 다행히 무사히 지나갔지만 다시한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시체트럭 운전자는 비포장 도로를 정말로 터프하고 빠르게 운전을 했다. 정말로
이 트럭의 박력에 나마저 팬이 되버릴 정도이다. 그렇지만 절벽위에서 그런 곡예운전을 하는 상황이라는걸 상기하면 편하게 여행할 수도 없었다.
계속되는 내리막 끝에 드디어 파소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9시가 넘어 있었다. 다시한번 시체트럭 운전자와 껴안으며 아쉽게 작별을 했다.
파소는 보미랑 비슷한 크기의 도시이다. 밤이라서 시내 전경을 볼 수 없어서 일단 교통삔관(20위엔)에 숙소를 잡고 나가서
우육면(5위엔)으로 그동안의 허기를 채웠다. 하루하루가 힘들다 보니 이제는 내일은 편할거라는 기대는 아예 안한다. 내일은 어떤 고생이 날 기다릴지 기대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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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라웍쵸의 모습.. 주변의 설산과 어울려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
무리하게 지나갈려고 쓰러진 트럭.. 만약에 이 트럭에 탔으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
정상부근에 계속된 분지.. 정말이지 끝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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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수의 동티벳 여행기 6(본다가는 길) 8월 14일(수) 어제의 피곤함으로 아침 9시가 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초대소 밖으로 나오니 화창한 날씨속에
파소시내가 보였다.먼저 주변의 사원을 갔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곳에서 규모가 되는 사원이 있기 때문이다. 파소에는
중앙에 강이 하나 흐르는데 물살의 세기가 엄청 빠르다. 만약에 휩쓸려 내려갈 경우에는 거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다리를 건너 들어간 사원은
썰렁했다. 60년대 문화혁명때 파괴된 이후 거의 복구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난 그곳 라마에게 불상은 없냐고 물어보니까.. 잠겨진 불당의 문을
열어준다. 휘양찬란한 라싸와는 달리 이곳의 불상은 겨우4개밖에 없었다. 이곳 도시가 그래도 행정구역중에 하나인데 이렇게 대표적인
사원이 썰렁한 것을 보아 다른 사원도 다르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사에서의 사원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본다'라는 작은 마을에 가는 것이 목표이다. 파소와 본다까지는 어마어마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정보밖에 없었다. 짧은
지도 상의 거리가 무려 90킬로라고 하니... 참으로 막막했다. 먼저 어제 우육면을 먹었던 가게에서 5위안을 주고 다시 한그릇
먹었고, 시장에서 과일들을 산 후에 곧바로 본다마을을 향해서 걸어갔다. 본다쪽으로 걸어가면서 군부대 앞에 있는 표지를 봤다.
라웍쵸 까지는 90킬로.. 본다까지는 93킬로.. 라는 문구가 있었다. 참으로 막막한 했다. 더군다나 지나가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아마 길이
끊겨서 그럴 것이리라.. 일단 오랜만에 가게에서 콜라를 사먹고 잠시 걸어가고 있는데 마침 트럭이 하나 지나가는 것이다. '이거라도
잡아야지.. 그래야 거리를 조금이라도 단축하겠지..' 난 다시 필사적으로 차를 세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트럭에서 내린
운전자는 벌써 2번이나 만났던 시체트럭 운전자가 아닌가? 이렇게 3번씩이나 만나다니.. 정말 놀라웠다. 어제 껴안고 헤어졌을 때 이제는 못만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오늘 아침부터 이렇게 만난 것이다. 우리는 연속 3번이나 되는 인연에 서로 크게 웃으며 다시한번
껴안았다. 3번의 인연이 범상치 않아서 이름을 물어 보았다. 이름은 '루랑빠뚱'이고, 나이는 28살이라고 한다. 우리는 기념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런데 오늘은 20위엔을 내야 한다고 한다. 하긴 그저께는 저 트럭의 용도가 시체를 옮기는 거였고, 어제는 물건(돼지,
쌀, 각종야채)들을 배달하는 것이고 오늘은 사람을 태우는 것이기에 이해가 갔다. 빠뚱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은가. 난 그와중에서도
15위엔으로 깍고 다시 트럭을 탔다. 트럭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길이 끊기고 다니는 차가 거의 없는 지금으로서는 이 트럭이 유일한
교통수단일 것이다. 트럭위에서 본 광경은 정말 환상이었다. 파소지방은 보미와는 달리 건조한 지역이다. 그래서 사방이 민둥산이
보이고 큰 나무는 보기 힘들다. 그러한 황량한 환경마저 경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지역이 바로 동티벳 지방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곳에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사실도 놀랍기도 하다. 트럭은 가다가 사람들이 히치를 하면 서곤 했다. 그렇게 잘 가던 트럭이 갑자기 뒷 타이어에
소리가 크게 나더니 바람이 세는게 아닌가? 난 걱정이 되었지만 빠뚱은 타이어를 한번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트럭을 운전한다.
길은 점점 험해지고 도로는 바로 옆의 엄청난 높이에서 떨어진 돌들로 혼잡한 양상이었다. 만약에 지나가다가 돌에 맞는다면?(살아남지
못하리..) 아슬아슬하게 달리던 트럭도 길이 완전히 끊어진데서 멈추었다. 사람들은 각자 짐을 내리고 트럭운전사 빠뚱에게 돈을
지불하였다. 맨 나중에 나도 15위엔을 낼려고 하니까.. 빠뚱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냥 가라고 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이미 친구가 되어있었다. 빠뚱과 마지막으로 포옹을 하고 끊어진 길을 넘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자연환경은
나무를 찾아보기 힘든 황량한 지역이다. 그래서 절벽이 무너질때가 많은거 같은데 잘못하다가는 큰일을 당하기 쉽상이다. 한국인인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한 할아버지가 계속 나한테 따라 붙더니 절벽쪽으로 걷지 말라고 주의를 주신다. 고마우신 분이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은
알 수 있을거 같았다. 주의하면서 길을 가다가 반대쪽으로 오는 서양인 2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프랑스인들로서 쿤밍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날짜는 10일이 걸렸다고 한다. 언제간 쓰여질 귀중한 정보들을 안고 다시 길을 걸었다.
2시간 정도 빠른걸을으로 걸어가니까 중국군 보초가 보이고 터널 비슷한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차들이 몇대가
서있었고 사람들이 모여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터널을 통과할려고 하는 찰나 6대의 자전거가 보였다. 그 위에는
서양사람들이 타고 있는게 아닌가.. 오늘따라 이상하게 외국인들을 많이 본다. 그들은 에스토니아인들로서 몽고에서 시작하여 자연거로
9개월째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추어인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행 경력이다. 그들과 다시 정보를 교환한 후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났다.
터널을 지나 큰 다리를 건너자 휴게소 비슷한 건물이 나왔다. 제일 앞서서 왔던 난 여기에서 쉬는것보다는 급하게 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서 길을 계속 걸었다. 훗날 확인된 거지만 여기서 기다리지 않고 그냥 계속 걸어갔던것은 큰 실수였다. 여기서 조금 더
기다려서 사람들이랑 지름길로 갔으면 더 빨리 갈 수 있었을것이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길도 나름대로 많은 추억을 안겨다 주었다.
길을 가는데 중국군복을 입은 아저씨 한명이 나에게 말을 붙일려고 한다. 내가 무엇을 물어볼때마다 생각도 안하고 '틴부동(못
알아듣겠다)'라고만 한다. 그러면서 중국어로 나한테 무조건 묻기만 한다. 평소때 같으면 이해해서 대답해 줄려고 노력을 했겠지만 나 또한
무관심하게 '틴부동'만 말했다. 이곳 고개 이름은 자감라(론니플래닛에 표기)라고 불리는 고개이고 4800미터가 넘는다. 걸어서는
산길로 10킬로 정도 걸으면 넘을 수 있지만 정보가 없었던 난 우회하는 차량도로 70킬로를 그대로 돌았다. 이 곳은 정말로
웅장했다. 티벳은 여러 종류의 자연환경이 날 감탄하게 만든다. 웅장한 산림이 나를 감탄시키게 만드는 반면, 이 곳처럼 오히려 나무가 없는 대신
웅장한 지형을 그대로 다 볼 수 있어 그것에 감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따가운 햇빛에 대해서는 그대로 노출이 되어야 했다.
걷기 시작한지 1시간이 좀 넘어서 아침에 시장에서 산 과일들이 다 떨어졌다. 물을 준비해오지 않은게 정말 실수 였다. 길을 걷다
보면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오는것을 볼 수 있었다. 처음 그들을 보았을때 가까운곳에 차량이 있겠다는 판단을 했지만, 어제 이곳 고개를 출발 했다는
그들의 대답을 들을때 정말이지 절망스러웠다. 따가운 햇빛과 무더운 날씨는 점점더 갈증을 유발했다. 때문에 30분 걷다가 그늘진
장소를 발견하면 잠시 쉬어가는 과정을 반복했다. 길을 계속 걷다보니 트럭 한대가 보였다. 그 트럭에 가니까 한 가족이 있었고,
그들은 나한테 애원하는 눈빛으로 트럭을 운전해달라고 한다. 참으로 황당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트럭을 운전해달라고 하다니..
그런데 트럭운전사인듯한 티벳족 아저씨의 한쪽눈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아마 사고를 당해서 트럭이 뒤집혀졌고 아저씨의 눈이 실명이 된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티벳 가족들은 계속해서 애원하는 눈빛으로 트럭을 운전을 해달라고 한다. 여기서 잠시.. 그렇다면 나의
운전실력은? 일단 1종면허는 가지고 있다. 면허는 집에 있는 차를 이용해서 바닥에 선을 긋고 연습을 해서 딴것이고, 무엇보다 나의 의지보다는
아버지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면허를 땄던 것이다. 때문에 면허를 딴뒤에는 운전대를 전혀 잡아보지 못했고, 헤드라이트를 어떻게 키는지, 와이버를
어떻게 돌리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순간 트럭을 운전해보는 경험을 가져볼까 라는 유혹이 몰려왔지만 이곳 절벽에서 트럭을
운전한다는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 이다. 그 가족들에게 한사코 거절을 하고 물이나 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물은
없다고 하며 트럭을 운전해서 밑으로 내려가면 물이 있을것이라고 하면서 날또 유혹한다. 그들을 뿌리치고 다시 위를 향해 걸어 갔다.
산허리를 돌아서 절반정도 왔겠다는 판단이 들었을때 부터 위험한 유혹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가파른 산이니만큼 차량도로는 완전히
우회하기 때문에 차량도로를 그대로 따라가면 먼거리를 가야만 했다. 하지만 산을 기어올라가면.. 처음에는 경사가 별로 없는 구간은 그냥 질러서
갔지만 산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위험해진다. 한번은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거의 절벽에 몸을 완전히 기대면서 질러갔다. 그런데
밑의 낭떨어지를 보니까 어마어마한 깊이이다.. 순간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전체가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못한 상태이고 지반도
약해서 디딤발이 있는 지점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이다. '인생인 한방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태어나면서 축적해 놓았던 모든
힘들 다리에 모아서 거의 뛰어가다시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올라갔다. 결과는 성공.. 다시 도로로 올라가자 마자 잠시 쓰러져 숨을
골랐다. 그렇게 혼이 나고도 질러갈수 있는 지점이 나오면 계속 질러갔다. 저녁때쯤 되자 집한채가 나왔다. 혹시
사람이 있을까해서 집안쪽으로 들어가니까 버려진 집이다. 대신 중국대학생 2명이 자전거를 가지고 이곳에서 잘려고 하고 있었다. 정말로 반가웠다.
그들에게 가서 물을 좀 얻어먹고(그들도 물어 거의 없었다.)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그들과 영어가 통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중국 대학생들은 그냥 여기선 잔다고 하면서 같이 지내자고 한다. 그렇지만 난 계속해서 올라갈거라고 했다. 그들이
곧있으면 밤이 되고 위험할거라고 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비가 거의 오지 않은 이곳은 하늘은 맑을게 분명하고 달과 별빛으로도 충분히 길을 갈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들에게 지금 3명이서 보내기에는 물이 턱 없이 부족하고 난 먼저 갈거라고 했다. 그리고 떠났다. 잠시
올라가다가 밑을 보니 그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시 길을 가는게 보였다. 아마 나의 확신에찬 표정에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나 보다. 이
날은 밤 늦도록 가지는 못했지만 중국대학생 2명과 난 인심좋은 티벳 농가에서 잘 수 있었다. 비록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티벳 농가 체험을
하는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중국 대학생은 한명은 북경에서 대학을 다니는 25살 나랑 동갑인 공대생이고 한명은
충칭에서 대학을 다니는 24살 공대생이다. 그들은 티벳을 자전거로 횡단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자전거는 그야말로
완전무장이었다. 거의 모든 여행에 필요한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나의 빈약한 물품들을 보면서 오히려 그들이 놀랬다. 저렇게도 여행을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산악여행에 필요한 장비는 전무하고, 바지도 없어서 반바지만 입고 다니고.. 가방의 짐도
없는편이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곳 농가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 밤이면 어두워지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우리는 먹을것을
나눠먹고(내가 일방적으로 얻어먹음) 일찍 잠 들었다. 생각해보니 이날은 돈을 한푼도 들이지 않았다. 제일 저렴하면서도 알찬 여행을
나는 지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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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연속 만나서 친해지고 신세를 진 터프한 트럭운전사 빠뚱과 함께 |
폭우로 인해 이 구간도 무지막지하게 끊겨 있었다. |
자전거로 티벳을 여행중인 중국인 대학생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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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수의 동티벳 여행기 7 (본다가는 길) 8월 15일(목) 47년전, 오늘은 우리가 광복을 맞이한 기쁜날인 지금 난 외딴 티벳 농가에서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어제 일행이 된 중국대학생들과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식사라고 해봤자 미숫가루 비슷한 가루와 소세지와 빵이 전부이다. 바로 옆에 계곡이 있어서 그런지 공기가
상쾌하다. 바쁜 길을 가야했던 우리 일행은 곧바로 어제 신세를 진 티벳농부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우리 일행은 본다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떠났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을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제와는 다를게 없었다. 난 끝없는 길을 계속 걸어가고,
중국대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올라오고 있었다. 기어를 최대한으로 낮춰서 올라가는 중국 대학생들 보다는 지름길이 있으면
질러가는 내가 더 속도가 빨랐다. 어제와 다른점이 있으면 이제 간혹가서 집들이 보이고, 야크와 양들이 풀을 뜯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산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아래와는 다르게 식물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왜 아래는 건조하고 위는 습한지에
대해서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해명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3시간정도 걸어가자 트럭 한대가 서있는것이 보였다.
고장난 트럭인거 같았는데 운전사한테 물어보니 본다는 20킬로정도 남앗다고 했다. 어제 처음 출발한 시점에서 70킬로 넘게 온
것이다. 희망이 다시 생겼다. 거리가 많이 남지 않았다는것은 이미 직감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수치를 알게 되자 기분도 더 좋아졌던 것이다. 소풍
온 기분으로 길을 걸어갔다. 악전고투를 벌이던 어제와는 달리 이제 즐기면서 길을 갔다. 오래지 않아 엄청난 행운이 몰아쳐왔다. 바로
밑에쪽에서 올라오는 트럭이다. 당연히 히치를 했다. 트럭운전사는 웃으면서 흔쾌히 날 태워주었고 그대로 본다까지 갔다. 본다로 트럭을 타는 도중
자감라 고개의 정상을 지나쳤고, 바로 밑에 보이는 본다까지 쭉 내달렸다. 마치 알프스 하이디에 나오는 광경과 같이 광활한 초원에 여기저기서
가축들이 풀을 뜯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비가 약간 오기는 했지만 트럭은 무사히 날 본다까지 실어다
주었다. 티벳의 제2의 도시 참도로가는 북쪽길과 마캄으로 가는 동쪽길로 나누어져 있는 본다는 2군대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갈림길에 들어선 본다는 트럭정류소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진짜 본다는 북쪽길로 6킬로 정도 가야 했다. 갈림길의 신본다는 전체적으로
공사를 하고 있어서 많은 트럭들로 분주한 분위기였다. 본다에 들어서서 일단 사과탄산음료(티벳에서 인기)를 사서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동쪽이냐 북쪽이냐.. 원래 계획대로라면 동쪽을 택해야 했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때문에 아예 티벳 제 2의
도시를 보고 올까라는 유혹이 몰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동쪽으로 통하는 버스는 없다고 한다. 그것은 길이 끊겨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
이다. 결국.. 짧은 시간에 한개의 도시라도 더 확실히 보기 위해 북쪽길을 택했다. 일단 히치를 해서 원래의 본다인
구본다를 구경했다. 히치를 하고 구본다에 도착하자티벳의 작은 마을로서 이곳 아이들은 외국인인 날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본다쓰(사원)는 360년된 오래된 절이지만 문화혁명때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본다쓰에 들어갔을때 마침 법회가 열리는
중이었다. 구본다는 별로 볼게 없었다. 볼거라고는 마을과 어우러진 주변 환경일 것이다. 구본다는 잘곳도 마땅치 않아서 다시 히치를
해서 신본다로 갈려고 했다. 트럭 히치를 하고 돌아가는 도중 길이 막혔다. 도로공사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차량의 길도 안 터주고
공사하는 행태는 이미 익숙해졌다. 짜증스럽지만 기다릴수 밖에.. 그런데 행운이 찾아왔다. 반대편 차량중에 참도로 가는 버스가 있었던
것이다. 트럭에서 내려 버스로 가서 참도까지의 가격흥정을 했다. 처음에 70위엔 부르는것을 60으로 깍았다. 그래도 비싸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일단 참도로 가는게 급했다. 버스에 탈 시점에 이미 저녁이었다. 완전한 비포장도로라서 버스는 더디게 목적지를 향해
진행되었다. 20킬로 정도 가니까 참도공항이 보였다. 공항이라고 하지만 건물은 거의 없다. 아마 세상에서 이렇게 부실한 공항은 처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지역을 벗어서 버스가 향하고 있을때 버스뒤에 오토바이 2대가 따라 붙었다. 티벳사람들이 탄 오토바이인데 우리
버스를 세우더니 흉악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기사에게 말하는 것이다. 무슨일이지? 외국인인 난 긴장 되었다. 버스는
오토바이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버스가 닿은 곳은 콘크리트 건물이 몇개 보이는 농장 같았는데 오토바이를 탄 건장한 청년들이 우리를 둘러 쌓았다.
혹시 떼강도? 그들의 인상은 지저분했고 머리 여기저기에는 빨간실과 함께 머리를 땋았다. 말이 안통해서 무슨일인지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승객들의 표정을 보면 안 좋은 분위기임에 확실했다. 바로 가까이 랜드크루저 한대 가 3대의 오토바이의 추격을 받으며
달아나는게 보였다. 와 장난 아니구나..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한 표정으로 여권과 달러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쥐었다. 만약에 여기서
봉변을 당한다면.. 아마 아무도 모를것이다. 한국에는 그저 실종되었다고만 알려지겠지.. 여행을 하면서 여러 위기가 있었지만 공포감은 이때 느낀게
최고였다. 다행히 우리 버스에는 라마(승려)2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비장한 결심을 하고 강도라고 추측된 청년들과 교섭을 했다.
티벳사람들에게 라마는 어디를 가나 존경의 대상이다. 때문에 그들이 교섭을 하러 갔다는걸 알 수 있었다. 무서운 적막감이 버스안에
흐른 잠시.. 라마들이 웃으면서 다시 버스에 탔다. 티벳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라마와는 말이 잘 통하는 모양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오토바이족 청년들의 휘발유를 비싸게 사주는 선에서 해결이 된 모양이다. 휘발유는 꽤 많이 실었는데.. 경제력이 없는 오토바이
청년들이 휘발유를 어디서 구했는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단지 지나가는 한족이 운전하는 유조차를 하나 털었으리라는 추측만
했다. 휘발유를 버스위에 싣는데 2시간 넘게 걸렸다. 결국 밤이 되었고, 아무 탈 없이 오토바이 청년들의 손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밤이라서 버스 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포장 도로가 심해서 버스가 많이 흔들리기는 해도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버스가 갑자기 멈추었다. 앞을 보니 돼지를 실은 트럭이 뒤집혀 있는 것이다. 기사와 보조기사는 돼지를 흩어지게 하지
않을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도움을 받기 힘든 상태에서 저렇게 아침까지 있을걸 생각하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버스는 식당앞에 멈췄다. 거기서 5위엔짜리 국수를 먹었다. 참도에 가까워지자 버스의 흔들림이 없어졌다. 이제 포장도로가 나온것이다.
그만큼 참도와 가까워졌다는 뜻이겠지.. 본다~참도구간의 경치는 거의 암흑으로 기억되는게 아쉽기는 하지만 언젠간 다시 와서 볼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참도터미널에 도착했을때는 새벽 3시였다. 일단 무조건 터미널초대소에 들어가서 잠을 잤다(15위엔). 나와
라마 2명과 함께 방을 썼다. 우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고 침대를 향해 뻗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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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화 과정에서 햇빛이 들어가서 귀중한 사진들이 날라갔다.. 때문에 이 날에 대한 사진은 기록에 남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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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수의 동티벳 여행기 8 (참도 이후) 8월 15일(목)~ 8월 26일(월) 새벽에 여관에서 자고 일어나니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참도는 근처의 도시에 비해서 큰 티벳의 대도시급에 속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참도시내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잠파라쓰(사원)에 가는 것이다. 잠파라사원은 대규모의 사원이기는 하지만 라싸의 사원과는 달리 관광객이 거의 전무한 관계로 입장료를 받지 않았고, 진정한 티벳 사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참도 시내의 모습은 활기가 있었다. 시장이 발달해 있는 특징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는게 특징이었다. 이곳에서 대만, 일본 여행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라싸를 가기 위해서 1주일 이상 머물러 있었는데 내가 길이 끊어졌다는 정확한 정보를 주어도 그저 라싸로 가는 버스를 매일 기다리고 있었다. 참도에서 며칠 있다가 성도로 가는 버스를 탔다. 요금은 무려 410위엔.. 60시간의 고행이었다. 침대버스의 자리도 맨뒤 중간 상층 자리로서 최악이며 버스의 거의 모든 구성원이 남자라서 줄담배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비포장길이 나의 괴로움을 가중시켰다. 특히나 도로를 공사한다는 이유로 자주 길이 막혔는데.. 1~2시간의 지체는 감사하고, 심지어는 12시간동안 가만히 멈춰서 서있는 경우도 있었다. 정확히 60시간의 고행끝에 도착한 성도.. 도착시간은 새벽 4시였다. 곧바로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성도~청도 구간 기차표를 끊었다. 성도의 KFC에서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고, 1시30분에 기차를 탔다. 무려 40시간.. 구형기차의 잉쭈어(딱딱한 의자)는 정말로 많은 인내를 요구했다. 특히나 60시간 버스를 탄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라서 고통은 더 했다. 그렇지만 기차안에서 중국 서민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청도에 도착하자마자 배시간들을 알아 보았다. 위하이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가 다음날 있었다. 곧바로 위하이로 직행... 위하이에 도착하자마자 배표를 끊고 점심을 먹으로 시장을 갔다. 조선족 아줌마의 도움을 받아서 싸고 맛있는 냉면집에서 냉면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그날밤.. 중국에서의 마지막밤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맥주와 노점상에서 파는 꼬치와 오징어를 사들고 나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한 잔 했다. 그동안의 여행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나와 만난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 앞으로의 여행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경험들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본 외국... 첫 수업치고는 힘들었지만 힘든만큼 내실있는 여행이 되었다고 자평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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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파라쓰에서 바라본 참도 시내의 모습 2개의 강과 양쪽에 펼쳐진 산맥들이 참도를 둘러 싸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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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도에서 출발하여 60시간의 고행끝에 도착한 성도역.. 곧 40시간의 고행이 시작되는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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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종착역인 위하이 해변.. 나의 모습은 중국인들도 꺼려하는 모습이다. |
바이이시내 옆을 흐르는 알룽창포강. 동티벳은 알룽창포강을 중심으로 도시와 마을이 있다. |
바이이 시외에 있는 대학교. 이런곳에도 대학이 있다는 것에 신기해서 들어가봤다. 역시 이곳 대학생의 영어실력은 제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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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이에서 링쯔로 가는 길에 본 염소의 모습 |
바이이보다는 규모는 작지만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쌓인 링쯔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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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쯔에서 세킴라 고개로 가는 길. 가까운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
이날은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여행을 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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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도로는 어느새 끝나고 끝없는 비포장 도로가 이어졌다. |
세킴라고개의 도로는 계속되는 공사구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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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킴라고개의 울창한 숲.. 마치 열대지방의 정글을 보는 듯 했다. |
여기저기 높은 키의 나무들이 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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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고개에 길은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
높은 지대라 그런지 구름은 항상 낮게 깔려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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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완전히 무너진 구간에서 기념으로.. |
길이 끊어진구간을 건너가자 많은 트럭들이 대기했다. 거기서 친해진 티벳부부와 중국인 청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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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킴라 고개정상 부근. 키큰 나무들은 없고 드넓은 초원이 나타난다. |
세킴라고개 정상에서 찍은 초원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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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길이 끊어진 구간. 정리하는데는 몇 달이 걸릴 듯 |
루랑으로 가는 길.. 울창한 초목들이 다시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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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식 망가져 가는 나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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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랑에서 보미로 가는 길 계속되는 비포장 도로와 정글의 연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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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룽창포강 상류. 설악산 천불동 계속과 흡사한 풍경이다. |
비포장 도로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정리가 잘 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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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메라는 마을에서 잠깐 찰칵 |
2개의 강이 합류를 하는 지점.. 양쪽의 물 색깔이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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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숲과 저 멀리 설산이 보인다. |
설산으로부터 흘러온 눈 녹은 물이 강과 합류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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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안에서 찍은 알룽창포강의 모습 |
길은 아슬아슬하게 절벽을 걸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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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 본 강의 모습..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수십미터 절벽을 차는 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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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폭포의 모습. 알룽창포 협곡 곳곳에 폭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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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미시의 여관에서 지켜본 중국군의 사열 모습. 이런곳까지 군대가 진주한 모습에 놀랬다. |
보미시 다리에서 본 설산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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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의 티벳인에게 부탁해서 기념으로.. 이미 바지는 반 바지밖에 없었다. |
보미시에서 가장큰 시장..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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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미시를 벗어나서.. 마치 알프스산에 온 것 처럼 평화롭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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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길이 끊겨진 지점에서.. 이때부터 편하게 동티벳을 여행한다는 생각은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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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지점을 넘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바로 뒤에 시체트럭이 있었다. |
라웍쵸의 모습. 도로라고 불릴 수 없는 도로와 길이 끊겨서 갈곳없는 트럭들로 다소 혼잡한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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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웍쵸의 모습.. 사진에는 표혀되지 않았지만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
티벳에서는 간간히 지나가는 양떼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
도로공사를 하는 모습. 이런 엄청난 절벽사이로 다이너마이터를 터트린다.. 큰 사고가 날까 걱정된다. |
파소에서 본다로가는 구간.. 건조기후의 특성이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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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룽창포강은 미얀마를 향해 흐른다. |
파소로가는 길..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풍경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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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도중에 만난 티벳 목동.. 티벳사람들은 친근하고 외국인에게 친절하다 |
이곳에서 야크는 중요한 운송수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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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정상 부근에서.. 아름다운 구름과 함께한 초원의 모습 |
정상의 비석에는 많은 카타와 부적들이 걸려있다. 가끔 돈도 볼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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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차 트럭위에서 찍은 사진 |
파소 근처에 있는 사원.. 많이 파괴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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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소에서는 물을 끌여들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 |
나의 복장.. 햇빛을 막기위해 잠바를 입고 반 바지와 슬리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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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처지의 중국인과 함께.. |
길은 곳곳이 산사태로 무너져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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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위를 쳐다보면 초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수백미터의 절벽이다. 위에서 돌이라도 떨어지면.. |
참도의 잠파라사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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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파라사에서는 아침부터 라마들이 토론회를 하고 있었다. |
다리위에서 찍은 참도시내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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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하루 같은 방을 쓴 라마와 함께.. 말은 통하지 않지만 이미 친해져 있었다. |
성도로 가는 버스에서 내려 잠시 찰칵.. 이때는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
위하이 항구의 모습 |
마지막날 위하이 항구에서 찰칵 |